목차
Ⅰ. 개요
Ⅱ. 제1차세계대전의 촉발
Ⅲ.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
Ⅳ. 제1차세계대전의 과정
1. 1차세계대전의 개시
2. 확대되는 전국
3. 전시체제
4. 미국의 참전
5. 러시아 혁명
6. 독일의 패전
Ⅴ. 제1차세계대전의 영토분쟁
Ⅵ. 제1차세계대전의 러시아혁명
1. 독일의 계산
2. 브레스트-리토스크조약
Ⅶ. 제1차세계대전의 중국참전
1. 중국에 대한 참전 권유
2. 일본의 비밀 교섭
3. 중국 참전의 의의
Ⅷ. 제1차세계대전의 독일책임
참고문헌
Ⅱ. 제1차세계대전의 촉발
Ⅲ.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
Ⅳ. 제1차세계대전의 과정
1. 1차세계대전의 개시
2. 확대되는 전국
3. 전시체제
4. 미국의 참전
5. 러시아 혁명
6. 독일의 패전
Ⅴ. 제1차세계대전의 영토분쟁
Ⅵ. 제1차세계대전의 러시아혁명
1. 독일의 계산
2. 브레스트-리토스크조약
Ⅶ. 제1차세계대전의 중국참전
1. 중국에 대한 참전 권유
2. 일본의 비밀 교섭
3. 중국 참전의 의의
Ⅷ. 제1차세계대전의 독일책임
참고문헌
본문내용
것이 전쟁에 의한 손실과 피해에 대한 보상의 의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과연 전쟁책임에 대한 이러한 일방적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한지, 더 나아가 대전의 보다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대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자들인 클레망소(G.E.B. Clemenceau)와 로이드 조지(D. Lloyd George)는 독일이 전쟁을 책임을 져야하며 따라서 자국이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처벌적인 이러한 결정들은 독일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승전국들, 특히 영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이는 유화정책의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확실한 것은 비록 독일이 러시아, 프랑스와의 전쟁을 예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열강들은 전쟁을 정치의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따라서 독일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영국과 미국은 보어전쟁(Boer War)과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을 일으켜 승리하였다.)이다. 한편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콘라드(Conrad von Hotzendorff) 원수는 전쟁의 목적을 암살에 대한 보복이 아닌 ‘멸망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독일의 베트만 홀베트(Bethmann-Hollweg) 재상이 당시 대전의 발생을 얼마나 우려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심지어 빌헬름(Whilhelm) 황제조차 대전의 확대를 원치 않았다.
나아가 우리는 발칸(Balkan)이 이미 백 년 전부터 분쟁의 지역이었으며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경험한 적도 있다는 점(크리미아 전쟁-the Crimean War), 정치적 인물의 암살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던 사건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후 역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었었다-사라예보(Sarojevo)의 총성이나 동방문제만으로 대전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다. 3국 동맹과 3국 협상의 대립을 실질적으로 살펴보면, 프랑스, 독일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방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동방을 놓고 갈등했으나 알자스 혹은 해군력 경쟁과는 이해관계가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극체제가 경직되어 유연성을 상실한 나머지 위기를 협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맹의 주체들이 정해져 움직일 수 없으며 그 상태가 영속적이 될 때 나타난다. 대전 전이 이 상황은 우선 왕가 간의 합종, 연횡이 주를 이루던 이전과는 달리 민족주의가 동맹체제에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국내적으로 베트만 홀베크(Bethmann-Hollweg)와 같은 문관들이 티르피츠(A.Tirpitz)로 대표되는 호전적 군부를 통제할 수 없었던 독일이나 대중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영국의 상황도 국가간 유연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보다 중요하게, 점차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이 정부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비록 자본주의 자체가 대전의 근원이라든가 자본가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련의 주장은 물리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성상 자국 경제의 끊임없는 팽창을 요구하였으며, 비스마르크(O.E.L.Bismarck)의 절제된 야심과는 달리 빌헬름(Whilhelm) 2세나 티르피츠(A.Tirpitz)의 세계정치에의 야망은 영국에 위협을 가하여 협상을 어렵게 하였다.
