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광주시기 견훤의 정치
1. 초기 견훤의 정치
2. 광주지역의 한계와 천도이유
Ⅲ. 전주시기 견훤의 정치
1. 국가체제의 정비
2. 사상적 변화
Ⅳ. 견훤정권의 몰락
1. 지배층의 갈등
2. 정책의 실패
Ⅱ. 광주시기 견훤의 정치
1. 초기 견훤의 정치
2. 광주지역의 한계와 천도이유
Ⅲ. 전주시기 견훤의 정치
1. 국가체제의 정비
2. 사상적 변화
Ⅳ. 견훤정권의 몰락
1. 지배층의 갈등
2. 정책의 실패
본문내용
후백제를 진표의 미륵신앙을 주된 사상적 기반으로 뿐만 아니라 불만농민층의 지지와 지방세력과의 결합에서 정치적인 측면으로도 이용하지 않았을까한다. 김수태, 〈甄萱政權과 佛敎〉《後百濟와 甄》 p58
금산사를 중심으로 진표의 미륵신앙은 전주천도 이후인 910년대 후반까지 후백제의 사상적인 기반이었다.김수태,<全州遷都期 甄萱 政權의 變化>, p280
(2)전주 시기의 불교
견훤은 전주로 천도를 하면서 기존의 사상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특히 920년대 들어와 견훤의 사상적 움직임이 훨씬 다양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익산의 미륵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은 기존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선종에 대한 관심에서 나아가 화엄종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크게 1)彌勒信仰, 2)禪宗과 華嚴宗으로 나누어 살피어 보겠다.
①彌勒信仰
전주 천도 이후 왕권강화와 함께 견훤의 불교정책 또한 서서히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920년대 초반으로 생각된다. <葛陽寺 惠居國師 碑文>을 통해서 견훤의 불교정책이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후백제 견훤 정권의 불교 정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922년 選佛場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계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한 측면도 있겠지만, 국가권력이 불교계에 개입하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혜거국사 비문>에 의하면 같은 시기 922년 견훤에 의해 익산익산의 미륵사의 개탑과 관련하여 익산 지역이 견훤은 전주 천도 이후에 연결된 것으로 보이고(김수태, 全州遷都期 堅萱 政權의 變化) 또한 그의 연설을 보면 익산을 백제가 개국한 지역으로 크게 강조하고 있다.(《三國史記》50 견훤전또한 이를 견훤의 잘못된 이해라고도 하였다.(이병도,1977.《國譯 三國史記》) 이를 천도 문제와 이해되기도 하였다.(신호철,〈甄萱關係 諸異說의 檢討〉《後百濟甄萱政權硏究》)
彌勒寺의 開塔 미륵사의 개탑의 의미에 대하여 기존 연구는 견훤이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의 미륵신앙을 부활시켰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금산사와 미륵사이 가지는 대립적인 측면에 주목하였다.(허홍식,1986.〈葛陽寺 慧居國師碑〉《고려불교사연구》, 조인성,1996.〈彌勒信仰과 新羅社會〉《震檀學報》) 또한 이러한 측면은 궁예의 미륵신앙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김수태,1997.〈新羅末高麗初期 淸州金氏와 法相宗〉《중원문화논?)
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견훤의 익산 미륵사의 미륵신앙의 강조는 그의 사상적, 정치적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정치적 목적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륵사 개탑은 920년대 견훤의 미륵신앙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 될 수 있다. 이 시기의 진표계의 법상종의 중심지는 금산사가 아니라 속리산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옛 백제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에 의해 확산된 진표의 미륵신앙과 익산 미륵사의 미륵신앙은 일정한 차이가 존재했을 것이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왕권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는 점이다. 반면 익산은 미륵신앙의 관계는 백제 무왕 백제의 무왕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왕권을 재확립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노중국,1988<武王 및 義慈王代의 政治改革>《百濟政治史硏究》)김수태,1991. <百濟義慈王 政治變動>《韓國古代史硏究》
의 미륵신앙과 관련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견훤의 미륵사의 강조는 918년 이후 견훤은 지방세력과 연합에서 왕권 강화를 추구해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표의 미륵신앙처럼 그의 초기 세력기반이었던 불만 농민층의 이익을 더 이상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미륵사 개탑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군주로서의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견훤의 미륵신앙은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변화를 하였을 것이다.
