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 서 론
● 본 론
1.시가사의 시대구분
2. 고대시가기
원시종합예술기, 향가의 태동
3. 중세시가기
전기- 향가, 속요시대
후기- 속요, 악장시대
4. 근세시가기
전기- 시조, 가사시대
후기- 잡가, 판소리 시대
5. 현대시가기
창가, 신민요, 신가요시대
● 결 론
● 서 론
● 본 론
1.시가사의 시대구분
2. 고대시가기
원시종합예술기, 향가의 태동
3. 중세시가기
전기- 향가, 속요시대
후기- 속요, 악장시대
4. 근세시가기
전기- 시조, 가사시대
후기- 잡가, 판소리 시대
5. 현대시가기
창가, 신민요, 신가요시대
● 결 론
본문내용
. 근세시가기
전기- 시조, 가사시대
후기- 잡가, 판소리 시대
5. 현대시가기
창가, 신민요, 신가요시대
● 결 론
노래는 그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특히 입과 입을 통해서 전해진 구비문학의 경우는 그 어원으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口碑라는 것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전달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비석에 새겨있는 문구처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고유한 민족정서를 담고 있다. 비석에 새겨 오랜 시간동안 남겨진 구비문학에서는 그 민족의 삶과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시가 時와 歌는 원래는 분리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시와 가를 분리하지 않고 쓰는 것은 일제식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시와 가는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통용되는 용어로서의 시와 가를 함께 붙여 쓰기로 한다.
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에 따른 당시의 보편적인 정서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는 우리민족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 고대, 중세 및 근대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그에 따른 노래의 양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1. 시가사의 시기구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고자한다. 한국 문학사의 시대 구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논의가 복잡하지만 구비문학과 한문학 그리고 국문문학과의 관계와 문학의 갈래를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우선 선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구비문학만 있었다. 그 시기를 고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구비문학의 시기이다. 이 시기 대표적 문학 장르로는 건국 서사시가 있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의 시기에 한문을 받아들이고 5세기 이전에 본격적인 한문학을 이룩하면서, 고대에서 중세로 들어섰다.
중세는 한문학의 시대였다. 중세문학은 한문학의 등장에서 퇴장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문학은 국문문학과 공존했다. 처음에는 한자를 이용한 향찰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한국어를 직접 표기하는 훈민정음을 창안해서 국문문학을 육성했다. 17세기 이후에는 국문문학이 활발하게 창작되어, 한문학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들어섰다. 이 시기는 서사시를 대신해 서정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한시, 향가, 시조, 교술시 등이 생겨났다
한문학이 물러나고 국문문학이 한문학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된 시기의 문학이 근대문학이다. 1894년 갑오경장에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국문을 공용의 글로 삼은 것이 근대문학의 성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소설이 발달하여 서정(抒情), 교술(敎述), 서사(敍事)가 맞서게 되었다. 조동일외 6인 공저 『한국문학강의』(길벗, 1994) P14.5
이상의 대략적 시대구분을 근거로 하여 각 시기를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과 그에 따른 노래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대 시가기
여기서 한민족의 고대 여기서는 역사적 시기구분을 쓰지 않고, 시가사적 시기구분을 사용한다. 여기에서의 고대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까지 포함하여 약 10세기경까지를 고대로 지칭한다. 그러나 원활한 시가의 문학적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원시종합예술기(~3C)와 중.고대시가기(4C~10C)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구조를 취한다.
는 민족의 성립기이며, 국가건국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글이 없어 모든 의사표현은 소리와 행동으로만 표현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모든 문학적 양상들은 그 당시 그려졌던 그림이나 이후에 기록된 문헌들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상은 그들이 향유했던 예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그들의 생존방식은 사냥이나 채집 생활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살았다. 이때 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식량의 확보와 종족의 유지, 번성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은 숭상의 대상이고 위협의 대상이었다. 이런 그들의 삶의 모습은 벽화나 다른 상징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은 자연을 신격화하여 자연을 찬양하고 숭상했다. 그래서 당시 인간들에게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모습이었고 이런 움직임이 주술과 의식으로 나타났다. 이런 주술과 의식의 모습은 오늘날의 예술의 원시적 형태이다. 자연을 찬양하고 기원하는데서 노래, 미술, 무용, 종교 등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이 나왔고 이것은 오늘날처럼 분리되지 않는 미분화종합예술체 미분화종합예술체(“Ballad dance): 흔히 영어로 \'Ballad dance\'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이는 미분화종합예술체를 잘못 이해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Ballad는 음악 장르의 한 종류로 리듬보다 전달하는 내용을 중시하는 음악이며, Dance는 춤이다. 이 음악이나 춤은 미분화종합예술체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직접적인 Ballad나 dance를 지칭하는 용어는 될 수 없다. 미분화종합예술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에 대한 찬양이나 기원을 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동과 거기서 파생할 수 있는 모든 영역, 즉 언어예술과 조형예술, 동작예술로 나타나는 내용의 총제이다.
