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주요내용
1. 주변부에서의 혁명
2. 해방, 점령 그리고 새 질서의 등장
3. 인민개조
4. 연합정치와 통일전선
5. 경제의 계획화
6. 문화의 건설
7. 감시체제
8. 인민의 국가
Ⅱ. 평가 및 의견
1. 관심 포인트
2. 의문사항
3. 성과와 한계
4. 문제제기
1. 주변부에서의 혁명
2. 해방, 점령 그리고 새 질서의 등장
3. 인민개조
4. 연합정치와 통일전선
5. 경제의 계획화
6. 문화의 건설
7. 감시체제
8. 인민의 국가
Ⅱ. 평가 및 의견
1. 관심 포인트
2. 의문사항
3. 성과와 한계
4. 문제제기
본문내용
참여하여 연금되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김일성의 탁월한 전략 중 하나는 정치적 연합을 만들고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광범위한 포괄적 성격의 통일전선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5. 경제의 계획화
북한지역에 산업경제의 기초가 세워진 시기는 일제시대로, 해방후 북한경제는 일본의 식민유산과 소련 모델을 결합한 것이었고, 확연한 결점만이 아니라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갖춘 독특한 한반도식 공산주의 체제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식민지 공합화로 인해 북한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스탈린적 공업 발전의 경로를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이 길을 가고자 했다. 1940년대 소련의 스탈린주의 발전모델은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것으로, 소련 경험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유지해내려는 후진 농업국가에서 급속한 산업화의 유일한 성공모델로 주목을 끌었다. 스탈린 모델은 대규모, 중앙계획,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의미한다.
북한의 경제발전은 캠페인, 동원, 돌격운동 등을 포함한 전술과 전쟁용어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같이 강제된 공업화 방식은 적어도 전반적인 경제산출에 좋은 성과를 내었다. 경제생산과 추출을 위해 동원되어야 할 우선 대상은 농민이었다. 1946년 토지개혁 직후 김일성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북한을 식량부족 지역에서 풍요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일성이 높은 농업생산성을 요구한 이면에는 식량생산의문제가 있었다. 농업산출은 남한의 곡물 생산지역과 북한이 분리되고 비료의 부족, 농기구의 부족, 붉은 군대의 식량 공급요구, 그리고 1945년 가을 소련 점령군에 의한 가축의 징발과 도축으로 심각하게 방해를 받았다.
해방당시 조선경제는 수년간 일본의 전쟁동원 때문에, 일본과의 갑작스런 단절로 혼란과 왜곡을 겪었다. 1945년 가을 농업생산은 해외 이주민의 대규모 유입, 외국의 점령, 정치적 불확실성, 그리고 생필품 부족으로 혼란상태였다. 게다가 소련점령군의 식량수탈도 부담이 되었는데, 이는 인민위원회가 농부들로부터 식량을 모아 도시주민과 소련에 분배하는 중개자로 활동하면서 체계화되었다. 식량분배는 사회적정치적 통제의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법적으로 허가된 직장에 고용된 사람들만 식량배급을 받을 수 있었고, 식량배급의 중단위협은 정권 비판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유인 수단이었다.
토지개혁은 북한 농촌의 사회경제적 삶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정권과 김일성 개인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토지개혁의 선전 효과를 최대화했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의 70%는 정권을 지지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갖게 되었다. 토지개혁은 농촌에서 정권지지를 획득하는 것과 생산성을 고취시키고, 농업경제에서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정권의 지방에 대한 과중한 수탈과 농민들의 불만, 농업현물세 납부 거부에도 불구하고 빈농 일반은 대체적으로 토지개혁 이후 살림이 나아졌다. 남한보다 불자배분에서 평등했고, 빈농으로부터 정당성을 얻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다. 특히, 농촌은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이들에게 큰 영향으 준 개혁은 농촌에서의 문맹퇴치와 교육의 확대였다.
