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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실학의개념
2.정치사상
3.경제사상
4.애민관
5.역사관
6.과학관
7.인간관
8.결론
2.정치사상
3.경제사상
4.애민관
5.역사관
6.과학관
7.인간관
8.결론
본문내용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은 우매하여 죽을 죄를 모르고, 그윽이 전하의 일월같은 명철로도 오히려 붕당의 테두리 밖의 것을 살피시지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북지방의 백성과 여항의 천류가 일찍이 붕당을 지은 죄가 없는데도 오히려 탕평의 정책 이내에 거론하지 못하시니, 신의 '살피시지 못한 점'이란 바로 이를 말한 것입니다.
① 붕당
정약용은 당시 붕당의 폐단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의 긍정적 모습이었던 붕당이 점차 변질되면서 그러한 폐단을 발생시킨 것인데, 그는 그러한 폐단으로 인해 붕당이 발생한 것으로 문제를 인식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붕당정치의 해결방법 역시 단순히 탕평책을 지지하는 데에 머물렀고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② 평등한 인재등용
이 부분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정거액제>의 실현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정거액제란 지방별로 균등하게 인원을 정해 선발하는 것인데 이 정책이 시행되었다면 당시에 소외되었던 서북지방의 유능한 인재들이 중앙으로 진출해 사회적 갈등 해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정약용도 동시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천거>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소외된 계층의 사람에게 관리등용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주자고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학문을 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조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정거액제>같은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동시대 학자들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③ 천거제 주장
그는 변질된 과거제의 대안으로 천거제를 주장하였다. 허나 이 부분은 단순히 변질된 과거제의 해결책이라는 측면보다는 그와 정조와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정조는 붕당 정치의 폐단 속에서 <군주권 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천거제>는 이런 정조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졌다.(정약용은 정조의 입맛에 맞게 정책을 주장했다는 비판이 나왔죠. 정약용은 여우다~!) 당시 정조의 총애는 받고 있으나 과거제로서는 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실학자들은 천거제를 통해 좀 더 많이 중앙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또 다른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당시 붕당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며 정조에게 더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천거제 주장과 함께 겸직의 폐단을 지적하며 구임, 즉 <전문가 양성>을 주장하였다. 이 것 역시 관료들이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함으로써 <군주권 강화>라는 의도를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11. 마무리하며
이상에서 정약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았다. 일반적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정약용은 그 명성에 걸맞게 그 사상과 학문세계의 넓이가 대단하다. 앞선 내용들도 정약용의 모든 측면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할 따름이다.
이런 정약용의 넓은 학문세계는 그의 개방정신에 의해 많이 확립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서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용적인 학문을 받아들이려 했으며,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것들을 큰 거부감없이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들 중에는 이렇게 받아들인 여러 지식을 정리한것들이 많으며 이런 지식들이 모여 그의 박학다식한 학문세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정약용을 비판없이 존경스러운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정약용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점은 그의 사상과 학문세계 여러 곳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정치사상에 있어서 후세 연구자들이 극단적으로 상반된 연구결과를 제기할 정도로 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일관된 줄기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점은 다만 정치사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사상과 학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이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많은 지식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했던 개방정신이, 그를 박학다식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하나의 일관된 줄기를 따라가게 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지식의 물결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자기의 일관된 기준에 맞추어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단은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실용적인 것에 대해서 그런 모습이 두드러진다.
정약용은 우리 역사에 있어 분명 뛰어난 학자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의 학문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정약용이라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할 때는 무조건적인 존경과 그에 따른 맹목적인 수용이 아니라 올바른 기준에 의한 취사선택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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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1990). 다산의 정치경제사상. 서울 : 창작과 비평사
부남철(1996).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서울 : 사계절
홍덕기(2001).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전남대학교 출판부
이익성 편(1997). 정약용 <경세유표 15-17>. 서울 : 한길사
김상홍(1985). 다산 정약용 문학 연구(茶山 丁若鏞 文學硏究). 단대출판부
전영진(1995). 송강가사·다산시선, 서울 :홍신문화사
장승구(2001). 정약용과 실천의 철학 : 다산 철학의 근대성 탐구. 서울 : 서광사
한형조(1996).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 조선 유학의 철학적 패러다임 연구. 서울 : 세계사
윤사순 편(1990). 정약용1. 고려대학교 출판부
전상운(1998).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9.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사상연구회(1996). 실학의 철학. 서울 : 예문서원
고승제(1995). 다산을 찾아서.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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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붕당
정약용은 당시 붕당의 폐단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의 긍정적 모습이었던 붕당이 점차 변질되면서 그러한 폐단을 발생시킨 것인데, 그는 그러한 폐단으로 인해 붕당이 발생한 것으로 문제를 인식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붕당정치의 해결방법 역시 단순히 탕평책을 지지하는 데에 머물렀고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② 평등한 인재등용
이 부분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정거액제>의 실현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정거액제란 지방별로 균등하게 인원을 정해 선발하는 것인데 이 정책이 시행되었다면 당시에 소외되었던 서북지방의 유능한 인재들이 중앙으로 진출해 사회적 갈등 해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정약용도 동시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천거>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소외된 계층의 사람에게 관리등용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주자고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학문을 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조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정거액제>같은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동시대 학자들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③ 천거제 주장
그는 변질된 과거제의 대안으로 천거제를 주장하였다. 허나 이 부분은 단순히 변질된 과거제의 해결책이라는 측면보다는 그와 정조와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정조는 붕당 정치의 폐단 속에서 <군주권 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천거제>는 이런 정조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졌다.(정약용은 정조의 입맛에 맞게 정책을 주장했다는 비판이 나왔죠. 정약용은 여우다~!) 당시 정조의 총애는 받고 있으나 과거제로서는 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실학자들은 천거제를 통해 좀 더 많이 중앙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또 다른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당시 붕당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며 정조에게 더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천거제 주장과 함께 겸직의 폐단을 지적하며 구임, 즉 <전문가 양성>을 주장하였다. 이 것 역시 관료들이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함으로써 <군주권 강화>라는 의도를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11. 마무리하며
이상에서 정약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았다. 일반적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정약용은 그 명성에 걸맞게 그 사상과 학문세계의 넓이가 대단하다. 앞선 내용들도 정약용의 모든 측면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할 따름이다.
이런 정약용의 넓은 학문세계는 그의 개방정신에 의해 많이 확립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서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용적인 학문을 받아들이려 했으며,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것들을 큰 거부감없이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들 중에는 이렇게 받아들인 여러 지식을 정리한것들이 많으며 이런 지식들이 모여 그의 박학다식한 학문세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정약용을 비판없이 존경스러운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정약용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점은 그의 사상과 학문세계 여러 곳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정치사상에 있어서 후세 연구자들이 극단적으로 상반된 연구결과를 제기할 정도로 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일관된 줄기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점은 다만 정치사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사상과 학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이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많은 지식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했던 개방정신이, 그를 박학다식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하나의 일관된 줄기를 따라가게 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지식의 물결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자기의 일관된 기준에 맞추어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단은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실용적인 것에 대해서 그런 모습이 두드러진다.
정약용은 우리 역사에 있어 분명 뛰어난 학자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의 학문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정약용이라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할 때는 무조건적인 존경과 그에 따른 맹목적인 수용이 아니라 올바른 기준에 의한 취사선택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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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순 편(1990). 정약용1. 고려대학교 출판부
전상운(1998).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9.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사상연구회(1996). 실학의 철학. 서울 : 예문서원
고승제(1995). 다산을 찾아서. 중앙일보사
윤사순(1990). 정약용. 고려대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