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론
2.일본제국주의의 성립
3.일본제국주의의 전개
4.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특질
5.일본제국주의의 종언
6.결론
2.일본제국주의의 성립
3.일본제국주의의 전개
4.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특질
5.일본제국주의의 종언
6.결론
본문내용
에도 불구하고, 그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또한 한대륙은 겨레의 터전이었고,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활동무대였다. 그런 만큼 임시정부는 한대륙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이 지역을 통치거점으로 확고히 다져야 했다. 한반도는 물론, 한대륙에 대한 통치주체로서 거주 한민족의 보호조치 마련과 통치력 확보에 주력하면서 이를 대내외에 부각시키기 위해 온 역량과 열성을 쏟아야 했다.
당시 중국은 내란에 휘말려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이런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한대륙 지역을 둘러싼 주장과 이익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적어도, 그땅에 생활 터전을 일군 2백만 명이 훨씬 넘었던 우리 한겨레의 안전보장이나 주권확립 조치도 전혀 마련해 주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남겨 두고 성급하게 철수하여 한반도로 돌아온 과오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는 주권정부로서 통치역량을 쌓지 못했고 외교력 강화에도 실패했다. 실질적으로 정부를 대표하지 못하여 동맹국에 의해 자신의 군대, 광복군이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귀환할 때도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하는 치욕을 겪었다. 또한, 본국으로 돌아와서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조국의 재건에서조차 배제되는 냉대를 받았다. 미국·소련 등이 우리 영토 안에서 '자의적인 신질서'를 구축하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 우리 주권과 영토를 회복함은 물론 일본에 대한 전쟁보상이나 향후 전쟁방지를 위한 장치 마련에 관한 우리의 입장과 주장을 명백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해내지 못함으로써 국토가 38선으로 분할됐고 미·소군이 주둔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45년 8월, 20여만 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밀려왔고, 9월에는 미국이 소련의 38선 월경에 항의하면서 인천으로 상륙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그대신 소련·미국이라는 외세가 한반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부실로 민족의 장래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남북분단이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와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강점 당한 나라의 운명이 으레 그러하듯, 이 시기에 한민족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한겨레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대일 투쟁을 처절히 벌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했으며 1919년에는 전 민족이 들고일어나 3·1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3·1운동은 청년과 학생, 그리고 동학 등의 종교세력이 주도하여, 태극기아래 가장 광범위하고 일체감 있게 퍼져 나간 큰 물결이었다. 3·1운동의 열기는 민족의 이성과 의지를 일깨우면서 독립운동이라는 구체적이고 조직화된 활동을 가져왔다.
또한, 한반도는 일제통치의 억압을 받는 땅으로 전락해버렸지만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한대륙이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어 다시 우리 겨레의 역사의 장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웅혼을 떨쳤던 역사의 땅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 의지를 관철하는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17일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존속하면서 전체를 관할하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가장 큰 줄기를 주도했다.
6.결론
어떻게 하면 우리 의지를 활짝 펴고 살며 국제질서나 강국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우리만 안전하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도발을 하지 않더라도 전쟁 상대국이 되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전쟁 상대국이 되어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힘을 기르고 전략을 수립해 놓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얼마전처럼 약하지도 않으며, 패배와 어둠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시점이니 만큼 실패한 독립운동사를 되씹으며 어두웠던 날의 상념으로 세월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당시의 유물·유적을 전시하는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등 치욕의 35년을 복원하는 데 열을 쏟는 한편, 가장 최근사라서 고증이 손쉽다는 편리성에 만족하여 이 시절의 역사에 몰두하고 있다. 어두운 역사에 매달리는 일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때의 아픔만이 되살아날 뿐이다. 심리적인 무력감과 대외적인 좌절감만 확인되고 희망적인 진실과 교훈을 찾기가 어렵다.
특히, 중국·일본·미국 등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외교정책과 승세로 이어가는 전략적인 지혜를 얻을 길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의 존재상의 의의나 민족의 기개를 되살리자는 차원에서는 모르지만, 국가전략의 차원에서는 이 시절에 별다른 의의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눈앞에는 힘과 이익의 원칙에 따라 격동하는 국제현실이 있고, 세계 4대 강국이 밀집된 주변 정세가 놓여져 있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경제대국이 되고 강대국으로 올라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당면과제이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가려면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수립한 전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외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경륜을 축적해 나가면 우리는 국내외적인 난관과 위기를 기필코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전략이 없는 국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광된 미래, 강력한 국가는 국가전략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노력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부여받은 사명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지상과제일 것이다.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일본제국주의에 관한 책들과 사이트를 방문하여 조사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지금까지는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과거였지만 레포트를 준비하는동안 이제 세계화에 발맞추어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지난 과거의 상처에 고통스러워하거나 일본에 대한 분노와 반성요구로 일관하던 자세에서 이제 벗어나 세계속의 한국등 현재의 모습을 다시 재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일제의 치욕에서 벗어나 일제치하를 역사의 한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 같다. 다만 기억은 하되 과거의 굴레에 매여있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리라고 본다.
