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조선시대 주거 양식의 형성 배경
⑴ 자연 환경적 요소
① 산악 지형
② 대륙 동안의 대륙성 기후
③ 남북의 기온 차
⑵ 사회 환경적 요소
① 유교 중심의 신분, 계급 사회
② 풍수지리사상
2. 조선시대 주거 양식의 구분
⑴ 상류층 주거
① 최상류층 양반을 중심으로 한 사적 공간의 구분
② 일반 양반․사대부의 가옥 특징
⑵ 평민 주거
① 산업 주거적 특징
② 부농층의 상류층 주거 모방
3. 조선시대 정원의 역사~ 담양 소쇄원
⑴ 자연 환경적 요소
① 산악 지형
② 대륙 동안의 대륙성 기후
③ 남북의 기온 차
⑵ 사회 환경적 요소
① 유교 중심의 신분, 계급 사회
② 풍수지리사상
2. 조선시대 주거 양식의 구분
⑴ 상류층 주거
① 최상류층 양반을 중심으로 한 사적 공간의 구분
② 일반 양반․사대부의 가옥 특징
⑵ 평민 주거
① 산업 주거적 특징
② 부농층의 상류층 주거 모방
3. 조선시대 정원의 역사~ 담양 소쇄원
본문내용
조상의 영이, 귀신이 타므로 다시 복구한다는 것은 자손으로서 아주 못할 짓”이라고 증조부가 생각하고 비상시에 실천한 것으로 해석한다. 신주를 산 사람만큼 소중하게 모셨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문의 정통성이 사당의 조상들로부터 후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만큼 반가에서 사당과 신주는 중요했다.
산 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영역과 사당 사이에는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담장을 쳐두는 게 일반적이다. 생자의 공간에 비하여 사당은 사방으로 둘러쳐진 담장 속에 있다. 따라서 사당에 들어가려면 다시 사당의 대문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불필요한 개방이나 노출을 억제함은 물론 조상을 더 안전하게 모시는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당의 분위기는 정적이고 엄숙하였다. 반면에 생자의 공간영역은 활기가 넘치고 이따금씩 변화상을 드러낸다.
남향집에서는 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는 동쪽에, 여성의 안채는 서쪽에 둔다. 그리고 사당은 사랑채의 뒤, 곧 동북쪽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동쪽에 두는 것은 동쪽이 밝음부활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대문이 동쪽에 있어야 좋다는 생각도 이에서 나왔다.
②. 일반 양반 사대부의 가옥 특징
그러나 조선시대의 경우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관직에 몸담지 않으면 일반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중앙관료제의 조선시대에서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봉토, 여러 가지 수입들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사회로 갈수록 생업에 종사하는 양반들이 늘어가게 되었고 이들은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집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집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더라도 양반 사대부의 전통과 예법은 어느 정도 지켜져 같은 건물 내에서라도 내외의 구분을 둔다든지, 방 한 켠에 조상들을 위한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둔다든지 하는 식의 법도는 될 수 있는 한 존중하였다.
⑵. 평민 주거
백성들의 주택에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르는 의례적 생활보다 생산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실용성이 우선되었다. 또한 백성의 주택은 지역의 자연환경에도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기후나 토지, 취락구조 등과 같은 주변여건에 대응하여 독특한 주택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의 주택을 지역에 따라 유형화하면 집중형 분산형 절충형 주거로 나눌 수 있다.
집중형 주거란 모든 주거 공간을 하나의 건물에 모아서 만든 집으로, 혹독한 추위에 잘 견디도록 열효율을 높이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폐쇄적인 형태로 지은 집이다. 북부 지방의 주택 양식으로서 전(田)자형이 일반적이다. 부속 건물이 없이 살림채 하나에 거의 모든 주거 공간이 들어가고, 살림채의 규모가 크며 내부에서 모든 공간이 연결된다.
분산형 주거는 남부 지방의 주택 양식이다. 남부 지방은 여름이 길고 무더우며 농업이 발달했으므로 이러한 특징에 알맞게 지어졌다. 부엌안방마루방건넌방이 모두 한 줄로 배열되어 바람이 잘 통하게 하였으며, 창고 외양간 등 부속 건물도 모두 분리되어 있다. 또 각 방 앞에는 쪽마루를 놓아 가장 중요한 작업 공간인 마당으로 쉽게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절충형 주거는 중부 지방의 주거 양식으로서 북부와 남부 지역의 특징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절충형 주거 중 서울 지역은 주택 대지에 제약을 많이 받았으므로 대지 주변을 둘러 방을 배치하게 되어 ㄱㄷㅁ 자형의 건물이 되게 하고 그 가운데 마당이 생기게 하였다.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보온과 통풍을 적절히 고려한 것이다.
