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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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정주 徐廷柱 (1915 ∼ 2000)

친일 시인으로 정치 문인으로...서정주

친일 경력

친일에 대한 변명

해방후 `정치문인`으로서의 활동

본문내용

을 내놓은 미당은 해방 후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해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의 시적 경향은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적 편력은 보를레르와 니체, 그리스신화에 몰두했던 초기와 순수시의 논리로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중기,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고향이미지와 떠돌이 삶을 표현한 후기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화사집」 등 해방 전까지의 작품이 해당되며 중기는 두번째 시집인 「귀촉도」에서 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까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후기는「질마재 신화」 이후의 시 창작이다.
미당은 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았다.
특히 90년대에 펴낸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나 「80 소년 떠돌이 시」는 만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했다.
서씨는 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며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당은 한국시사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영예와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도 함께 안고서 평생을 살았다.
일제 말기에 친일활동이라는 부끄러운 상처를 남긴 그는 80년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서 TV 방송에 출연, 군부 지지를 공개 선언함으로써 씻기 힘든 오점을 남겼다.
이같은 행적으로 그는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랬다.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 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끊이지 않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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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15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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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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