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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사실 인목대비 폐모론은 허균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사건이다. 폐모론은 광해군 5년에 있었던 김제남 사건 심문과정 중 유교칠신의 일원이었던 박동량이 인목대비의 선조에 대한 저주사를 털어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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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때 49세로 좌참찬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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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론에 의한 당쟁
대북과 남인은 폐모론에 반대, 서인은 폐모에 반대. 대북 정권은 죽이려함
(1) 대북-골북, 육북, 중북
①골북: 이산해 중심
②육북: 홍여순, 이이첨 중심
③중북: 유몽인 중심
⇒골북과 육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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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다시 소명국은 기준격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대신들은 광해에게 곽영의 상소에 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작년의 기준격의 비밀 상소를 봐야겠다고 광해에게 청을 했고, 광해는 드디어 그것을 들어줘서 상소들을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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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아들 셋도 화(禍)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손자 천석(天錫)과 군석(君錫)만이 화(禍)를 모면하였으니 부인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천석과 군석은 숨어살았다.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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