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 역사적 아방가드르 서양 미술사의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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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다이즘 역사적 아방가드르 서양 미술사의 이단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역사적 아방가드르-다다와 네오다다

2. 서양 미술사의 이단아, 다다이스트

3. 마르셀 뒤샹(1887-1968)

본문내용

되고, 그와 후고 발은 저녁에 볼테르 무대에서 상연할 댄서의 공연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우연히 사전을 뒤지다가 ‘다다’라는 단어를 발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어느 카페의 종업원이 매일 밤마다 모여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실험 예술가들을 두고 “저 친구들 말 중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다다’거리는 소리밖에 없다”고 한데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다다’라는 절묘한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가에 대해 또 다른 견해도 있다.
한스 아르프는 1921년에 쓴 <야외에서의 다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트리스탄 차라가 1916년 2월에 다다라는 말을 찾아냈다고 단언한다. 차라가 최초로 그 이름을 발설했을 때 나는 1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 명칭은 우리를 흥분시켰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다다란 말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자마자 취리히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 단어에 매력을 느끼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1917년 한 해에 이 ‘다다이즘’에 입문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칸딘스키(W.Kandinsky), 클레(P.Klee), 파이닝거(Feininger), 에른스트(M.Ernst), 모딜리아니(Modigliani) 등 이미 자기 세계를 갖춘 예술가들도 이 그룹을 기웃거렸다. 다다의 혁신적 예술활동은 1차 대전으로 얼룩진 유럽 보수사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과 조소가 섞인 의미있는 행동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도 1차대전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몰려든 수많은 이민 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기회균등의 나라’ 미국에서 차츰 정착하게 된 이들은 전쟁이 끝나도 귀국하기는커녕 아예 눌러 앉아 미국 시민이 되었다. 물론 함께 떠밀려온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뉴욕에 있던 전위 예술가들의 단체, 예술 후원자, 세계적인 살롱, 현대적인 잡지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뉴욕의 분위기는 같은 시기에 취리히를 지배했던 그 팽팽하고 전투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지만 반항적이고 우상파괴의 정신에서만은 일치했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이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실험적 경향을 하나로 묶었으며 이를 뉴욕에서의 다다운동으로 차차 정립시켰다.
뒤샹은 뉴욕 앙데팡당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후원하는 자유주의를 실험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만의 충격적인 작품을 제시하려는 충동에서 앙데팡당 전시회에 리차드 무트(Richard Mutt)라는 가명으로 이색적인 조각 작품을 출품했다.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이 전위적인 전시회에 뒤샹은 현대 미술사에 남을만한 충격적인 작품을 제시한 것이다.
「샘」이라는 제목이 붙은 변기가 그것이었다. 그것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료들을 보고 뒤샹은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직관에 따라 선택된 일상적인 기성 제품을 그는 ‘레디 메이드’라고 말한다.
그러면 뒤샹의 예술행위(즉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예술작품으로 내놓는 행위)의 역사적 진가는 무엇인가? 물론 그 자신이, 그 같은 행위들이 기존 예술 패러다임의 문화양식에 젖은 예술세계의 기존 예술세대를 향한 반항의 제스처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역시 뒤샹의 다다적 행위는 이미 기술한 바 있는 현대화-합리화의 과정에서, 예술문화의 전통 패러다임의 붕괴가 일어나는 심각한 위기(paradigm crisis)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대응의 방법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중 하나는 ‘Modernist Movement\'라는 지칭 하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뒤샹의 다다 행위가 대변하는 ’역사적 아방가드르‘ 운동인데, 그 저 변에 흐르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기존 전통양식의 이디엄(idioms)을 사용해서는 더 이상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예술양식, 새로운 언어가 부재할 때, 그 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非 기존양식의 작품을 창출해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참고 ) 다다이스트들이 남긴 유명한 말들
→뒤샹: \"나는 변기를 들어 현대 미술의 면상에 집어 던졌다.\"
→차라:\"다다 는 체계에 반대한다. 체계 없는 체계이다. 그리고 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리히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들은 자연히 미지의 세계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르프: \"아카데믹한 회화는 자연과 인생을 기만하고 있다.\"
1918년에 뒤샹은 일시적으로 레디 메이드에서 손을 떼고 여행에 나섰다가 1919년 7월에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다다이스트들과 교우를 갖기 시작한다. 1920년 2월 파리에서 선풍적인 성공을 거둔 다다그룹, 그 중에서도 뒤샹과 만 레이, 스티 클리츠 등은 뉴욕으로 돌아가 공식 기관지 《뉴욕 다다》를 출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다운동의 핵심이자 이 말의 저작권자인 차라에게 등록상표 ‘다다’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서 작업에 들어간다. 뒤샹은 1921년에 차라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괜찮은 수입을 가져다줄지 모르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다(DADA)라는 네 글자를 조그마한 쇠사슬로 주조하거나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 길지 않은 3페이지 가량의 팸플릿을 전 세계의 언어로 만들어 다다의 덕목을 열거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1달러에 상당하는 돈이면 배지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배지를 사는 행위가 그 구매자로 하여금 다다의 칭호를 받게 할 것입니다.
3. 마르셀 뒤샹(1887-1968)
프랑스 화가. 1887년 외르 지방의 블랭빌-크레봉에서 태어나,1955년에 미국으로 귀화,1968년 뇌이이-쉬르-센느에서 사망했다.
미술사를 예술가들의 생애의 역사로 이해한 바사리의 시대, 실제로 뒤샹의 예술작품은 초기 몇 점만 빼고는 자기 손으로 한게 거의 없고 누구 말대로 그걸 미적으로 감상하려고 애 쓰는 건 별 의미가 없으므로 그가 했다는말, 의미심장한 갖가지 제스처들, 그와 친분이 있던 여러 사람의 회상과 이론가들의 기상천외한 해석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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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13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9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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