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과 박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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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철과 박인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송강 정철
1) 송강 정철의 생애
2) 문학세계
가. 한과 연모의 시가
① 정한, 자탄의 시가
② 연군지정의 시가
③ 교우지정의 시가
나. 풍류의 시가
① 취흥의 시가
② 상자연의 시가
2. 노계 박인로
1) 노계 박인로의 생애
2) 박인로의 <누항사陋巷詞>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시작이었다.
―선조11(1578)년 정월에 조정으로 나왔다가 동인의 거두 이발과의 불화로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 낙향했다.
―선조13(1580)년 정월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外職)으로 나갔다. 이 때 관동 가경(佳景)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시주(詩酒)를 즐김과 동시에 선정을 베풀 었는데 〈관동별곡〉과〈훈민가〉가 지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 1 년만에 노수신의 비답(批答)으로 8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창평으로 내려갔다. 그 해 12 월에 다시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이듬 해 9월에 승정원도승지 겸 예 문관대제학, 12월에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다음 해 3월에 예조참판, 6월에 형조판 서, 8월에 예조판서, 그 다음 해(1584) 49세 되던 해 8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선조18(1585)년 다시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논척을 받아 부득이 조정에서 물러나 와 고양(高陽)에 와있다가 창평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부터 4년 동안은 비록 정치적으 로는 불우하였지만 작가로서의 생활은 절정기였다. 자연미에 마음껏 몰입하여 감정을 시상으로 승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국에 대한 개탄속에서 더욱 진한 전율로 느 껴오는 연군지정에 온 몸을 작품 속에 녹였다. 그의 작품 중에 적지않은 양이 이 시기 에 지어졌고, 〈사미인곡〉〈속미인곡〉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넷째아들 인 기암이 택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선조20∼21년에 대점(현재, 전남 담양군 고서 면 고읍리)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23(1590)년에 다시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2월 건저문제(建儲問題)로 동인 의 무고와 양사(兩司)의 논계(論啓)를 입어 파직 당하고 진주로 유배되었다가 강계로 유배지를 옮겼다.
―선조25(1592)년 임진왜란이 돌발하자 석방되었는데 왕이 부르는 분부를 받고는 통 곡하고서 왕의 행재(行在)를 뒤쫓아 왕가(王駕)를 모셨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왜군이 물러가고 더 이상 출사의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가 논란이 일어나 그를 공박할 구실로 삼으려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강화 송강촌으로 물러나와 지 내다가 빈한과 회한 속에서 이 해(선조26,1593) 12월18일에 다사다난했던 생의 막을 내리니 향년 58세였다.
숙종10년(1684)에 시호를 문청(文淸)이라 내렸고 남긴 저서로는 〈송강집〉7책과 〈가 사〉1책이 전하고 있고, 후손과 그 측근자들이 비장하였던 〈송강집 습유〉및〈습유 부 록〉이 전하고 있다.
2) 문학 세계
송강 정철의 문학 세계는 당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사우(師友)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강은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15세까지는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16세 되던해 부친의 귀양살이가 풀려, 부친을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호남 창평으로 내 려와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27세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 에서 다감한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성산의 기슭아래 우거진 죽총(竹叢), 송강(松江), 창계(蒼溪)의 기석(奇石), 구렁 위의 누정(樓亭), 이른 봄의 설중매, 겨울이 오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명봉산 위의 학의 무리,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그의 뇌리에 깊게 인상지어져 <성산별곡〉〈전후미인곡〉등의 국문 시가와 수많은 한시 창작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당시에 처한 사회상이 그의 선천적 재능과 어우러져 일찍부터 시심(詩心)이 싹텄고, 여기에 사우의 영향이 더하여져 문학관이 형성되었는데, 한과 연모의 시가와 풍 류의 시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가. 한(恨)과 연모(戀慕)의 시가
① 정한(情恨)·자탄(自歎)의 시가
정이 많기에 한도 많아 한 평생 현실과 자연 사이에서 어느 한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 고 갈등의 모래성만 쌓다가 그것마저 허물어질 때 송강은 자학의 길을 걷게된다.
유령은 언제 사람고 진(晉)적의 고사(高士)로다
계함은 긔 뉘러니 당대의 광생(狂生)이라
두어라 고사광생을 므러 므삼하리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정적 파탄을 맛본 송강의 눈에 비친 현실은 암흑 그 자체였다. 그래서 자신을 \'당대의 광생\'이라고까지 비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 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생무상의 경지까지 도달한다.
일뎡 백년산들 긔아니 초초(草草)한가
초초한 부생(浮生)애 므사일을 하랴하야
내자바 권하난 잔을 덜먹으려 하난다.
한잔 먹새근여 또 한잔 먹새근여
곳것거 수놓고 무진무진 먹새근여
… 중 략 …
누론 해 흰달 가난 비 굴근눈 쇼쇼리바람 불제 뉘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우에 잔납이 파람 불제야 뉘우찬달 엇디리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내가 잡아 권하는 잔을 왜 사양하느냐? 허무한 인생이지마는 죽은 뒤에 후회나 없도 록 술이나 먹자는 것이다.
송강의 정탄(情歎)은 \'인생무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설움 과 한의 껍질로 뒹군다. 변방의 외로운 기러기, 하얀 구렛나루에 묻어나는 그리운 고 향 소식,이별의 고통, 이 모든 것에서 정한과 탄식이 묻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가을다간 변방에 기러기 슬피 우니
가고픈 고향이라 망향대에 올랐구나
은근도하다 시월달 함산 국화는
중양(重陽) 위해 아니피고 길손 위해 피어주네 〈함흥객관대국(咸興客館對菊)〉
가을이 다 지난 쓸쓸한 변방에서 기러기가 슬피 울어 향수에 못이겨 망향대에 올랐더 니 중양절에 피어야 할 국화가 지금에 피어나 나를 반겨준다고 하여 국화와 자연을 동 일시한 자연과의 교감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 속에 비쳐보니 올해도 백발뿐이로다
꿈에는 밤마다 집에 돌아가지 않는 날이 없는데
강마을 오월에 꾀꼬리 소리 들리면
배나무 천 그루 꽃이다지네 <서감(書感)>
늘상 그리워 하면서도 가지 못하고 밤마다 꿈길에서만 밟아보는 고향인데 허무하게 봄은 또 지나가고 거울에 비친 모습은 더욱 초췌해 가기만 하는 서러움이 나타난다
② 연군지정의 시가
송강의 연군지정은 매우 격정적이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묘랄 일이런가 ···
평생애 원하요대 한대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사일로 외오두고 글이난고…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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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8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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