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혼인의 의미와 절차
1. 혼인이란
2. 조선시대 혼인의 절차
3.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혼인과 관련된 제도
1. 남아선호사상
2. 시집살이
3. 동성동본 금혼제
4. 처첩차별제
5. 조혼풍속
6. 여성의 정절(이혼, 재혼)
7. 여성의 간통
8. 내외법
4. 조선시대의 혼인제도를 통해 살펴본 여성의 지위
1. 성리학의 영향
2. 여성의 교육
5. 나가며
[참고문헌]
2. 혼인의 의미와 절차
1. 혼인이란
2. 조선시대 혼인의 절차
3.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혼인과 관련된 제도
1. 남아선호사상
2. 시집살이
3. 동성동본 금혼제
4. 처첩차별제
5. 조혼풍속
6. 여성의 정절(이혼, 재혼)
7. 여성의 간통
8. 내외법
4. 조선시대의 혼인제도를 통해 살펴본 여성의 지위
1. 성리학의 영향
2. 여성의 교육
5.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치른 다음 신부를 두고 혼자 집으로 간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신부집에 오는데, 이것을 ‘재행(再行)’ 또는 ‘재행거동한다’라고 하였다. 재행은 신부가 신행할 때까지 여러 번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보통 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몇 년 뒤에나 신행을 하였으니 이것을 ‘해묵이’라 하고, 몇 달 뒤에 하는 것을 ‘달묵이’라 한다.
(8) 폐백(幣帛)
신부가 시가 어른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폐백상을 차리고 신부가 시부모에게 절을 하고 술을 권한다. 절을 받은 시부모는 덕담을 하고 폐백상 위에 있는 대추를 신부 치마에 던져 준다. 시부모 다음에는 시조부모, 시백숙부모, 시고모내외, 시외삼촌내외, 이모내외 순으로 하고, 형제항렬 사이는 서로 맞절을 한다.
(9) 근친(覲親)
신부가 친정을 다녀오는 것을 근친이라 한다. 원래 근친은 신부가 시집에 와서 첫 농사를 짓고 농사지은 곡식으로 떡을 하고 술을 빚어 친정부모에게 자랑을 하러 가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 혼례를 올렸으면 가을 추수 이후에 근친을 하고, 가을에 혼례를 올렸으면 다음해 가을에 근친을 하는 것이 상례이었다.
근친으로서 혼례의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이니, 의혼에서 시작한 혼인절차는 때로는 몇 년이 지속되기도 한다.
3.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혼인과 관련된 제도
혼인은 ‘성(性)과 성의 결합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해온 역사만큼이나 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혼인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면 혼인제도를 살펴보고 분석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해 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혼인제도는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지만,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 장병인
대다수의, 혹은 모든 사회 현상이 그러하듯 혼인제도 또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양태를 달리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혼인제도의 변화 양태를 추적해 나간다면 당시 사회의 변화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조는 조사를 통하여 시대 변화, 구체적으로 조선 전후기 사회의 변화에 따른 혼인제도의 변화를 연구해 보았다. 조선 전후기는 여러 모로 사회상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하나로 혼인제도 또한 예외가 아닌데, 이러한 혼인제도의 변화를 통해 조선 전후기 사회 변화의 양상을 짚어 보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변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지위변화를 연구해 보고자 했다.
우선 우리조는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가족생활을 설명할 수 있는 몇가지 키워드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해보았다.
1. 남아선호사상
조선시대 여성에게 있어서 아들 낳기는 여성들의 영원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아들 얻기에 대한 기대는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을 낳기 위한 여러 가지 민속적 비방이 전해진 것은 물론, 씨받이나 첩을 얻어서라도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처럼 아들을 낳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대가 끊어지면 조상 뵐 면목이 없으니까.’ 또는 ‘제삿밥은 얻어먹어야지.’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아들이란 가계를 계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 것이야 말로 효의 으뜸이요. 조상에 대한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나도 죽은 뒤에 당당히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딸은 어떨까. 딸은 그야말로 ‘출가외인’일 뿐이다. 열심히 키워봤자그저 남이 되는 존재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 이배용 외
그러면 이러한 아들선호의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과 강에 제사를 재내어 금와 왕자를 얻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은 아들을 못 낳는 왕비를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아들로 바꾸어 줄 것을 하늘에 요청하는 등 아들을 낳으려는 집념이 매우 강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명종은 태자에게 아들이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 자사를 지냈다고 하며, 의종도 왕비와 함께 만일 아들을 낳게 된다면 금과 은으로 ‘화엄경’ 네 권을 사경하겠다고 발원한 예가 있다. 이러한 예들만 보면 아들 선호의식은 고대부터 비롯되어 그 역사가 길고 또 매우 강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의 자식, 즉 외손도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재산도 아들 딸 구별 없이 고르게 상속하였다. 그리고 노후 생활을 위해 딸을 수양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한 것은 왕위 계승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강한 것이었으며, 대개의 경우는 아들에 대한 선호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조선중기 이후 이러한 양상은 달라지게된다. 조선 초기부터 이미 성리학적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꾀하고는 있었지만, 17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철저한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조선사회에서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고 제사를 모시는 데 꼭 필요한 존재로 중시되지만, 딸은 이 모든 것에서 제외된 채 ‘출가외인’이 되니, 딸을 낳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딸을 많이 낳은 집에서는 딸의 이름을 ‘섭섭이’, ‘서운이’ 등으로 지어 편치 않은 마음을 표현하거나 ‘후남이’, ‘순남이’등과 같이 다음에는 꼭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삼남지방의 수심가에, ‘날 낳고 우리 아버지 왼새끼 꼬며 울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금줄인 왼새끼를 꼬며 운다는 말은 바로 딸을 낳았다는 표현인데, 딸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해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며느리가 아들을 낳고 못 낳는 것은 그 집안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아들을 못 낳는 것은 불효 중에서 가장 큰 불효로 여겨졌다. 그러기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칠거지악에 의해
(8) 폐백(幣帛)
신부가 시가 어른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폐백상을 차리고 신부가 시부모에게 절을 하고 술을 권한다. 절을 받은 시부모는 덕담을 하고 폐백상 위에 있는 대추를 신부 치마에 던져 준다. 시부모 다음에는 시조부모, 시백숙부모, 시고모내외, 시외삼촌내외, 이모내외 순으로 하고, 형제항렬 사이는 서로 맞절을 한다.