①. 산업 주거적 특징
조선 후기의 주거계층은 신분제도에 의한 구별보다는 주로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거계층을 분류하는 관점은 주로 경제력에 근거하고 있다.
농가는 크게 안채(방과 광, 마루 등)와 바깥채(곡물 저장, 가축 사육 등), 마당(작업공간이자 행사 장소)으로 구성된다. 가옥의 형태는 기후 지형 등 자연 조건, 거주자의 경제능력, 사회적 규제 등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대체로 ㅡ자형이나 ㄱ자형이 기본이며, 집이 커짐에 따라 ㄷㅁ자형이 된다. ㅡ자형은 부엌 방 마루가 순서대로 배치되고, ㄱ자형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 안방 부엌 광 등이, 다른 쪽에 건넌방이 자리한다. 잿간 변소에는 용변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다. 변을 본 뒤, 재를 한 삽 떠서 변과 섞어 한쪽에 쌓아 두면 훌륭한 비료가 된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 도입된 획기적인 비료 생산 기술의 비법이다. 본채 주변에는 자급자족용 채소들을 가꾸는 텃밭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감상용으로 기르는 꽃을 보듬은 꽃밭을 둘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감상용 공간까지 있는 가옥은 대체로 중류 이상의 경제력을 지닌 농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 년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종하고 모를 내고, 추수하여 타작하는 등 쉴 사이 없이 바쁜 농부들의 집에는 마루가 없다. 대신 맨바닥의 토방 또는 봉당이 있는데 이는 신발 신은 채로 드나들게 하녀는 배려에서였다. 농부들은 이 봉당에서 갈무리하거나 비를 피해서 하는 작업 등을 하였다. 대개 죽담 위에 설치된 봉당은 마루가 생략되었을 뿐이지 차지하는 위치나 공간 기능은 마루나 대청의 구실을 그대로 하였다.
봉당집은 토담으로 짓는 집에서 흔히 본다. 이런 집은 대부분 소박하며 전문가에 의해 지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이웃 주민들이 협동하여 짓는다. 이러한 소박한 모습은 후대에 조성한 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하회마을에 있는 봉당집처럼 방 한 칸에 투덕투덕한 벽, 그리고 지붕 아래의 공간이 다 열려 있는데 맨바닥이 전부이다. 특히 마당에서 훨씬 높게 맨바닥의 토방이 조성되어 있어 그 용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풍속도 등을 통해 보이듯 밥을 먹을 때도 봉당에서 신발 신은 채 먹었다. 그리고 방은 잠을 자는 장소로 요긴하였다. 지붕은 대부분 초가이다. 초가삼간이라 하는 것은 안채를 지칭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집에서는 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를 삭히거나 농기구들을 말끔히 씻어 가지런히 두었다가 다시 쓸 수 있게 보관하는 헛간이 있다. 좌우와 앞쪽은 터놓고 뒤쪽에만 벽체를 쳐 잿간이라 하였다. 잿간의 한편에 부
산 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영역과 사당 사이에는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담장을 쳐두는 게 일반적이다. 생자의 공간에 비하여 사당은 사방으로 둘러쳐진 담장 속에 있다. 따라서 사당에 들어가려면 다시 사당의 대문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불필요한 개방이나 노출을 억제함은 물론 조상을 더 안전하게 모시는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당의 분위기는 정적이고 엄숙하였다. 반면에 생자의 공간영역은 활기가 넘치고 이따금씩 변화상을 드러낸다.
남향집에서는 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는 동쪽에, 여성의 안채는 서쪽에 둔다. 그리고 사당은 사랑채의 뒤, 곧 동북쪽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동쪽에 두는 것은 동쪽이 밝음부활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대문이 동쪽에 있어야 좋다는 생각도 이에서 나왔다.
②. 일반 양반 사대부의 가옥 특징
그러나 조선시대의 경우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관직에 몸담지 않으면 일반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중앙관료제의 조선시대에서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봉토, 여러 가지 수입들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사회로 갈수록 생업에 종사하는 양반들이 늘어가게 되었고 이들은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집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집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더라도 양반 사대부의 전통과 예법은 어느 정도 지켜져 같은 건물 내에서라도 내외의 구분을 둔다든지, 방 한 켠에 조상들을 위한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둔다든지 하는 식의 법도는 될 수 있는 한 존중하였다.
