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7~8장) - 경제 복구의 추진 당의 기초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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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7~8장) - 경제 복구의 추진 당의 기초확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있지만, 당의 기층은 농민층이 많았다.
▶대중통제
·자아비판을 가장 중요한 통제의 무기로 삼음, 자백운동의 전개-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판함.
-소련식 경제 발전계획 추진의 과정에 결핍을 최소화 하고, 당원 중심으로 결속시키기 위함,
·사회화, 참여, 계급투쟁에 관한 조선 노동당의 이론과 실천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나타났음.
·남한 실정을 왜곡 선전함,
▶북한의 노동계급
·노동계급은 모든 인민과 광범위한 민족 통일전선을 구축함. 농민층과 견고한 동맹이었음.
·당과 국가의 계급의 권력 배분
-각 주요 계급들은 공산주의적 기준으로 볼 때 극히 불만족 스러운 것이었고, 당은 계급교양교육을 부단히 실시해야 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전선전술(사회 내 모든 요소들을 받아들임)이 인민공화국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였으나, 한편 주민들에게는 치열하고무자비한 계급투쟁에 대해 끊임없는 주의를 환기 시킴.
·빈농, 프롤레탈리아, 혁명 유가족으로 인정되는 것이 출세와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음.
·월남자의 가족들을 세분화 하고 월남자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차별정책이 시행됨.
·지식계급은 북한의 가장 복잡한 문제 였다.
-1956.은 14만의 지식계급이 있고, 대학은18개 교가 설치되었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지식계급이 대의원 총수의 27.9%를 차지하였다.
-하앙천은 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지식 계급이 있으나 ‘극소수나마 건전치 못한 요소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시인함.
2. 전후 초기의 회고 정치 엘리트
▶엘리트의 위계 질서
·국내파 숙청 후 수년간 암투가 계속됨. 이 여파로 위계질서가 변함.
-여전히 김일성은 절대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갖음
-중공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도충성의 대상은 소련이었음.
·김일성 휘하의 인물들
-김두봉, 박정애, 회용건, 박창옥, 김일, 최창익 등
·김두봉: 급진적 민족주의자, 연안파의 원로, 정권 도전 위험이 없어 명목상의 혁명 지도자
·박정애: 김용범의 아내. 김일성을 찬양하는 열렬한 추종자 였음, 독자적인 권력 기반은 없음.
·최용건: 조선민주당 위원장이었음, 확고한 공산주의자임. 1956년 당 기구개편에서는 최용건이 박정애를 제치고 서열3위로 오름. 1945직후 비공산주의 정당의 지도자(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정책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북한의 경찰과 군대를 창설하는 데 기여
·박창옥: 소련에서 교육을 받음.북한 공산주의 확립에 기여. 많은 논설(마르크스-레닌주의)을 집필.‘자유주의적 좌익’을 포함한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함.
김일: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종사함. 김일성 밑에서 일함. 0954.농업상으로 재직하고, 1957 내각 부수상이 됨 .
·최창익: 연안파의 실질적 지도자. 조선 노동당과 내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함.
·당시의 의미 있는 파벌은 김일성파임. 한국 혁명운동의 복잡한 기원에 출신 배경, 학력, 문화의 차이까지 존재함. 그러나 종파투쟁 문제가 당시의 중대한 문제 였음.
·소련파의 비중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 경험과 이데올로기, 기술 면에서 능력을 발휘함.(박창옥, 박영빈, 박의완)
▶당시 정권 담당자들은 경제복구와 당 재건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음.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자, 당 위원장으로서 이 두 가지 과제를 이루어 가면서 지도자로 군림했음.
·1953-1956사이 구 남로당계 지도자가 제거된 것을 제외하고 매우 단합된 것이었다.
3. 당의 기초확립
▶그동안 당과 정권기관의 재건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당지도자들은 지방조직이 재건되어야 중앙당의 지령을 실천할 수 있음을 알고 지방조직 재건에 힘섰다.
·1954.10.31.새로운 지방 주권기관 구성법이 공포됨.(지방 주권기관의 권위와 책임을 높이기 위해)
-1956.전국적으로 도.시, 군, 리등 각급 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 됨.,
-당은 현지에 지도원을 파션하여 현지 집중 지도를 통해 농촌 현실파악등을 용이하게 하였다.
▶중국의 경험을 모방해 온 조선 노동당 지도자들은 당과 대중의 연계를 강화하고 정책 시행의 창의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의 주관하 각 지방에서 국가정ろ을 연구,통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라고 강조함,
-당원들의 계급적 교양수준이 매우 낮고, 농민층의 경우 문맹자도 많다는 것을 앎.
-성인교육과 초등 의무교육을 강조함.(문맹퇴치의 강조)
·국가는 경제계획의 목표를 지방기관에 책임 전가 함.
-일선의 요원들을 허위실적보고나 주민에게 압력을 전가하며 국가를 대대적으로 기만하게 되었고 이것은 발전과 원한과 공포가 뒤얽힌 것으로 나타남.
·정치 경제 분야의 유능 인력 확보의 작업은 쉽지 않았다.
4. 군소 정당과 통일전선
▶당 최고 간부들의 두 번째 관심사는 통일전선 활동의 강화였다.
·한국 정쟁 당시 다른 정당(비공산주의 정당)은 월남하거나 살해 되었기 때문에 1950년 중반에는 조선 노동당 외에 조선 민주당과 천도교 청우당의 두 정당만이 형식적인 골격과 당원을 가진 채 로 살아 남았다.
· 살아남은 이유
-부르조아 분자들에게 정치적 안식처를 제공
-비공산주의 정당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이 북한 정권이 통일전선에 의거한 정권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함
-남한의 지지자들을 획득하는 데 유용함.
▶조선 민주당
-초대 당수는 조만식임 조만식이 소련 군정에 의해 투옥되고 다수의 당 간부들이 월남해 버린 후 실질적인 의미를 상실함,최용건, 홍가황등을 거쳐 강양욱에게 당 중앙위원장직이 넘어감. 기독교도의 공식당임. 미제 침략의 도구로 몰아 차별 정책을 시행함.
-조만식의 숙청과 한국전쟁은 군소 정당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이었음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은 김달현, 조선 민주당과는 달리 관대하게 여김.
▶월북한 남측의 좌익 정당
·근로인민당:여운형이 창건함. 백남운이 이끌고 월북. 한동안 성공한 군소정당 지도자들 중 하나.
·인민공화당: 김원봉이 당수, 1946남북협상 당시 월북,성주식, 한지성 등과 더불어 국제간첩의 죄목으로 처형됨.
·민주 독립당: 지도자 홍명희. 정치적 비중이 없었음., 자취를 감춤.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1949.7.25북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과1949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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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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