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혁명의 과제와 구조적 제약
2. 소비에트 체제의 확립과 공업화의 모색(1917~1928년)
1) 혁명 직후의 개혁과 독일과의 강화
2) 내전과 전시(戰時) 공산주의
3) 신경제정책
3. 사회주의 토대의 건설과 시련
―공업화, 대조국전쟁, 냉전(1928~1953년)
1)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2) 대조국전쟁
3) 냉전
4. 사회주의 희망과 좌절(1953~1991년)
5. 맺는 말
2. 소비에트 체제의 확립과 공업화의 모색(1917~1928년)
1) 혁명 직후의 개혁과 독일과의 강화
2) 내전과 전시(戰時) 공산주의
3) 신경제정책
3. 사회주의 토대의 건설과 시련
―공업화, 대조국전쟁, 냉전(1928~1953년)
1)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2) 대조국전쟁
3) 냉전
4. 사회주의 희망과 좌절(1953~1991년)
5. 맺는 말
본문내용
는 존재로 변해갔으며, 공장의 경영권도 점차 국가 관리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런 경향은 내전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내전은 러시아의 정당체계와 국가기구의 역할, 나아가 볼셰비키 당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등 야당의 활동은 상황의 논리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소비에트나 중앙집행위원회도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갔다. 둘째, 국가생활의 모든 면에서 공산당이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원들은 점차 노동현장에서 이탈하여 공장위원회, 노조, 각급 소비에트, 전임 당료, 체카, 적군, 각급 국가기구의 관료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22년에는 당원의 2/3가 각종 행정직에 취임한 상태가 됨으로써 공산당은 대중 조직에서 관리자 조직으로 변모했다. 셋째, 이런 변화의 결과로 각급 당조직은 해당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고 이에 따라 당은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넷째, 당내 민주주의도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이렇게 공산당으로 권력 집중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시공산주의를 강행하자 체제에 대한 인민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은 내전 말기에 이르면서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02년 가을에 농민들은 파종량을 줄였고 같은 해의 수확은 전전의 60% 수중에 머물렀으며,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도시에서도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고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921년 초에는 마침내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이 노동자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내전기를 통해 경제가 황폐화되는 가운데 국가기구에 흡수된 노동계급의 전위는 노동계급의 대중과 유리되고,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와 농민의 사회주의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심각한 체제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위한 전시공산주의 정책에서 물러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신경제정책
1921년 3월에 열린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레닌은 네프, 곧 신경제정책을 제안하여 승인을 얻었다. 네프의 목표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 아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제는 철저한 계획의 바탕에서 운용되던 전시공산주의로부터 시장 기제에 상당히 의존하는 등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는 혼합경제로 전환되었다. 농업부문에서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었고, 사적 소매에 대한 제한이 철폐되어 농민은 잉여 곡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업부문에서도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 내지 대여되었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 가격, 임금의 결정 등은 시장원리에 따르도록 되었다. 네프가 시행되자 경제적 활기가 되살아나고 1921년 초의 폭발적인 정치적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네프에 힘입어 러시아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경제의 활력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네프의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정치면에서의 노동자들의 공산당 지지가 크게 떨어지고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이 뚜렷해졌다. 또 네프의 성공으로 인한 정치적 다원주의의 가능성과 이에 따른 반혁명 조직의 대두 우려로 공산당으로서는 야당이나 당내 분파에 대해 양보할 여지가 거의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잔존세력의 저항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자 정부는 이 두 당을 제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국가가 되었다.
이미 내전기에 보이던 공산당 당내 민주주의의 쇠퇴 경향은 이런 배경 속에서 네프기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양상은 노멘클라투라를 매개로 한 서기국의 부상이었다. 서기국이 노멘클라투라를 기반으로 전국의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자 당료의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달리게 되고, 이런 관계는 당 대회와 당 중앙위, 심지어 정치국의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당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서기국인데 바로 서기국이 이런 작업을 주로 수행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그러한 투쟁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서기국의 권력만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실력자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당 총서기 스탈린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1920년대 중반의 정치국내 권력투쟁이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쟁점은 공업화 문제였고 그 밑바탕에는 네프에 대한 입장차이가 깔려 있었다. 공산당은 네프기의 전전 공업수준 회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네프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 작업은 없었지만 1920년대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네프에 대한 입장을 둘러싼 경제논쟁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좌익반대파는 현행 네프를 강력히 비판했고, 이들의 노선은 트로츠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10월혁명과 내전기 때 크게 기여한 인물로서 뛰어난 웅변가이자 이론가였으며,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던 트로츠키에 대한 원로 볼셰비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에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등 삼두의 반트로츠키 동맹이 성립했다. 이들은 좌익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했다. 트로츠키는 행정력을 이용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결국 삼두에 밀려 1925년 1월에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당내의 좌파가 숙청되자 스탈린과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네프 파에서도 내분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미 1926년에 중공업 투자를 위한 상당히 야심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스탈린 조차 늦어도 1926년까지는 극적인 공업화 계획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좌익이 사라지자 급속한 공업화의 요구를 표면화한 스탈린 파와 여전히 노농동맹을 고수한 부하린 파의 노선 대립은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급속한 공업화의 폐해는 이미 1927~1928년 겨울에 나타났고 노농동맹의 원칙이 훼손될 위험이 나타났다. 이에 대한 부하린, 인민위원회의 의장인
