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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于嗣)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郡)을 평정하고는(越海定二郡) 여러 한국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하여 내려 주고 …
즉 당시의 낙랑 대방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고 한다면 결국 지금의 압록강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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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의 점령으로 이군 고지에서 생산되는 철이 병력 확대와 맞물려 전투력이 고양되는데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국원왕대에 이르면 병력이 대량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성의 축조도 이루어 졌다. 축성 사업은 단순히 지방지배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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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 4900호로 줄어들었다. 이는 낙랑군, 대방군이 313년, 314년까지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단순 계산으로 해도 낙랑군의 인구는 설치 당시의 100의 5로 줄어들어 그 영역 또한 매우 축소된 가운데, 극히 일부지역에서 소수의 한족(漢族)과 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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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군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에 나섰고, 이 싸움에서 궁존이 전사했지만, 두 군은 드디어 한을 멸망시켰다.
=> 245~246년의 어느 시점 위(魏)는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군에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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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6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에게 황색 깃발을 하사하고 인수를 주었다. 8년에는 태수 왕기가 대방군으로 부임했다.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南王) 비미궁호(卑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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