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죽음문화 - 할복,자살,장례문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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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죽음문화 - 할복,자살,장례문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할복
ⅰ 일본의 독특한 자결문화 - 할복
ⅱ 할복의 유래
ⅲ 할복의 시대적 변화
ⅳ 현대의 일본 및 한국의 대표적 할복 사례
ⅴ 맺음 말

Ⅱ 일본인의 여러 가지 죽음
ⅰ 주제선정 동기
ⅱ 신쥬 (心中,しんじゅ )
ⅲ 자살

Ⅲ 일본의 장례 문화
ⅰ 일본의 장례
ⅱ 일본 장례식의 절차와 의례, 격식
ⅲ 일본 장례의 예절
ⅳ 일본 장례식의 순서
ⅴ 일본의 장례식과 한국의 장례식의 차이와 특징
ⅵ 한․일 영화를 통한 장례문화 비교

Ⅴ 참고자료

본문내용

시하고 있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할복자는 후지와라 야스노리이며 『속고사담』에 의하면 그는 989년 당시 귀족 출신의 사나이였다. 그는 낮에는 귀족의 생활을 했지만, 밤이 되면 도적질을 통해 권세가들의 재산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이중성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동료의 배반으로 인해 관군에게 체포되기 직전 할복하여 창자를 끄집어 내어 관군에게 집어 던졌다고 한다.
2) 중세의 할복 (1192년~1603년)
본격적으로 할복문화가 널리 행해지던 시기로, 이때부터 전쟁에서 패한 진영의 사무라이들의 집단 할복이 일반화 되었으며 이외에도 주군의 그릇된 행위를 보고 신하로서 충직하게 간하고 죽는 방법으로서의 할복도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패장이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표로 할복하는 방식도 생겨났으며, 이 시대부터 할복은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가장 영예로운 죽음의 방법이 되었다.
할복의 방식에 있어서도 고대의 할복과는 다르게 “가이샤쿠” 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가이샤쿠는 할복자가 배를 가르면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옆에서 목을 쳐주는 것을 말한다.
목을 쳐주는 역할을 맡았던 가이샤쿠는 할복자와 절친한 관계에 있던 자가 맡았던 것이 특징이며 한번에 목을 쳐내기 위한 뛰어난 검술 실력도 있어야 했다고 한다.
중세 할복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더 이상 할복을 한 이후 내장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내장을 드러내는 행위를 집행자에 대한 반발의 의사표시로 여겼기 때문이다.
3) 근.현대의 할복
중세 이후 서구문명의 유입과 함께 할복자들의 수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할복문화는 근근히 이어져 내려고 있다. 근대 이후의 대표적인 할복자로는 명치 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할복자결 한 노기 마레스케(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육군대장 역임) , 2차 대전에서 패한 이후 할복자결 한 아나미 고레치카(당시 육군대신)를 들 수 있다. 아나미는 단도로 배를 가르고 다시 목구멍을 찔렀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두 시간 가까이 고통에 신음하다가 의식을 잃을 무렵 가이샤쿠를 통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70년대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이후 최근까지 이렇다 할 할복사건은 없다. 즉 일본의 할복문화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 있는 것이다.
ⅳ 현대의 일본 및 한국의 대표적 할복 사례
일본의 경우는 할복문화의 원산지로서 할복자결로 죽은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오랜기간 할복문화의 성행으로 인해 각 성에는 할복을 위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져 있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그 예로 1346년에 짓기 시작했다는 히메지성의 한쪽 구석에는 외부와 차단된 작은 공간이 있으며, 그 곳이 바로 할복장소였다는 말이 있다.
일본 최근의 대표적인 할복사건으로는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을 들 수 있다.
1970년 11월 25일 추종자 4명과 사령관실에 난입한 미시마는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집합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1000여명의 자위대원을 향해 전쟁 전 일본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도쿄의 육상 자위대 동부 지부 2층 발코니에서 “지금 일본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들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나를 따를 사람은 없는가.” “다 함께 궐기하자” 등을 외쳐댔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위대원들의 야유뿐이었다. 이에 미시마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는 사령관실로 들어가 윗옷을 벗고 단도를 끄집어내어 복부를 찔렀으며 그 옆에 있던 심복인 모리다가 미시마의 목을 쳤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할복 당시 가이샤쿠 역할을 했던 모리다의 검술실력이 좋지 못해서 세 번에 걸쳐 미시마의 목을 쳐내어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이후 민주화 운동을 통해 몇몇 할복사건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67년 6월 8일 부정선거규탄시위 중 시위자가 할복을 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
75년 4월 11일에는 박정희정권의 유신헌법에 대한 시국성토대회 중 연사로 나온 서울 농대 김상진의 할복사건이 있었다. 세 번째 연사로 단상에 올라온 김상진은 ....
\".....(전략)......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라는 연설을 끝으로 20cm의 과도를 꺼내어 왼쪽 하복부를 찌른 뒤 위로 그어올렸고 즉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다음 날 숨졌다고 한다.
또한 2003년 9월 11에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한농연) 이경해 회장이 할복하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이경해씨의 할복자살에 대해 영국 BBC방송은 “이 전 회장이 농업개방에 반대하며 자살했으며, 이씨의 동료는 그의 죽음이 WTO 정책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려는 ‘희생적 행동’이라고 말했다”고 방송했고. 독일 공영 ADR방송은 “한국의 반세계화 운동가가 WTO를 비판하며 현지에서 자살해 이번 회의에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 전 회장을 ‘순교자’로 표현하며 그의 일대기를 취재했으며, 인도 언론은 “농민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갔다”고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북풍사건으로 조사받던 전 안기부장 권영해씨가 복부 상하에 길이 30-25-20cm 세 곳에 깊이 4-5cm에 이르는 할복을 시도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지난 달 15일 독도 관련 항의시위도중 일본대사관앞에서 홍적식 활빈단 대표가 셔츠안에 미리 보호구를 준비해두고 할복 쇼(?)를 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할복퍼포먼스는 숙연하고 진지한 시위를 오히려 희화화 시키고 가볍게 만들어버렸다는 비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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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8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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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4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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