해방 후 첫 해 동안 농업생산 뿐만아니라 공업생산 역시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인의 사보타주와 러시아의 약탈로 인한 공업손실의 결과였다. 1947년초 소련의 정책은 조선의 공업생산을 장려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의 파괴행위, 소련의 약탈, 조선인의 횡령 혹은 단순 태만 등으로 1천개 이상의 중대규모 기업들이 가동중단 상태에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산업경제를 재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같은해 8월 사회개혁의 최종 조치로 주요산업의 국유화 법을 통과시켰다. 일본인들이 대부분의 식민지 산업을 통제했던 점은 국가 소유로의 전환을 상대적으로 쉽게 했다.
1946년 억류된 약 500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1946말 모두 돌아가자 기술양성을 위해 소련에 북한 학생을 보내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소련의 교사와 경영자, 기술자들을 북한에 파견했다. 또한, 소련은 점령기간과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에 상당한 양의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다. 소련이 특히 1946년 초기 재건과정에서 북한경제활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북한의 대외무역은 거의 대부분이 소련중국과 이루어졌다. 소련은 자신들의 완제품을 팔고, 북한을 원료기지로 활용했다. 이는 식민지 교환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해방 당시 식민지 산업의 90% 이상을 일본인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일본인 철수와 협조자들의 파면으로 북한에서는 노동자위원회가 대부분의 공장을 통제했다. 많은 경우 감옥에서 풀려난 공산주의자들이 이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소련 점령당국은 도착하자마자, 공장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많은 공장들을 해체하여 장비와 부품들, 원자재를 소련으로 보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 직후 북한의 공업설비에 대한 책임을 맡아 그해 8월 주요산업 국유화 법률이 공포되었다. 북한의 산업 90%에 해당하는 1천개 산업제들이 국가소유가 되었고, 1949년 국가수입의 50% 이상은 이드 국유화된 산업으로부터 나왔다. 본질적으로 국유화는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인 소유자와 신민 국가로부터 ‘인민정권’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2월 소련군의 부분 철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경제계획국을 설립하였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통제했던 대부분의 공장들을 인민위원회로 넘겨주었다. 1947년 초 북한의 첫 번째 민족경제 부흥발전을 위한 1o년 계획이 채택되었다. 이 계획은 건설, 철강, 석탄, 화학, 전력, 수송, 특히 철도 분야에 집중하여 공업생산에서 전년 대비 92% 이상의 성장을 요구했다. 1948년 김일성은 1947년 계획이 모든 면에서 성과적으로 초과 달성되었으며, 자립적 민족경제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까지 북한의 경제성장은 식민통치 종식으로 인한 경제침체를 거의 회복했고 국영기업에 기반한 민주적 민족경제를 형서
5. 경제의 계획화
북한지역에 산업경제의 기초가 세워진 시기는 일제시대로, 해방후 북한경제는 일본의 식민유산과 소련 모델을 결합한 것이었고, 확연한 결점만이 아니라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갖춘 독특한 한반도식 공산주의 체제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식민지 공합화로 인해 북한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스탈린적 공업 발전의 경로를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이 길을 가고자 했다. 1940년대 소련의 스탈린주의 발전모델은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것으로, 소련 경험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유지해내려는 후진 농업국가에서 급속한 산업화의 유일한 성공모델로 주목을 끌었다. 스탈린 모델은 대규모, 중앙계획,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의미한다.
북한의 경제발전은 캠페인, 동원, 돌격운동 등을 포함한 전술과 전쟁용어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같이 강제된 공업화 방식은 적어도 전반적인 경제산출에 좋은 성과를 내었다. 경제생산과 추출을 위해 동원되어야 할 우선 대상은 농민이었다. 1946년 토지개혁 직후 김일성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북한을 식량부족 지역에서 풍요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일성이 높은 농업생산성을 요구한 이면에는 식량생산의문제가 있었다. 농업산출은 남한의 곡물 생산지역과 북한이 분리되고 비료의 부족, 농기구의 부족, 붉은 군대의 식량 공급요구, 그리고 1945년 가을 소련 점령군에 의한 가축의 징발과 도축으로 심각하게 방해를 받았다.