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예술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추측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물인 ‘소리’로써 그들의 생각을 표출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예술은 오늘날의 간접적인 표현과 다르게 직접적인 표현이 강하며 전달하고자하는 내용도 간결하다. 노래와 가악의 시작인 이 시기에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황조가(黃鳥歌)(A.D17), 구지가(龜旨歌)(A.D42),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 ), 도솔가(兜率歌)(A.D28)가 있다. 이 작품들은 내용에 따라서 공무도하가와 구지가, 그리고 황조가와 도솔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공무도하가와 구지가는 앞서 언급한 원시종합예술의 특징을 보인다. 운문적이며, 의성어나 의태어가 발달하고, 직설적이며 실용적이고 주술적이며 영탄적이다. 이 두 작품은 주술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때의 노래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내려 오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원래 조선(古朝鮮)의 한 나루에서 백발의 狂夫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려 하자 그의 아내가
전기- 시조, 가사시대
후기- 잡가, 판소리 시대
5. 현대시가기
창가, 신민요, 신가요시대
● 결 론
노래는 그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특히 입과 입을 통해서 전해진 구비문학의 경우는 그 어원으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口碑라는 것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전달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비석에 새겨있는 문구처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고유한 민족정서를 담고 있다. 비석에 새겨 오랜 시간동안 남겨진 구비문학에서는 그 민족의 삶과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시가 時와 歌는 원래는 분리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시와 가를 분리하지 않고 쓰는 것은 일제식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시와 가는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통용되는 용어로서의 시와 가를 함께 붙여 쓰기로 한다.
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에 따른 당시의 보편적인 정서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는 우리민족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 고대, 중세 및 근대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그에 따른 노래의 양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1. 시가사의 시기구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고자한다. 한국 문학사의 시대 구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논의가 복잡하지만 구비문학과 한문학 그리고 국문문학과의 관계와 문학의 갈래를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우선 선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구비문학만 있었다. 그 시기를 고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구비문학의 시기이다. 이 시기 대표적 문학 장르로는 건국 서사시가 있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의 시기에 한문을 받아들이고 5세기 이전에 본격적인 한문학을 이룩하면서, 고대에서 중세로 들어섰다.
중세는 한문학의 시대였다. 중세문학은 한문학의 등장에서 퇴장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문학은 국문문학과 공존했다. 처음에는 한자를 이용한 향찰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한국어를 직접 표기하는 훈민정음을 창안해서 국문문학을 육성했다. 17세기 이후에는 국문문학이 활발하게 창작되어, 한문학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들어섰다. 이 시기는 서사시를 대신해 서정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한시, 향가, 시조, 교술시 등이 생겨났다
한문학이 물러나고 국문문학이 한문학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된 시기의 문학이 근대문학이다. 1894년 갑오경장에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국문을 공용의 글로 삼은 것이 근대문학의 성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소설이 발달하여 서정(抒情), 교술(敎述), 서사(敍事)가 맞서게 되었다. 조동일외 6인 공저 『한국문학강의』(길벗, 1994) P14.5
이상의 대략적 시대구분을 근거로 하여 각 시기를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과 그에 따른 노래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대 시가기
여기서 한민족의 고대 여기서는 역사적 시기구분을 쓰지 않고, 시가사적 시기구분을 사용한다. 여기에서의 고대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까지 포함하여 약 10세기경까지를 고대로 지칭한다. 그러나 원활한 시가의 문학적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원시종합예술기(~3C)와 중.고대시가기(4C~10C)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구조를 취한다.
는 민족의 성립기이며, 국가건국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글이 없어 모든 의사표현은 소리와 행동으로만 표현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모든 문학적 양상들은 그 당시 그려졌던 그림이나 이후에 기록된 문헌들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상은 그들이 향유했던 예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그들의 생존방식은 사냥이나 채집 생활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살았다. 이때 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식량의 확보와 종족의 유지, 번성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은 숭상의 대상이고 위협의 대상이었다. 이런 그들의 삶의 모습은 벽화나 다른 상징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은 자연을 신격화하여 자연을 찬양하고 숭상했다. 그래서 당시 인간들에게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모습이었고 이런 움직임이 주술과 의식으로 나타났다. 이런 주술과 의식의 모습은 오늘날의 예술의 원시적 형태이다. 자연을 찬양하고 기원하는데서 노래, 미술, 무용, 종교 등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이 나왔고 이것은 오늘날처럼 분리되지 않는 미분화종합예술체 미분화종합예술체(“Ballad dance): 흔히 영어로 \'Ballad dance\'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이는 미분화종합예술체를 잘못 이해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Ballad는 음악 장르의 한 종류로 리듬보다 전달하는 내용을 중시하는 음악이며, Dance는 춤이다. 이 음악이나 춤은 미분화종합예술체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직접적인 Ballad나 dance를 지칭하는 용어는 될 수 없다. 미분화종합예술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에 대한 찬양이나 기원을 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동과 거기서 파생할 수 있는 모든 영역, 즉 언어예술과 조형예술, 동작예술로 나타나는 내용의 총제이다.
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예술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추측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물인 ‘소리’로써 그들의 생각을 표출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예술은 오늘날의 간접적인 표현과 다르게 직접적인 표현이 강하며 전달하고자하는 내용도 간결하다. 노래와 가악의 시작인 이 시기에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황조가(黃鳥歌)(A.D17), 구지가(龜旨歌)(A.D42),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 ), 도솔가(兜率歌)(A.D28)가 있다. 이 작품들은 내용에 따라서 공무도하가와 구지가, 그리고 황조가와 도솔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공무도하가와 구지가는 앞서 언급한 원시종합예술의 특징을 보인다. 운문적이며, 의성어나 의태어가 발달하고, 직설적이며 실용적이고 주술적이며 영탄적이다. 이 두 작품은 주술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때의 노래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내려 오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원래 조선(古朝鮮)의 한 나루에서 백발의 狂夫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려 하자 그의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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