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발표의 목적
Ⅱ. 초기 서사에 나타난 비극적 세계상
1. 「단군신화」- 호랑이,「주몽설화」- 유화부인,「백제 건국 설화」中 비류설화
Ⅲ. 『삼국사기』中「열전」과 『삼국유사』에 드러난 비극 소설의 기원
1. 비극적 세계관을 지닌 인물의 등장
(1) 숭고와 슬픔 : 관창과 원술
(2) 인물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투지와 좌절 : 온달과 평강공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2.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한국적 비극 서사물
(1) 인본주의를 담은 서사무가의 기원 : 「박제상과 부인 이야기」, 「김현감호」
(2) 애정비극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양자 희생형 서사 : 「조신전」, 「최치원전」
(3) 혈육의 죽음을 노래한 향가 : 「제망매가」
Ⅳ.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학(향가)과 권력의 관계
1. 노래의 새로운 모습 : 향가
2. 향가의 작품세계
(1) 민요 계통의 기원적 노래 -「서동요」
(2) 화랑의 노래 - 「모죽지랑가」
3. 문학과 권력의 관계
(1) 통일 신라의 불국토 사상
① 불교적 신앙심의 수용을 넓히기 위한 노래 -「원왕생가」
② 왕권 강화와 지배 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노래 -「처용가」
Ⅴ. 결론
1. 발표의 목적
Ⅱ. 초기 서사에 나타난 비극적 세계상
1. 「단군신화」- 호랑이,「주몽설화」- 유화부인,「백제 건국 설화」中 비류설화
Ⅲ. 『삼국사기』中「열전」과 『삼국유사』에 드러난 비극 소설의 기원
1. 비극적 세계관을 지닌 인물의 등장
(1) 숭고와 슬픔 : 관창과 원술
(2) 인물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투지와 좌절 : 온달과 평강공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2.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한국적 비극 서사물
(1) 인본주의를 담은 서사무가의 기원 : 「박제상과 부인 이야기」, 「김현감호」
(2) 애정비극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양자 희생형 서사 : 「조신전」, 「최치원전」
(3) 혈육의 죽음을 노래한 향가 : 「제망매가」
Ⅳ.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학(향가)과 권력의 관계
1. 노래의 새로운 모습 : 향가
2. 향가의 작품세계
(1) 민요 계통의 기원적 노래 -「서동요」
(2) 화랑의 노래 - 「모죽지랑가」
3. 문학과 권력의 관계
(1) 통일 신라의 불국토 사상
① 불교적 신앙심의 수용을 넓히기 위한 노래 -「원왕생가」
② 왕권 강화와 지배 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노래 -「처용가」
Ⅴ. 결론
본문내용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⑤ <박제상과 치술령신모설화>
390년(내물왕 35)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왕자를 한 사람 볼모로 요구하자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보냈으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후 412년(실성왕 11) 고구려가 화친의 뜻으로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매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보냈으나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음 대의 눌지왕(訥祗王)은 두 아우를 잃고 근심하다가 충신 박제상(朴堤上)에게 그들을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계략을 써서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붙잡혀 혹형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통곡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시켰다. 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⑥ <김현감호>
김현은 매년 2월 8일이 되면 15일까지 흥륜사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났다. 그녀는 호랑이가 변신한 처녀였다. 김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처녀와 정을 통하고 처녀 집으로 가보니 그곳은 호랑이 굴이었다. 그 집 주인 노파는 김현을 보더니, 처녀의 오빠들인 삼호(三虎)가 해칠 것을 염려하여 김현을 숨겨 두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호랑이 세 마리가 나타나 사람 냄새를 맡고는 김현을 찾았다. 이 때 하늘에서 세 호랑이가 사람의 생명을 많이 해쳤으므로 한 마리를 죽여 징계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빠 호랑이들이 매우 근심하자 처녀는 자기가 대신 하늘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세 호랑이는 좋아라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 뒤 처녀는 김현에게 말하기를 “나는 비록 그대와 유(類)가 다르지만 이미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제 내가 집안의 재앙을 막기 위하여 대신 죽고자 하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대의 칼에 죽어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다. 내일 내가 시장에 들어가 해를 끼치면, 대왕은 나를 잡으려 할 것이니, 이 때 낭군이 겁내지 말고 나를 쫓아오면 내가 그대에게 잡히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이를 거절하자 처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절을 세우고 불경을 읽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호랑이를 잡는 데 성공한 김현은 그 뒤 벼슬에 올랐고, 호랑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이름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읽어 호랑이의 저승길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⑦ <조신설화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 제4, <조신조(調信條)> >
신라 때의 승려 조신(調信)이 세규사(世逵寺:興敎寺)에 있다가 명주(溟州:강릉)에 있는 절 소유의 장사(莊舍:농장)의 지장(知莊:관리인)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 태수(太守) 김흔(金昕)의 딸(김랑)을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얼마 후 그녀가 딴 사람에게 출가해 버리자 조신은 울면서 김랑을 못내 그리워하며 지내던 중, 하루는 부처를 원망하다가 깜박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김랑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여 결혼은 하였으나, 당신을 사랑하여 이렇게 돌아왔노라"고 하였다.