②선종-桐裏山門-과 華嚴宗
920년대 초반 견훤의 불교정책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견훤과 동진대사 경보와의 관계를 통해서 또한 알 수 있다. 경보는 桐裏山門에 속한 禪宗僧侶이다. 921년 견훤이 제자의 예를 갖추면서 포섭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후에 견훤이 선종승려인 경보를 국사로 삼았다. 이는 진표의 미륵신앙을 대신하여 새롭게 선종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 동리산문이 아닌 다른 산문의 선문사상은 비교적 화엄사상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법상종과 맞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법상종은 선종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리산문은 법상종 사상에 대해서 오히려 포용적이었다. 진표계 법상종과 혜철등 동리산문의 상과는 서로 비슷한 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두진,1988. 〈羅襪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東方學志》)
경보를 국사로 삼은 것은 옛 백제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던 진표계 법상종을 선종을 통해서 흡수하려는 것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견훤이 920년대 법상종과 달리 화엄종에 새로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견훤의 화엄사상과 과년해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해인사이다. 견훤의 福田인 南岳 觀惠와 왕건의 福田이었던 北岳 希郞이 海印寺에서 대립하였다. 《均如傳》
관혜와 견훤이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한 것이 920년대로 생각된다. 920년대는 견훤이 후삼국의 접전지역이었던 합천 지역을 진출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920년 견훤이 합천을 점령하면서 견훤 역시 관혜와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김수태, 앞의 글, p287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후백제 지역인 開泰寺에 華嚴寺刹을 만든 것 역시 이러한 후백제 지역의 화엄종 움직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Ⅳ. 견훤정권의 몰락
甄萱政權은 後三國時代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방대한 지배영역을 차지하면서 약 반세기 동안 후백제를 건국 발전시켜 갔음에도 불구하고 말기 1,2년 만에 갑자기 몰락하고 말았다. 후백제의 멸망에 대해서는 견훤이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만을 편애함으로써 다른 아들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 견훤 자신도 그들의 손에
금산사를 중심으로 진표의 미륵신앙은 전주천도 이후인 910년대 후반까지 후백제의 사상적인 기반이었다.김수태,<全州遷都期 甄萱 政權의 變化>, p280
(2)전주 시기의 불교
견훤은 전주로 천도를 하면서 기존의 사상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특히 920년대 들어와 견훤의 사상적 움직임이 훨씬 다양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익산의 미륵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은 기존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선종에 대한 관심에서 나아가 화엄종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크게 1)彌勒信仰, 2)禪宗과 華嚴宗으로 나누어 살피어 보겠다.
①彌勒信仰
전주 천도 이후 왕권강화와 함께 견훤의 불교정책 또한 서서히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920년대 초반으로 생각된다. <葛陽寺 惠居國師 碑文>을 통해서 견훤의 불교정책이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후백제 견훤 정권의 불교 정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922년 選佛場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계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한 측면도 있겠지만, 국가권력이 불교계에 개입하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혜거국사 비문>에 의하면 같은 시기 922년 견훤에 의해 익산익산의 미륵사의 개탑과 관련하여 익산 지역이 견훤은 전주 천도 이후에 연결된 것으로 보이고(김수태, 全州遷都期 堅萱 政權의 變化) 또한 그의 연설을 보면 익산을 백제가 개국한 지역으로 크게 강조하고 있다.(《三國史記》50 견훤전또한 이를 견훤의 잘못된 이해라고도 하였다.(이병도,1977.《國譯 三國史記》) 이를 천도 문제와 이해되기도 하였다.(신호철,〈甄萱關係 諸異說의 檢討〉《後百濟甄萱政權硏究》)
彌勒寺의 開塔 미륵사의 개탑의 의미에 대하여 기존 연구는 견훤이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의 미륵신앙을 부활시켰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금산사와 미륵사이 가지는 대립적인 측면에 주목하였다.(허홍식,1986.〈葛陽寺 慧居國師碑〉《고려불교사연구》, 조인성,1996.〈彌勒信仰과 新羅社會〉《震檀學報》) 또한 이러한 측면은 궁예의 미륵신앙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김수태,1997.〈新羅末高麗初期 淸州金氏와 法相宗〉《중원문화논?)
