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3·1운동 배경
2. 3·1운동 전개과정
1) 2・8 독립선언
2) 3·1운동 준비
3) 파고다 공원의 함성
4) 운동의 경과
5) 일제의 탄압
6) 성격
7) 결과, 피해
3. 3·1운동 한계와 역사적 의의
참고문헌
2. 3·1운동 전개과정
1) 2・8 독립선언
2) 3·1운동 준비
3) 파고다 공원의 함성
4) 운동의 경과
5) 일제의 탄압
6) 성격
7) 결과, 피해
3. 3·1운동 한계와 역사적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까지의 집회회수가 1천 542회, 참가인원 202만 3천 98명이다. 사망자 7천 509명, 부상자 1만 5천 961명, 체포된 자 4만 6천 948명도 숫자상의 큰 차이가 있다. 일본 경미한 문제로 하라 는 취지에 따라, 실제보다는 축소시켜 발표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강재언, 『일제하 40년사』, 풀빛, 1984년, 61pg
3. 3·1운동 한계와 역사적 의의
31운동 평가에 대한 남한학계의 통설적인 입장은 31운동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만주 및 간도지방에서 해외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임시정부는 그 후의 전체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31운동은 전체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거대한 분수령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역사발전이라는 면에서도 31운동의 지도부인 민족대표는 공화정치를 표방해 이것이 임시정부로 이어졌으며, 또한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 공화정체가 이어졌으므로 우리나라 역사발전에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보고 있다.
비록 신진학자들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그들의 시각에 입각해서 전체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아직까지 구체적인 위상 설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통설의 입장을 기초로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크게 사상적 측면과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측면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우선, 31운동이 지닌 사상적 특성은 완전독립주의민중주의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전민족적 대동단결주의, 세계평화주의로 대별될 수 있다. 이것은 곧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사상의 기초가 된다.
첫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완전 독립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19세기 형성기부터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간섭에 반대하여 자기 조국의 완전독립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이미 구한말에 한국 완전독립론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보급되고 보편적으로 주장된 확고한 사상이었다. 그것이 일제하에서 ‘절대독립’이라는 더욱 강력한 새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둘째로, 31운동의 사상은 민중주의 사상이다. 졸래 주로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민중이 31운동에서는 독립운동의 확고한 주체가 되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국가의 장래를 소수의 양반층이나 상류층 내지 지도층에만 맡겨서는 안되며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제의 장벽을 타개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셋째로, 31운동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을 포함한다. 31운동은 쟁취할 완전독립국가의 정치체제를 민주적 공화정으로 할 것을 결의하여 선포하였다. 따라서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민주주의적 공화정체로 세워지게 된다. 공화정체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군주제에 종언을 고하고 공화제의 새시대를 연 획기적인 것이다.
넷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전민족적 대동단결주의에 있었다. 31운동에서 한민족은 계급과 지방과 당파를 초월해서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요구하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이러한 대동단결주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강대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부수고 독립을 스스로 보장해 내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섯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세계평화주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31운동은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와 모든 종류의 강권주의를 강력히 반대하고 부정하여 그 종언을 선언하고 전인류가 인도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새 시대를 열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는 31운동으로 인해 한민족 독립운동은 세 가지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첫째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임시정부는 31독립선언과 동시에 <조선독립신문> 제2호(1919년 3월 3일자)를 통해서 임시정부의 조직을 예고하였으며, 국민대회의절차를 거쳐 민주공화제를 수립함으로써 일제 축출과 군주제 폐지를 통해 완전한 민주공화정치 체제를 일반화시켰다.
둘째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 때까지 보여 주었던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이고 치열한 무장투쟁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31운동 이전 시기는 독립군 무장투쟁의 준비기였다고 할 수 있다(신흥무관학교동림무관학교밀산무관학교 등은 바로 그 초기적 상황임). 그러던 것이 31운동을 거치고 1920년대 말에 이르게 되면 독립군 부대는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북로군정서국민회군의군부 등 30여 개 단체에 달할 정도로 수적으로도 엄청난 증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자주 전개하였다. 그것은 일본군측 기록에 보더라도 1920년 1우러부터 3월까지 24회에 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부터 6월초까지만 계산해도 무려 32회나 될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에대해 추격대를 보냈으나 독립군에 의해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참패함으로써 독립군의 승리와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의 간도 침략작전은 와해되었다. 이는 한국독립군이 수행항 무장투쟁의 결과였다.