조신은 기쁨을 가누지 못한 채 그녀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같이 사는 동안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살림은 몹시 가난하여 나물죽조차 넉넉지 못하고 입을 옷도 없었으며, 15세 된 큰 아이는 굶어죽고 말았다.
도리 없이 남은 네 자식을 둘씩 서로 나누고 막 헤어지려는 찰나에 꿈을 깨고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밤이 이슥히 깊어가고 있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은 조신은 그 뒤로 김랑에게 반하였던 마음을 깨끗이 씻고 불도(佛道)에만 힘썼다는 이야기이다.
⑧ <최치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제46권, 열전(列傳,) 제6 <최치원> >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⑤ <박제상과 치술령신모설화>
390년(내물왕 35)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왕자를 한 사람 볼모로 요구하자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보냈으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후 412년(실성왕 11) 고구려가 화친의 뜻으로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매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보냈으나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음 대의 눌지왕(訥祗王)은 두 아우를 잃고 근심하다가 충신 박제상(朴堤上)에게 그들을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계략을 써서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붙잡혀 혹형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통곡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시켰다. 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⑥ <김현감호>
김현은 매년 2월 8일이 되면 15일까지 흥륜사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났다. 그녀는 호랑이가 변신한 처녀였다. 김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처녀와 정을 통하고 처녀 집으로 가보니 그곳은 호랑이 굴이었다. 그 집 주인 노파는 김현을 보더니, 처녀의 오빠들인 삼호(三虎)가 해칠 것을 염려하여 김현을 숨겨 두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호랑이 세 마리가 나타나 사람 냄새를 맡고는 김현을 찾았다. 이 때 하늘에서 세 호랑이가 사람의 생명을 많이 해쳤으므로 한 마리를 죽여 징계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빠 호랑이들이 매우 근심하자 처녀는 자기가 대신 하늘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세 호랑이는 좋아라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 뒤 처녀는 김현에게 말하기를 “나는 비록 그대와 유(類)가 다르지만 이미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제 내가 집안의 재앙을 막기 위하여 대신 죽고자 하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대의 칼에 죽어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다. 내일 내가 시장에 들어가 해를 끼치면, 대왕은 나를 잡으려 할 것이니, 이 때 낭군이 겁내지 말고 나를 쫓아오면 내가 그대에게 잡히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이를 거절하자 처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절을 세우고 불경을 읽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호랑이를 잡는 데 성공한 김현은 그 뒤 벼슬에 올랐고, 호랑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이름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읽어 호랑이의 저승길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⑦ <조신설화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 제4, <조신조(調信條)> >
신라 때의 승려 조신(調信)이 세규사(世逵寺:興敎寺)에 있다가 명주(溟州:강릉)에 있는 절 소유의 장사(莊舍:농장)의 지장(知莊:관리인)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 태수(太守) 김흔(金昕)의 딸(김랑)을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얼마 후 그녀가 딴 사람에게 출가해 버리자 조신은 울면서 김랑을 못내 그리워하며 지내던 중, 하루는 부처를 원망하다가 깜박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김랑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여 결혼은 하였으나, 당신을 사랑하여 이렇게 돌아왔노라"고 하였다.
조신은 기쁨을 가누지 못한 채 그녀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같이 사는 동안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살림은 몹시 가난하여 나물죽조차 넉넉지 못하고 입을 옷도 없었으며, 15세 된 큰 아이는 굶어죽고 말았다.
도리 없이 남은 네 자식을 둘씩 서로 나누고 막 헤어지려는 찰나에 꿈을 깨고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밤이 이슥히 깊어가고 있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은 조신은 그 뒤로 김랑에게 반하였던 마음을 깨끗이 씻고 불도(佛道)에만 힘썼다는 이야기이다.
⑧ <최치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제46권, 열전(列傳,) 제6 <최치원> >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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