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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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관하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2
Ⅱ.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의 역사
1. 일본 우익의 1차 ‘교과서 공격’과 교과서 재판:1955~1981
1) 1950년대 : 우익의 교과서 공격과 교과서 검정제 도입
2) 1960년대 중반 : 호헌파(護憲派)의 반격과 교과서 재판
2. 일본 우익의 2차 ‘교과서 공격’ : 1982~1986-------------------- 3
1) 문부성의 “쓰게 하는 검정”
2) 2차 교과서 공격에 대한 한국의 대응--------------------------- 4
⑴정부의 대응
⑵언론의 대응--------------------------------------------------- 5
⑶대중들의 대응
3. 제3차 교과서파동(2001년)------------------------------------- 6
1)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2)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교과서의 탄생구도------------ 7
⑴자민당내 우익세력
⑵우익교수
⑶우익언론
⑷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현 일본회의)
3) ‘새 역사교과서’의 왜곡된 역사내용 및 한국측 수정요구------- 8
4) 일본역사교과서에 대한 한국 및 주변국가들의 대응----------- 22
⑴한 국
⑵중 국------------------------------------------------------- 24
⑶북 한------------------------------------------------------- 25
⑷대 만------------------------------------------------------- 26
Ⅲ. 1982년과 2001년의 일본교과서 파동의 비교
- 대응의 변화를 중심으로 -------------------------------- 27
1. 상설단체로 전환
2. 재수정요구-------------------------------------------------- 28
3. 불채택운동으로의 전환--------------------------------------- 29
4. 일본신문에 의견광고 싣기 운동
Ⅳ. 결 론------------------------------------------------------ 30

※ 참고문헌----------------------------------------------------- 31

본문내용

켜 잔혹한 행위│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음. │
│ │의 실태를 은폐. │ │
│ │최근 유엔인권위 │ │
│ │에 보고된 Comar-│ │
│ │aswamy의 `전시 │ │
│ │군관련 노예문제 │ │
│ │에 관한 특별보고│ │
│ │서\'및 Mcdougall │ │
│ │의 `전시 조직적 │ │
│ │강간, 성노예, 노│ │
│ │예적 취급의 관행│ │
│ │에 관한 특별보고│ │
│ │서\'에서도 군대위│ │
│ │안부를 반인륜적 │ │
│ │전쟁범죄행위로 │ │
│ │규탄. │ │
│ │일본정부도 93.8 │ │
│ │군대위안부 관련 │ │
│ │`관방장관 담화\' │ │
│ │에서 일본군이 위│ │
│ │안소설치에 직간 │ │
│ │접적으로 관여한 │ │
│ │점과 모집.이송. │ │
│ │관리가 감언, 강 │ │
│ │압등에 의해 총체│ │
│ │적으로 본인의 의│ │
│ │사에 반해 이루어│ │
│ │졌다고 인정 │ │
├────────┴────────┴───────────────────┤
│ (25) 한국전쟁 │
├────────┬────────┬───────────────────┤
│맥아더가 지휘하 │유엔군과 중국.북│ 일본 학계에서는, 주로 한국전쟁을 수 │
│는 미군 군주체의│한군의 전쟁으로 │행한 것은 초기를 제외하면 미군을 중심 │
│유엔군은 반격...│묘사함으로써 한 │으로 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의용 │
│중국군이 북한측 │국군의 실태를 무│군) 북한군이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어 │
│에 참가 │시 │있음. 이러한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
│ │ │오류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 │ │ 요구할 수 없음. │
├────────┼────────┼───────────────────┤
│종래의 국경선인 │38도선을 국경선 │자체 정정 신청중(7.2자) │
│북위 38도선의 부│으로서 기술, 옛 │ │
│근에서 전황은 정│날부터 38도선이 │ │
│체 │경계가 되어 분단│ │
│ │되어 있었던 것처│ │
│ │럼 묘사 │ │
└────────┴────────┴───────────────────┘
4) 일본역사교과서에 대한 한국 및 주변국가들의 대응
⑴ 한 국 일본교과서바로잡기 운동본부,「한 중 일 역사인식과 일본교과서」,“하종문,『2001년도 교과서문제와 한국정부의 대응 - 검정 통과 이전을 중심으로』”, 2002, 역사비평사. - 조선일보, 2000년 7월 9일,“일 교과서‘과거숨기기’”. 2000년 9월 10일,‘일 교과서 가해역사 왜곡, 대폭삭제’.
한겨례, 2000년 7월 30일,‘일 우익, 중학교과서 검정 신청’.2000년 8월 16일,‘북, 일의 역사교과서 왜곡 용납 못해’.
2000년 9월 10일,‘일 검정신청교과서 가해역사 왜곡’.
2000년 9월 14일,“‘역사왜곡 일본교과서’에 우려 전달”.
2000년 9월 15일,‘북, 역사왜곡 중단하고 과거 청산해야’.
2000년 9월 23일,‘일본교과서 왜곡에 적절 조처’
2000년 12월 26일,“한일 외교의‘DJ변수’”.
2001년 1월 5일,‘정부, 일 역사교과서 입장 전달’.
2001년 2월 18일,‘정부, 일 교과서 왜곡 적극대응’.
①초기의 매스컴 보도와 한국정부의 대응
후소샤 교과서는 2000년 4월 예고한 대로 검정을 신청함으로써 본격적인‘교과서 전쟁’의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대해 일본과는 달리 한국 쪽 주요 일간신문은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난 7월 9일, 한 일간지가 교과서 문제를 언급했지만“일 교과서‘과거 숨기기’”라는 제목의 일본국‘위안부’기술의 삭제 축소를 알리고 있으며‘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한국의 일간지가 ‘새역모’를 비롯한 역사교과서의 동향을 본격적으로 싣기 시작한 것은 7월 말부터였다. 그것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본 신문, 특히 『아사히신문』의 보도를 받아서 전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이후『한겨례』가 가장 적극적으로 교과서 문제를 다루게 되지만,‘일 우익, 중학교과서 검정 신청’이라는 제목의 7월 30일자 기서는‘새역모’가 만든 공민교과서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후 8월 15일에 즈음하여 각종 기사들이 게재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매스컴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어갔다.
9월 10일 일본의‘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에서 교과서 기술 내용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일간지에서도 후소샤 교과서 문제가 재연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 이르러 드디어 한국정부도 수수방관할 수만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즉 외교통상부 당국자가“지난달(8월)말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정부에‘과거사를 왜곡 축소하는 역사교과서는 미래지향적 양국관계 발전은 물론 일본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8월 16일 최상룡 주일대사가‘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해 교과서 왜곡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과 연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한계를 지적해야 한다. 하나는 한국정부도 교과서 문제를 주시하고 있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만, 그 형태가 어디까지나 매스컴의 취재에 대한 비공식적인 답변이라는 점이다. 이미 보름 전에 일본대사관을 통해‘공식적인 우려’를 전달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않은 것이다. 외교상의 예의나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지하듯이 과거사 문제의 이슈화가 신속한 언명과 조치에서 가능했다는 이전의 경험을 살리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태도는 외교통상부 당국자의 안이한 상황 판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일본정부 내에서도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에 관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일본이 역사교과서를 객관적으로 검정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1998년 10월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1982년 근린국제조항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 하더라도 정부의 자세에서 적어도 적극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북한 쪽에서 재차 13일과 14일 이틀에 걸쳐 일본의“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성명이 나왔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②김대중 대통령의 방일과 이후 한국정부의 움직임
이렇게 교과서 문제가 차츰 대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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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8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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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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