이상에서와 같이 전쟁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확대되었다.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서, 독일이 통일과 성장 이후 어찌 보면 정당한 보다 큰 권력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대전에 일정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약문서와 같은 소박한 설명으로 인류 최대의 재난을 설명하는 것은 수용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김옥수, 제1차 세계대전과 반전시, 새한영어영문학회, 2010
* 역사교육교재연구원, 제1차 세계 대전 30, 범한, 2005
* 이승용, 어둡고 빠른 해협 : 제1차 세계대전, 대한민국 공군, 2006
* 이건민,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초인플레이션, 서울대학교경제연구소, 2010
* 오선정,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관한 사회지성사적 검토, 서강대학교, 2009
* 전상숙,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과 민족 지도자들의 대외 인식,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4
대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자들인 클레망소(G.E.B. Clemenceau)와 로이드 조지(D. Lloyd George)는 독일이 전쟁을 책임을 져야하며 따라서 자국이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처벌적인 이러한 결정들은 독일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승전국들, 특히 영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이는 유화정책의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확실한 것은 비록 독일이 러시아, 프랑스와의 전쟁을 예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열강들은 전쟁을 정치의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따라서 독일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영국과 미국은 보어전쟁(Boer War)과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을 일으켜 승리하였다.)이다. 한편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콘라드(Conrad von Hotzendorff) 원수는 전쟁의 목적을 암살에 대한 보복이 아닌 ‘멸망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독일의 베트만 홀베트(Bethmann-Hollweg) 재상이 당시 대전의 발생을 얼마나 우려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심지어 빌헬름(Whilhelm) 황제조차 대전의 확대를 원치 않았다.
나아가 우리는 발칸(Balkan)이 이미 백 년 전부터 분쟁의 지역이었으며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경험한 적도 있다는 점(크리미아 전쟁-the Crimean War), 정치적 인물의 암살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던 사건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후 역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었었다-사라예보(Sarojevo)의 총성이나 동방문제만으로 대전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다. 3국 동맹과 3국 협상의 대립을 실질적으로 살펴보면, 프랑스, 독일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방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동방을 놓고 갈등했으나 알자스 혹은 해군력 경쟁과는 이해관계가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극체제가 경직되어 유연성을 상실한 나머지 위기를 협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맹의 주체들이 정해져 움직일 수 없으며 그 상태가 영속적이 될 때 나타난다. 대전 전이 이 상황은 우선 왕가 간의 합종, 연횡이 주를 이루던 이전과는 달리 민족주의가 동맹체제에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국내적으로 베트만 홀베크(Bethmann-Hollweg)와 같은 문관들이 티르피츠(A.Tirpitz)로 대표되는 호전적 군부를 통제할 수 없었던 독일이나 대중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영국의 상황도 국가간 유연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보다 중요하게, 점차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이 정부들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비록 자본주의 자체가 대전의 근원이라든가 자본가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련의 주장은 물리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성상 자국 경제의 끊임없는 팽창을 요구하였으며, 비스마르크(O.E.L.Bismarck)의 절제된 야심과는 달리 빌헬름(Whilhelm) 2세나 티르피츠(A.Tirpitz)의 세계정치에의 야망은 영국에 위협을 가하여 협상을 어렵게 하였다.
이상에서와 같이 전쟁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확대되었다.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서, 독일이 통일과 성장 이후 어찌 보면 정당한 보다 큰 권력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대전에 일정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약문서와 같은 소박한 설명으로 인류 최대의 재난을 설명하는 것은 수용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김옥수, 제1차 세계대전과 반전시, 새한영어영문학회, 2010
* 역사교육교재연구원, 제1차 세계 대전 30, 범한, 2005
* 이승용, 어둡고 빠른 해협 : 제1차 세계대전, 대한민국 공군, 2006
* 이건민,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초인플레이션, 서울대학교경제연구소, 2010
* 오선정,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관한 사회지성사적 검토, 서강대학교, 2009
* 전상숙,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과 민족 지도자들의 대외 인식,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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