해방당시 조선경제는 수년간 일본의 전쟁동원 때문에, 일본과의 갑작스런 단절로 혼란과 왜곡을 겪었다. 1945년 가을 농업생산은 해외 이주민의 대규모 유입, 외국의 점령, 정치적 불확실성, 그리고 생필품 부족으로 혼란상태였다. 게다가 소련점령군의 식량수탈도 부담이 되었는데, 이는 인민위원회가 농부들로부터 식량을 모아 도시주민과 소련에 분배하는 중개자로 활동하면서 체계화되었다. 식량분배는 사회적정치적 통제의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법적으로 허가된 직장에 고용된 사람들만 식량배급을 받을 수 있었고, 식량배급의 중단위협은 정권 비판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유인 수단이었다.
토지개혁은 북한 농촌의 사회경제적 삶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정권과 김일성 개인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토지개혁의 선전 효과를 최대화했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의 70%는 정권을 지지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갖게 되었다. 토지개혁은 농촌에서 정권지지를 획득하는 것과 생산성을 고취시키고, 농업경제에서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정권의 지방에 대한 과중한 수탈과 농민들의 불만, 농업현물세 납부 거부에도 불구하고 빈농 일반은 대체적으로 토지개혁 이후 살림이 나아졌다. 남한보다 불자배분에서 평등했고, 빈농으로부터 정당성을 얻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다. 특히, 농촌은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이들에게 큰 영향으 준 개혁은 농촌에서의 문맹퇴치와 교육의 확대였다.
해방 후 첫 해 동안 농업생산 뿐만아니라 공업생산 역시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인의 사보타주와 러시아의 약탈로 인한 공업손실의 결과였다. 1947년초 소련의 정책은 조선의 공업생산을 장려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의 파괴행위, 소련의 약탈, 조선인의 횡령 혹은 단순 태만 등으로 1천개 이상의 중대규모 기업들이 가동중단 상태에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산업경제를 재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같은해 8월 사회개혁의 최종 조치로 주요산업의 국유화 법을 통과시켰다. 일본인들이 대부분의 식민지 산업을 통제했던 점은 국가 소유로의 전환을 상대적으로 쉽게 했다.
1946년 억류된 약 500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1946말 모두 돌아가자 기술양성을 위해 소련에 북한 학생을 보내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소련의 교사와 경영자, 기술자들을 북한에 파견했다. 또한, 소련은 점령기간과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에 상당한 양의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다. 소련이 특히 1946년 초기 재건과정에서 북한경제활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북한의 대외무역은 거의 대부분이 소련중국과 이루어졌다. 소련은 자신들의 완제품을 팔고, 북한을 원료기지로 활용했다. 이는 식민지 교환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해방 당시 식민지 산업의 90% 이상을 일본인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일본인 철수와 협조자들의 파면으로 북한에서는 노동자위원회가 대부분의 공장을 통제했다. 많은 경우 감옥에서 풀려난 공산주의자들이 이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소련 점령당국은 도착하자마자, 공장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많은 공장들을 해체하여 장비와 부품들, 원자재를 소련으로 보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 직후 북한의 공업설비에 대한 책임을 맡아 그해 8월 주요산업 국유화 법률이 공포되었다. 북한의 산업 90%에 해당하는 1천개 산업제들이 국가소유가 되었고, 1949년 국가수입의 50% 이상은 이드 국유화된 산업으로부터 나왔다. 본질적으로 국유화는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인 소유자와 신민 국가로부터 ‘인민정권’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2월 소련군의 부분 철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경제계획국을 설립하였다. 소련군은 자신들이 통제했던 대부분의 공장들을 인민위원회로 넘겨주었다. 1947년 초 북한의 첫 번째 민족경제 부흥발전을 위한 1o년 계획이 채택되었다. 이 계획은 건설, 철강, 석탄, 화학, 전력, 수송, 특히 철도 분야에 집중하여 공업생산에서 전년 대비 92% 이상의 성장을 요구했다. 1948년 김일성은 1947년 계획이 모든 면에서 성과적으로 초과 달성되었으며, 자립적 민족경제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까지 북한의 경제성장은 식민통치 종식으로 인한 경제침체를 거의 회복했고 국영기업에 기반한 민주적 민족경제를 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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