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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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발자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
 (1) 일제의 식민사학
 (2) 국사관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3)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고원훈
3.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듯하다.
고원훈은 1924년 12월에 중추원 참의를 그만두고 전라남도 참여관이 된 뒤1926년에 경상북도 참여관, 1929년에 평안남도 참여관을 거쳐 경기도 참여관, 1930년 4월에 평안북도 참여관을 지냈다. 참여관은 도지사의 자문기관 이었으나 자문만 담당하는 것에 그치질 않았다. 각도에는 조선인 참여관을 1명씩 두었는데 이들은 도의 사무관이 맡는 각도의 부장을 겸임하거나 총독부 아래 각종 위원회 지방위원을 같이 맡았다. 일제시대 도의 행정기구는 도지사 아래 지사관방·내무부·경찰부·산업부가 있었다.
1932년 9월 26일에 고원훈은 드디어 전라북도지사가 되었다. 도지사는 일제의 깊은 신망을 얻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일제시대 조선인으로 도지사까지 오른 사람이 모두 합쳐야 42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 지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원훈이 그러한 도지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성전문학교 교장에서 마흔셋에 다시 참여관으로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7∼8년 동안 일제에 충성을 다 바친 결과였다.
{조선공로자명감}에서도 이야기 하듯이 교육계에서 전신한 뒤 역량이나 인격에서 조선인 행정관 가운데 뛰어난 빛을 보여 일제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1936년 5월 22일 고원훈은 전라북도 지사를 휴직하였다.
-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고원훈도 다른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더욱 적극적으로 반민족 행위를 벌여나갔다. 1937년 일제는 중국 침략을 감행한 뒤 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이 동아시아의 안정세력으로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해야 하며, 교전 상대국인 중국을 섣불리 보거나 너무 거대하게 보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인식시킨다는 명목으로 친일 인사들을 강연에 앞장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강연에서 고원훈은 내선일체와 황도실천을 주장하는 강연을 하면서 일제의 계속적인 조선지배와 중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1938년 7월 경성 여자고등 보통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후원하고 조선 교화단체 연합회가 주최하는 시국대책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고원훈은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1939년 8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연맹이 주최한 국민정신 선양 각도 강연행각에 참가하여 전력(戰力)을 증산하는 데 앞장설 것과 지원병에 응모하라는 강연을 하고 돌아다녔다. 고원훈은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일본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이 되라고 소리 높여 강연했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여러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 광복 직전에 중추원 참의 재임명
고원훈은 이즈음에 창씨개명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자신도 성을 고우모토(高元) 이름을 이세오(勳)로 고쳤다. 뿐만 아니라 1942년 5월16일에 ‘징병제 실시와 우리의 장래’라는 징병제 실시 기념 강연을 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시작한 이래 학병 모집에도 앞장섰다. 고원훈은 동광제사(東光製絲) 사장으로 있으면서 거액의 이윤을 본 거부로도 유명했다. 1944년 8월에 고원훈은 그 이윤의 일부를 떼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사용할 비행기를 생산하는 조선항공 공업회사를 세우고 이사가 되었다.
1945년 2월에는 대화동맹의 심의원이 되었다. 대화동맹은 필승체제를 확립하고 내선일체를 촉진할 것을 목표로 황도공민의 자질을 기르고, 징병·근로·모략방지에 중점을 둔 결전 체제를 강화하며, 내선 동포의 정신적 단결을 촉진하며, 증산·공출의 책임을 완수하는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설립한 친일 단체였다. 또 그는 그해 6월 24일 부민관에서 대화동맹의 자매당으로 설립된 대의당의 위원이 되었다. 대의당의 취지서 요지는 ‘전국은 바야흐로 황국이 흥하느냐 망하느냐를 결정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 위기를 새로운 계기로 돌리는 데는 국민의 결사적인 결의와 분투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들 반도 2600만 동포는 황국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몸과 가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작은 의리를 던져 버리고 오직 충군애국이라는 대의에 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1940년에 중추원 참의가 된 고원훈은 광복을 두 달 남겨둔 6월 6일에 참의로 재임명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임기가 만료된 중추원 참의 33명을 바꾸고 일부 빠진 인원을 채워 넣었으며 고문 2명을 발령하였다. 고원훈은 일찍이 1924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실질적인 관료의 길을 걸으면서 그 자리를 그만 둔 적이 있다. 이제 여러 친일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하며 친일에 앞장섰던 고원훈은 환갑 나이에 다시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라고 하는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그 영예(?)를 안은 채 광복을 맞았던 것이다. 고원훈은 6·25 때 납북되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태어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다양하게 해보고 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욕이 되지는 않는다. 팔자가 기구해서 그런 사람도 있을테고, 어떤 이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나서 많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주도 재주 나름이고 다양한 삶도 삶 나름이다. 재주가 뛰어나되 그것이 빼앗긴 나라에서 제국주의 지배자들에 대한 앞잡이 노릇 잘하는 재주라면 그 사람의 다양한 삶은 변절에 능숙한 자의 뛰어난 처세술이다.
3. 맺음말
고려시대의 예문춘추관이나 조선시대의 춘추관은 국가에서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전담기관으로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편찬 전통을 이어받아 창설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는 시절도 있었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재해 있는 상태이다.
또 국사편찬위원회의 발자취를 조사하면서 많은 자료가 없어 힘들었다. 이는 제대로 된 위원회사(委員會史)가 없기 때문이다. 어렵게 도선관에서 찾은 1990년판 위원회사에도 많은 한자가 있어서 너무 힘들었다.
참고문헌
-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편집부역, 시인사, 서울, 1986.
- 國史編纂委員會史, 국사편찬위원회편, 과천, 1990.
- 朝鮮史編修會의 組織과 運用, 김성민, 국민대 대학원, 1993.
- 阿部薰 編, {朝鮮功勞者銘鑑}, 민중시론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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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1
  • 저작시기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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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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