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북한의 일제식민지 유제처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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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한과 북한의 일제식민지 유제처리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언

Ⅱ.식민지유재처리과정 _ 토지개혁
1. 미군정기의 토지개혁
2.이승만정권하의 토지개혁
1).토지개혁의 발단
2). 토지개혁의 경과
3).토지개혁의 의도
4).토지개혁의 결과
3.북한의 토지개혁
1)북한 토지개혁
2) 북한 토지개혁의 내용의 배경
3)토지개혁의 결과

Ⅲ.식민지유재처리과정 _ 귀속기업처리
1. 미군정기의 귀속기업처리과정
2. 이승만정권의 귀속기업처리
1)귀속기업처리 내용
2)귀속기업처리의 결과
3.북한의 귀속기업처리

Ⅳ.식민지유재처리과정 _ 친일파 처리
1.미군정기의 친일파 처리
2.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처리
1) 친일파 처리의 배경
2)친일파 처리 과정
3. 북한의 친일파 청산
1) 북한의 친일파청산 과정
2) 친일파 청산의 근거
3) 친일파 처리 결과

Ⅴ.맺음말

본문내용

고, 1948년 10월 반민특위가 조직되었다. 위원장에 김상덕, 부위원장에 김상돈이 선임되었는데, 김상덕은 한독당 계열로 일제하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지만, 김상돈은 일제 때 마포에서 지금의 통반장에 해당하는 총대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친일행위로 지목되어 반민특위가 곤경에 처하기도 했었다. 김상돈이 부위원장이었다는 것은 아무튼 반민특위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반민특위 외에도 기타 친일파 검거와 재판을 위한 특별기구들이 구성되었다.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특별검찰부, 중앙사무국 등이 설치되었고, 친일파를 검거하기 위한 40명의 특경대도 조직되었다. 반민특위는 3개월간의 예비조사를 통해서 7,000여 명에 달하는 친일파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일람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자료를 포함하여 당시 반민특위가 조사한 자료는,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면서 모두 탈취해갔기 때문에 현재 확인할 수 없는데, 7,000여 명이라면 각 분야에서 활동한 주요한 친일파들을 거의 망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준비작업 끝에 1949년 1월 8일 화신재벌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작업에 들어갔다. 1949년 8월 31일 반민특위가 해체되기까지 모두 305명을 체포하였는데, 그 주요 검거자들은 이러하다.
우선 일제하 귀족 작위를 받은 박중양, 이풍한, 이지용 등과 친일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병상, 방의석, 김갑순, 김연수, 최린, 이성근, 김태석 등이 체포되었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로 중추원 참의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자작 이지용은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5촌 조카이다. 조병상은 일제 말기 ‘황민화정책’을 가속화하기 위해 조직한 경방단 단장이었고, 북선교통회사 사장 방의석과 공주 갑부 김갑순은 비행기를 헌납하였고,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동생이자 경성방직 사장인 김연수는 만주국 경성 주재 명예 총영사를 지낸 친일파 기업인이었다. 이들 김씨 집안은 한국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특히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김연수는 검찰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순순히 시인하고 속죄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된 김연수는 공판이 끝나자 그날로 석방되었고 반민특위 재판부는 그에 대해 재산 일부의 몰수와 공민권 정지라는 이례적인 판결을 내렸다. 흥미있는 것은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보도에 극히 인색하였던 <동아일보>는 이때 호외까지 발행하여 김연수의 석방을 보도하였다. 일제하 삼일운동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개량주의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최린은 잘 알려져 있듯이 1930년대에 들어가면서 친일파의 영수로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성근과 김태석은 친일경찰 출신으로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자들로, 이성근은 삼일운동 당시 평북 고등과장을 지내며 악명을 떨쳤고, 그 공으로 충남 도지사를 지냈다. 반민법 해당자로서 가장 악질로 꼽힌 김태석은 강우규 의사를 체포해서 유명해진 자로,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의 죄를 계속 부인하여 재판부와 검찰을 가장 애먹였다고 한다. 무기형을 받았으나 한국전쟁 직전 석방되었다.
다음 ‘황민화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층 인사, 지식인, 문인, 종교인들로서 최남선, 이광수, 이승우, 김동환, 이성환, 정인과, 양주삼 등이 그들이었다. 거침없는 문필가로서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최남선과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것은 한국근대사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정신’으로 치장된 그들의 패배적 민족주의, 민족개량주의의 귀결점이 어디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교훈이었다. 최남선은 이제하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를 지내며 일제의 총동원체제에 협력하였고, ‘민족개조론’을 통해 이미 1920년대부터 일제와의 타협논리를 공공연하게 주장한 바 있는 이광수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그야말로 독보적인 ‘황국신민’이었다. 체포된 뒤 최남선은 눈물로 속죄하고, 형무소에서 <자열서>라는 참회록을 쓰기도 했는데, 이에 반해 이광수는 계속 변명하며 자신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하여 재판부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승우는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유명한 친일 변호사였고, 시인인 김동환은 임전보국단을 만드는 산파역할을 하였고, 박영희 등과 함께 학병 권유에 광분한 대표적인 매국문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성환은 천도교 계열의 농민지도자로 조선농민사운동을 주도한 인물인데, 이후 임전보국단 간부, 국민동원총진회 간부로 활동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리고 정인과와 양주삼 등은 목사로서 역시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황민화운동’에 앞장선 인물들이다.
경제계의 인물로는 주로 비행기 헌납을 주도한 자들인데, 앞에서 언급한 김연수, 방의석, 김갑순 외에도 화신재벌 박흥식, 문명기 그리고 항공재벌 신용욱 등이 체포되었다. 또한 총독부 경찰 출신으로는 앞에서 말한 이성근, 김태석 외에 노덕술, 김덕기, 이원보, 하판락, 최연 등이 검거되었다. 노덕술은 해방 후 경찰의 핵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여러 테러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일시 수사과장직을 내놓고 경찰의 보호하에 피해 다니다가 특경대에 체포된다. 체포 당시 4명의 경관이 그를 호위하고 있어 정치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김덕기는 이성근의 직계 부하로서 일제하 1,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악명을 떨친 자였다. 반민특위 재판정에 오른 인물 중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역시 한국전쟁 직전에 감형되어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외 특별한 인물로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1920, 1930년대 만주와 국내에서 밀정 노릇을 하였던 배정자도 체포되어 재판정에 섰다.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이 일자 친일파들 중에는 박춘금과 같이 일본으로 도피하거나 악질경찰 출신인 전봉덕과 같이 헌병대에 들어가 군의 보호 아래 검거를 피한 자들도 있었다. 당시 군부 내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한 이승만정권의 각종 방해와 와해 공작도 본격화하였다. 특히 이승만이 노덕술 체포를 계기로 반민법과 특위활동에 대한 비난과 중지협박을 강화하자 이승만과 반민특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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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02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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