⑵. 평민 주거
백성들의 주택에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르는 의례적 생활보다 생산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실용성이 우선되었다. 또한 백성의 주택은 지역의 자연환경에도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기후나 토지, 취락구조 등과 같은 주변여건에 대응하여 독특한 주택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의 주택을 지역에 따라 유형화하면 집중형 분산형 절충형 주거로 나눌 수 있다.
집중형 주거란 모든 주거 공간을 하나의 건물에 모아서 만든 집으로, 혹독한 추위에 잘 견디도록 열효율을 높이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폐쇄적인 형태로 지은 집이다. 북부 지방의 주택 양식으로서 전(田)자형이 일반적이다. 부속 건물이 없이 살림채 하나에 거의 모든 주거 공간이 들어가고, 살림채의 규모가 크며 내부에서 모든 공간이 연결된다.
분산형 주거는 남부 지방의 주택 양식이다. 남부 지방은 여름이 길고 무더우며 농업이 발달했으므로 이러한 특징에 알맞게 지어졌다. 부엌안방마루방건넌방이 모두 한 줄로 배열되어 바람이 잘 통하게 하였으며, 창고 외양간 등 부속 건물도 모두 분리되어 있다. 또 각 방 앞에는 쪽마루를 놓아 가장 중요한 작업 공간인 마당으로 쉽게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절충형 주거는 중부 지방의 주거 양식으로서 북부와 남부 지역의 특징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절충형 주거 중 서울 지역은 주택 대지에 제약을 많이 받았으므로 대지 주변을 둘러 방을 배치하게 되어 ㄱㄷㅁ 자형의 건물이 되게 하고 그 가운데 마당이 생기게 하였다.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보온과 통풍을 적절히 고려한 것이다.
①. 산업 주거적 특징
조선 후기의 주거계층은 신분제도에 의한 구별보다는 주로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거계층을 분류하는 관점은 주로 경제력에 근거하고 있다.
농가는 크게 안채(방과 광, 마루 등)와 바깥채(곡물 저장, 가축 사육 등), 마당(작업공간이자 행사 장소)으로 구성된다. 가옥의 형태는 기후 지형 등 자연 조건, 거주자의 경제능력, 사회적 규제 등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대체로 ㅡ자형이나 ㄱ자형이 기본이며, 집이 커짐에 따라 ㄷㅁ자형이 된다. ㅡ자형은 부엌 방 마루가 순서대로 배치되고, ㄱ자형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 안방 부엌 광 등이, 다른 쪽에 건넌방이 자리한다. 잿간 변소에는 용변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다. 변을 본 뒤, 재를 한 삽 떠서 변과 섞어 한쪽에 쌓아 두면 훌륭한 비료가 된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 도입된 획기적인 비료 생산 기술의 비법이다. 본채 주변에는 자급자족용 채소들을 가꾸는 텃밭이 있었는데, 사시사철 감상용으로 기르는 꽃을 보듬은 꽃밭을 둘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감상용 공간까지 있는 가옥은 대체로 중류 이상의 경제력을 지닌 농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 년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종하고 모를 내고, 추수하여 타작하는 등 쉴 사이 없이 바쁜 농부들의 집에는 마루가 없다. 대신 맨바닥의 토방 또는 봉당이 있는데 이는 신발 신은 채로 드나들게 하녀는 배려에서였다. 농부들은 이 봉당에서 갈무리하거나 비를 피해서 하는 작업 등을 하였다. 대개 죽담 위에 설치된 봉당은 마루가 생략되었을 뿐이지 차지하는 위치나 공간 기능은 마루나 대청의 구실을 그대로 하였다.
봉당집은 토담으로 짓는 집에서 흔히 본다. 이런 집은 대부분 소박하며 전문가에 의해 지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이웃 주민들이 협동하여 짓는다. 이러한 소박한 모습은 후대에 조성한 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하회마을에 있는 봉당집처럼 방 한 칸에 투덕투덕한 벽, 그리고 지붕 아래의 공간이 다 열려 있는데 맨바닥이 전부이다. 특히 마당에서 훨씬 높게 맨바닥의 토방이 조성되어 있어 그 용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풍속도 등을 통해 보이듯 밥을 먹을 때도 봉당에서 신발 신은 채 먹었다. 그리고 방은 잠을 자는 장소로 요긴하였다. 지붕은 대부분 초가이다. 초가삼간이라 하는 것은 안채를 지칭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집에서는 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를 삭히거나 농기구들을 말끔히 씻어 가지런히 두었다가 다시 쓸 수 있게 보관하는 헛간이 있다. 좌우와 앞쪽은 터놓고 뒤쪽에만 벽체를 쳐 잿간이라 하였다. 잿간의 한편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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