셋째로는 국내 민족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을 들 수 있다. 일제는 31운동에 큰 타격을 받고 신임총독 사이토를 임명하면서 문화정치를 실시할 것을 표방하였다. 이 문화정치의 본질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회유하고 분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기만적 식민정책이었다. 정책실현의 일환으로 일제는 민족어(한국어), 고유한 민족문화민족역사관습 등을 말살하고 소멸시키는 정책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국내민족운동문화운동실력양성운동이 고양된 것은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으로부터 민족의 소멸을 방지하고 한민족 스스로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오기성,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과제」,『북한 2000년 3월호(통권 제339호)』, 북한연구소, 2000. 3, pp. 36 ~ 45 (10pages)
참고문헌
강재언, 『일제하 40년사』
야마다 겐따로 저, 『한국 근대사』
삼민사 편집부『일본인의 한국사 인식』
이병헌 편, 『3·1운동 비사』
3. 3·1운동 한계와 역사적 의의
31운동 평가에 대한 남한학계의 통설적인 입장은 31운동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만주 및 간도지방에서 해외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임시정부는 그 후의 전체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31운동은 전체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거대한 분수령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역사발전이라는 면에서도 31운동의 지도부인 민족대표는 공화정치를 표방해 이것이 임시정부로 이어졌으며, 또한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 공화정체가 이어졌으므로 우리나라 역사발전에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보고 있다.
비록 신진학자들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그들의 시각에 입각해서 전체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아직까지 구체적인 위상 설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통설의 입장을 기초로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크게 사상적 측면과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측면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우선, 31운동이 지닌 사상적 특성은 완전독립주의민중주의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전민족적 대동단결주의, 세계평화주의로 대별될 수 있다. 이것은 곧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사상의 기초가 된다.
첫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완전 독립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19세기 형성기부터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간섭에 반대하여 자기 조국의 완전독립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이미 구한말에 한국 완전독립론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보급되고 보편적으로 주장된 확고한 사상이었다. 그것이 일제하에서 ‘절대독립’이라는 더욱 강력한 새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둘째로, 31운동의 사상은 민중주의 사상이다. 졸래 주로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민중이 31운동에서는 독립운동의 확고한 주체가 되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국가의 장래를 소수의 양반층이나 상류층 내지 지도층에만 맡겨서는 안되며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제의 장벽을 타개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충만되어 있다.
셋째로, 31운동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을 포함한다. 31운동은 쟁취할 완전독립국가의 정치체제를 민주적 공화정으로 할 것을 결의하여 선포하였다. 따라서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민주주의적 공화정체로 세워지게 된다. 공화정체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군주제에 종언을 고하고 공화제의 새시대를 연 획기적인 것이다.
넷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전민족적 대동단결주의에 있었다. 31운동에서 한민족은 계급과 지방과 당파를 초월해서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요구하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이러한 대동단결주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강대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부수고 독립을 스스로 보장해 내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섯째로, 31운동의 사상은 세계평화주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31운동은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와 모든 종류의 강권주의를 강력히 반대하고 부정하여 그 종언을 선언하고 전인류가 인도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새 시대를 열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는 31운동으로 인해 한민족 독립운동은 세 가지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첫째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임시정부는 31독립선언과 동시에 <조선독립신문> 제2호(1919년 3월 3일자)를 통해서 임시정부의 조직을 예고하였으며, 국민대회의절차를 거쳐 민주공화제를 수립함으로써 일제 축출과 군주제 폐지를 통해 완전한 민주공화정치 체제를 일반화시켰다.
둘째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 때까지 보여 주었던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이고 치열한 무장투쟁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31운동 이전 시기는 독립군 무장투쟁의 준비기였다고 할 수 있다(신흥무관학교동림무관학교밀산무관학교 등은 바로 그 초기적 상황임). 그러던 것이 31운동을 거치고 1920년대 말에 이르게 되면 독립군 부대는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북로군정서국민회군의군부 등 30여 개 단체에 달할 정도로 수적으로도 엄청난 증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자주 전개하였다. 그것은 일본군측 기록에 보더라도 1920년 1우러부터 3월까지 24회에 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부터 6월초까지만 계산해도 무려 32회나 될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에대해 추격대를 보냈으나 독립군에 의해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참패함으로써 독립군의 승리와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의 간도 침략작전은 와해되었다. 이는 한국독립군이 수행항 무장투쟁의 결과였다.
셋째로는 국내 민족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을 들 수 있다. 일제는 31운동에 큰 타격을 받고 신임총독 사이토를 임명하면서 문화정치를 실시할 것을 표방하였다. 이 문화정치의 본질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회유하고 분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기만적 식민정책이었다. 정책실현의 일환으로 일제는 민족어(한국어), 고유한 민족문화민족역사관습 등을 말살하고 소멸시키는 정책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국내민족운동문화운동실력양성운동이 고양된 것은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으로부터 민족의 소멸을 방지하고 한민족 스스로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오기성,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과제」,『북한 2000년 3월호(통권 제339호)』, 북한연구소, 2000. 3, pp. 36 ~ 45 (10pages)
참고문헌
강재언, 『일제하 40년사』
야마다 겐따로 저, 『한국 근대사』
삼민사 편집부『일본인의 한국사 인식』
이병헌 편, 『3·1운동 비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