내전은 러시아의 정당체계와 국가기구의 역할, 나아가 볼셰비키 당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등 야당의 활동은 상황의 논리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소비에트나 중앙집행위원회도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갔다. 둘째, 국가생활의 모든 면에서 공산당이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원들은 점차 노동현장에서 이탈하여 공장위원회, 노조, 각급 소비에트, 전임 당료, 체카, 적군, 각급 국가기구의 관료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22년에는 당원의 2/3가 각종 행정직에 취임한 상태가 됨으로써 공산당은 대중 조직에서 관리자 조직으로 변모했다. 셋째, 이런 변화의 결과로 각급 당조직은 해당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고 이에 따라 당은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넷째, 당내 민주주의도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이렇게 공산당으로 권력 집중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시공산주의를 강행하자 체제에 대한 인민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은 내전 말기에 이르면서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02년 가을에 농민들은 파종량을 줄였고 같은 해의 수확은 전전의 60% 수중에 머물렀으며,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도시에서도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고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921년 초에는 마침내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이 노동자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내전기를 통해 경제가 황폐화되는 가운데 국가기구에 흡수된 노동계급의 전위는 노동계급의 대중과 유리되고,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와 농민의 사회주의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심각한 체제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위한 전시공산주의 정책에서 물러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신경제정책
1921년 3월에 열린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레닌은 네프, 곧 신경제정책을 제안하여 승인을 얻었다. 네프의 목표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 아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제는 철저한 계획의 바탕에서 운용되던 전시공산주의로부터 시장 기제에 상당히 의존하는 등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는 혼합경제로 전환되었다. 농업부문에서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었고, 사적 소매에 대한 제한이 철폐되어 농민은 잉여 곡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업부문에서도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 내지 대여되었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 가격, 임금의 결정 등은 시장원리에 따르도록 되었다. 네프가 시행되자 경제적 활기가 되살아나고 1921년 초의 폭발적인 정치적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네프에 힘입어 러시아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경제의 활력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네프의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정치면에서의 노동자들의 공산당 지지가 크게 떨어지고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이 뚜렷해졌다. 또 네프의 성공으로 인한 정치적 다원주의의 가능성과 이에 따른 반혁명 조직의 대두 우려로 공산당으로서는 야당이나 당내 분파에 대해 양보할 여지가 거의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잔존세력의 저항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자 정부는 이 두 당을 제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국가가 되었다.
이미 내전기에 보이던 공산당 당내 민주주의의 쇠퇴 경향은 이런 배경 속에서 네프기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양상은 노멘클라투라를 매개로 한 서기국의 부상이었다. 서기국이 노멘클라투라를 기반으로 전국의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자 당료의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달리게 되고, 이런 관계는 당 대회와 당 중앙위, 심지어 정치국의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당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서기국인데 바로 서기국이 이런 작업을 주로 수행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그러한 투쟁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서기국의 권력만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실력자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당 총서기 스탈린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1920년대 중반의 정치국내 권력투쟁이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쟁점은 공업화 문제였고 그 밑바탕에는 네프에 대한 입장차이가 깔려 있었다. 공산당은 네프기의 전전 공업수준 회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네프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 작업은 없었지만 1920년대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네프에 대한 입장을 둘러싼 경제논쟁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좌익반대파는 현행 네프를 강력히 비판했고, 이들의 노선은 트로츠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10월혁명과 내전기 때 크게 기여한 인물로서 뛰어난 웅변가이자 이론가였으며,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던 트로츠키에 대한 원로 볼셰비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에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등 삼두의 반트로츠키 동맹이 성립했다. 이들은 좌익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했다. 트로츠키는 행정력을 이용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결국 삼두에 밀려 1925년 1월에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당내의 좌파가 숙청되자 스탈린과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네프 파에서도 내분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미 1926년에 중공업 투자를 위한 상당히 야심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스탈린 조차 늦어도 1926년까지는 극적인 공업화 계획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좌익이 사라지자 급속한 공업화의 요구를 표면화한 스탈린 파와 여전히 노농동맹을 고수한 부하린 파의 노선 대립은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급속한 공업화의 폐해는 이미 1927~1928년 겨울에 나타났고 노농동맹의 원칙이 훼손될 위험이 나타났다. 이에 대한 부하린, 인민위원회의 의장인
추천자료
[현대음악사]한국록의 시작과 배경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정책과 내전 -소련.중국.북한 비교연구
세계체제론;소련식 사회주의의 붕괴
1920년대의 현실반영의 시작, 신경향주의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
[냉전시대][냉전시대 기원][한반도냉전시대 시작][한국전쟁][한반도냉전시대 전개][한반도냉...
이기고 시작하라를 읽고 - 변하지않는 처세와 협상의 성공법칙
독일의 붕괴와 구소련의 몰락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독후감 감상문 서평 요약 줄거리 주현성!!!
[독후감]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 _ 주현성 저
옐친의 등장과 구소련의 붕괴
일본열도의 시작 [일본열도의 형성][구석기 시대][구석기 시대 생활모습][죠몬 문화 탄생]
서양현대사,발트 3국의 독립,평화적 독립운동,독립운동의 전개와 독립쟁취,소련의 발트3국 합...
식민주의역사관(식민주의사관, 식민사관)의 의미, 내용, 식민주의역사관(식민주의사관, 식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