당시 중국은 내란에 휘말려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이런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한대륙 지역을 둘러싼 주장과 이익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적어도, 그땅에 생활 터전을 일군 2백만 명이 훨씬 넘었던 우리 한겨레의 안전보장이나 주권확립 조치도 전혀 마련해 주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남겨 두고 성급하게 철수하여 한반도로 돌아온 과오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는 주권정부로서 통치역량을 쌓지 못했고 외교력 강화에도 실패했다. 실질적으로 정부를 대표하지 못하여 동맹국에 의해 자신의 군대, 광복군이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귀환할 때도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하는 치욕을 겪었다. 또한, 본국으로 돌아와서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조국의 재건에서조차 배제되는 냉대를 받았다. 미국·소련 등이 우리 영토 안에서 '자의적인 신질서'를 구축하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 우리 주권과 영토를 회복함은 물론 일본에 대한 전쟁보상이나 향후 전쟁방지를 위한 장치 마련에 관한 우리의 입장과 주장을 명백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해내지 못함으로써 국토가 38선으로 분할됐고 미·소군이 주둔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45년 8월, 20여만 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밀려왔고, 9월에는 미국이 소련의 38선 월경에 항의하면서 인천으로 상륙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그대신 소련·미국이라는 외세가 한반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부실로 민족의 장래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남북분단이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와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강점 당한 나라의 운명이 으레 그러하듯, 이 시기에 한민족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한겨레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대일 투쟁을 처절히 벌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했으며 1919년에는 전 민족이 들고일어나 3·1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3·1운동은 청년과 학생, 그리고 동학 등의 종교세력이 주도하여, 태극기아래 가장 광범위하고 일체감 있게 퍼져 나간 큰 물결이었다. 3·1운동의 열기는 민족의 이성과 의지를 일깨우면서 독립운동이라는 구체적이고 조직화된 활동을 가져왔다.
또한, 한반도는 일제통치의 억압을 받는 땅으로 전락해버렸지만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한대륙이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어 다시 우리 겨레의 역사의 장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웅혼을 떨쳤던 역사의 땅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 의지를 관철하는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17일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존속하면서 전체를 관할하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가장 큰 줄기를 주도했다.
6.결론
어떻게 하면 우리 의지를 활짝 펴고 살며 국제질서나 강국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우리만 안전하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도발을 하지 않더라도 전쟁 상대국이 되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전쟁 상대국이 되어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힘을 기르고 전략을 수립해 놓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얼마전처럼 약하지도 않으며, 패배와 어둠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시점이니 만큼 실패한 독립운동사를 되씹으며 어두웠던 날의 상념으로 세월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당시의 유물·유적을 전시하는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등 치욕의 35년을 복원하는 데 열을 쏟는 한편, 가장 최근사라서 고증이 손쉽다는 편리성에 만족하여 이 시절의 역사에 몰두하고 있다. 어두운 역사에 매달리는 일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때의 아픔만이 되살아날 뿐이다. 심리적인 무력감과 대외적인 좌절감만 확인되고 희망적인 진실과 교훈을 찾기가 어렵다.
특히, 중국·일본·미국 등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외교정책과 승세로 이어가는 전략적인 지혜를 얻을 길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의 존재상의 의의나 민족의 기개를 되살리자는 차원에서는 모르지만, 국가전략의 차원에서는 이 시절에 별다른 의의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눈앞에는 힘과 이익의 원칙에 따라 격동하는 국제현실이 있고, 세계 4대 강국이 밀집된 주변 정세가 놓여져 있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경제대국이 되고 강대국으로 올라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당면과제이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가려면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수립한 전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외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경륜을 축적해 나가면 우리는 국내외적인 난관과 위기를 기필코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전략이 없는 국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광된 미래, 강력한 국가는 국가전략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노력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부여받은 사명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지상과제일 것이다.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일본제국주의에 관한 책들과 사이트를 방문하여 조사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지금까지는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과거였지만 레포트를 준비하는동안 이제 세계화에 발맞추어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지난 과거의 상처에 고통스러워하거나 일본에 대한 분노와 반성요구로 일관하던 자세에서 이제 벗어나 세계속의 한국등 현재의 모습을 다시 재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일제의 치욕에서 벗어나 일제치하를 역사의 한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 같다. 다만 기억은 하되 과거의 굴레에 매여있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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