(9) 근친(覲親)
신부가 친정을 다녀오는 것을 근친이라 한다. 원래 근친은 신부가 시집에 와서 첫 농사를 짓고 농사지은 곡식으로 떡을 하고 술을 빚어 친정부모에게 자랑을 하러 가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 혼례를 올렸으면 가을 추수 이후에 근친을 하고, 가을에 혼례를 올렸으면 다음해 가을에 근친을 하는 것이 상례이었다.
근친으로서 혼례의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이니, 의혼에서 시작한 혼인절차는 때로는 몇 년이 지속되기도 한다.
3.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혼인과 관련된 제도
혼인은 ‘성(性)과 성의 결합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해온 역사만큼이나 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혼인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면 혼인제도를 살펴보고 분석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해 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혼인제도는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지만,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 장병인
대다수의, 혹은 모든 사회 현상이 그러하듯 혼인제도 또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양태를 달리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혼인제도의 변화 양태를 추적해 나간다면 당시 사회의 변화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조는 조사를 통하여 시대 변화, 구체적으로 조선 전후기 사회의 변화에 따른 혼인제도의 변화를 연구해 보았다. 조선 전후기는 여러 모로 사회상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하나로 혼인제도 또한 예외가 아닌데, 이러한 혼인제도의 변화를 통해 조선 전후기 사회 변화의 양상을 짚어 보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변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지위변화를 연구해 보고자 했다.
우선 우리조는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 가족생활을 설명할 수 있는 몇가지 키워드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해보았다.
1. 남아선호사상
조선시대 여성에게 있어서 아들 낳기는 여성들의 영원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아들 얻기에 대한 기대는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을 낳기 위한 여러 가지 민속적 비방이 전해진 것은 물론, 씨받이나 첩을 얻어서라도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처럼 아들을 낳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대가 끊어지면 조상 뵐 면목이 없으니까.’ 또는 ‘제삿밥은 얻어먹어야지.’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아들이란 가계를 계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 것이야 말로 효의 으뜸이요. 조상에 대한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나도 죽은 뒤에 당당히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딸은 어떨까. 딸은 그야말로 ‘출가외인’일 뿐이다. 열심히 키워봤자그저 남이 되는 존재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 이배용 외
그러면 이러한 아들선호의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과 강에 제사를 재내어 금와 왕자를 얻었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은 아들을 못 낳는 왕비를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아들로 바꾸어 줄 것을 하늘에 요청하는 등 아들을 낳으려는 집념이 매우 강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명종은 태자에게 아들이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 자사를 지냈다고 하며, 의종도 왕비와 함께 만일 아들을 낳게 된다면 금과 은으로 ‘화엄경’ 네 권을 사경하겠다고 발원한 예가 있다. 이러한 예들만 보면 아들 선호의식은 고대부터 비롯되어 그 역사가 길고 또 매우 강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의 자식, 즉 외손도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재산도 아들 딸 구별 없이 고르게 상속하였다. 그리고 노후 생활을 위해 딸을 수양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한 것은 왕위 계승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강한 것이었으며, 대개의 경우는 아들에 대한 선호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조선중기 이후 이러한 양상은 달라지게된다. 조선 초기부터 이미 성리학적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꾀하고는 있었지만, 17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철저한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조선사회에서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고 제사를 모시는 데 꼭 필요한 존재로 중시되지만, 딸은 이 모든 것에서 제외된 채 ‘출가외인’이 되니, 딸을 낳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딸을 많이 낳은 집에서는 딸의 이름을 ‘섭섭이’, ‘서운이’ 등으로 지어 편치 않은 마음을 표현하거나 ‘후남이’, ‘순남이’등과 같이 다음에는 꼭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삼남지방의 수심가에, ‘날 낳고 우리 아버지 왼새끼 꼬며 울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금줄인 왼새끼를 꼬며 운다는 말은 바로 딸을 낳았다는 표현인데, 딸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해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며느리가 아들을 낳고 못 낳는 것은 그 집안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아들을 못 낳는 것은 불효 중에서 가장 큰 불효로 여겨졌다. 그러기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칠거지악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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