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견훤의 익산 미륵사의 미륵신앙의 강조는 그의 사상적, 정치적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정치적 목적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륵사 개탑은 920년대 견훤의 미륵신앙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 될 수 있다. 이 시기의 진표계의 법상종의 중심지는 금산사가 아니라 속리산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옛 백제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에 의해 확산된 진표의 미륵신앙과 익산 미륵사의 미륵신앙은 일정한 차이가 존재했을 것이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왕권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는 점이다. 반면 익산은 미륵신앙의 관계는 백제 무왕 백제의 무왕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왕권을 재확립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노중국,1988<武王 및 義慈王代의 政治改革>《百濟政治史硏究》)김수태,1991. <百濟義慈王 政治變動>《韓國古代史硏究》
의 미륵신앙과 관련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견훤의 미륵사의 강조는 918년 이후 견훤은 지방세력과 연합에서 왕권 강화를 추구해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표의 미륵신앙처럼 그의 초기 세력기반이었던 불만 농민층의 이익을 더 이상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미륵사 개탑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군주로서의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견훤의 미륵신앙은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변화를 하였을 것이다.
②선종-桐裏山門-과 華嚴宗
920년대 초반 견훤의 불교정책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견훤과 동진대사 경보와의 관계를 통해서 또한 알 수 있다. 경보는 桐裏山門에 속한 禪宗僧侶이다. 921년 견훤이 제자의 예를 갖추면서 포섭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후에 견훤이 선종승려인 경보를 국사로 삼았다. 이는 진표의 미륵신앙을 대신하여 새롭게 선종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 동리산문이 아닌 다른 산문의 선문사상은 비교적 화엄사상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법상종과 맞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법상종은 선종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리산문은 법상종 사상에 대해서 오히려 포용적이었다. 진표계 법상종과 혜철등 동리산문의 상과는 서로 비슷한 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두진,1988. 〈羅襪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東方學志》)
경보를 국사로 삼은 것은 옛 백제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던 진표계 법상종을 선종을 통해서 흡수하려는 것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견훤이 920년대 법상종과 달리 화엄종에 새로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견훤의 화엄사상과 과년해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해인사이다. 견훤의 福田인 南岳 觀惠와 왕건의 福田이었던 北岳 希郞이 海印寺에서 대립하였다. 《均如傳》
관혜와 견훤이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한 것이 920년대로 생각된다. 920년대는 견훤이 후삼국의 접전지역이었던 합천 지역을 진출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920년 견훤이 합천을 점령하면서 견훤 역시 관혜와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김수태, 앞의 글, p287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후백제 지역인 開泰寺에 華嚴寺刹을 만든 것 역시 이러한 후백제 지역의 화엄종 움직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Ⅳ. 견훤정권의 몰락
甄萱政權은 後三國時代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방대한 지배영역을 차지하면서 약 반세기 동안 후백제를 건국 발전시켜 갔음에도 불구하고 말기 1,2년 만에 갑자기 몰락하고 말았다. 후백제의 멸망에 대해서는 견훤이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만을 편애함으로써 다른 아들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 견훤 자신도 그들의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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