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 본론.
1. 무사도의 정의.
2. 무사도의 출현배경.
2-1. 무사 계급의 출현.
2-2. 무사 계급이 지배 세력으로서 대두하게 된 배경.
2-3. 무사도의 출현.
2-4. 무사도의 시대적 변화.
3. 무사도의 정신.
3-1. 충
3.2 의 와 의리.
3.3 용기.
3.4 인.
3.5 예.
4. 무사도와 할복의 관계.
5. 무사도 정신의 현대적 의의.
Ⅲ 결론.
Ⅱ 본론.
1. 무사도의 정의.
2. 무사도의 출현배경.
2-1. 무사 계급의 출현.
2-2. 무사 계급이 지배 세력으로서 대두하게 된 배경.
2-3. 무사도의 출현.
2-4. 무사도의 시대적 변화.
3. 무사도의 정신.
3-1. 충
3.2 의 와 의리.
3.3 용기.
3.4 인.
3.5 예.
4. 무사도와 할복의 관계.
5. 무사도 정신의 현대적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베어진 죄인의 머리에 도장을 찍고 오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강한 심성을 기르게 하여 진정한 용기에 다다르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진정한 용기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무르는 법이며 그것이 외부로 표출될 때는 평정, 침착의 형태를 띄게 된다. 진정으로 용감한 자는 항상 침착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고, 어떠한 사물도 그의 정신적 평정을 흐트러뜨릴 수 없어야 한다.
전투의 한가운데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천재지변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죽음의 공포가 다가와도 자제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무사도의 용기란 전장에 나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드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과 그러한 용기를 바탕으로 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난처해하지 않는 마음, 정신적 능력에 항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의 표현이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용기에 관한 일화가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유명한 무사인데, 그가 자객의 창에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자객은 도칸이 시가(詩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도칸의 옆구리에 창을 깊이 찌르고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던졌다.
“생명이 얼마나 아깝겠느냐 지금이야말로 도칸은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는 치명상을 입고서도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응답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라고 일찍이 생각하는 바 아니나 죽음에 다다러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아들이거나 위와 같이 느긋하게 시가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용기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일본 무사도와 흔히 비교되는 사상이나 정신으로 서양의 기사도 정신을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랑도나 선비정신과 비교를 한다. 용기에 관해서는 서양과 우리나라, 일본은 별다른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기사도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었는데, 기사도가 추구하는 덕목은 무용,성실,명예,예의,경건,겸양,약자보호 등이 있다. 기사의 존립조건이기도 한 무용과 성실은 초기에 있어 기사도의 핵심을 이룬 덕목이었다. 한국 화랑도의 이른바 세속오계도 이에 대응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선비정신이란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지조 의식을 말한다. 기사도나 화랑도, 그리고 무사도는 내용면에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용기에 관한 면에서는 모두 비슷하다. 서양의 기사도나 우리나라의 화랑도선비정신, 그리고 일본의 무사도 모두 자신이 섬기는 군주나 왕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용기에 관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무사도의 이러한 용기는 다른 덕목들의 원천이 된다. 자신이나 가문, 또는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기의 생명으로써 주군을 모시는 충의, 그리고 극기의 정신을 실천하고 내면화 하기 위해서 용기는 기본적으로 무사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3.4 인(仁)
‘무사의 인정’이라는 일본어 관용구가 있다. 어찌보면 별 뜻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이 말 안에는 일본 무사도의 고귀한 정신이 담겨져있다. 일본 무사도에 있어서 인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정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예로부터 이 인이라는 덕목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러한 인정으로서의 인은 정의를 전제로 한 것이며 상대방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과 권력을 보유하는 가운데 베풀어진다. 무사는 무력을 보유하고 사용하는 특권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는 약자, 패자, 짓밟힌 자에게 인을 베푸는 것을 참다운 무사의 미덕이라 여겼으며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무사도의 정신인 인은 또한“사냥꾼은 품안에 날아든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격언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의 지배 계급은 무사들이었다. 이러한 지배층으로서의 무사들에게 인은 민심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과거 일본의 봉건제도 하에서 백성들의 생명과 몸을 지키는 역할을 통치자가 수행했고 때문에 통치자의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자칫하면 전제정치로 이어질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는 백성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무단정치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한 상태 아래에서 최악의 전제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강조된 덕목인 바로 인이었다. 이러한 인은 공자나 맹자가 말한 통치자의 덕목으로서의 인(仁)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일본의 봉건군주와 봉신사이에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의무에 대한 의식이 비교적 얇다. 그러나 봉건 군주가 선조나 ‘천(天)’,즉 하늘에 대해 느끼는 책임의식은 매우 강하다. 전통적으로 봉건군주는 하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도록 위임받았다고 인식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있어서 봉건군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있었다. 무사도는 이러한 부권정치를 받아들였고 이를 더욱 공고히 했다. 부권정치는 전제정치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전제정치에서는 인민의 마지못해 하는 복종만을 강요하지만 부권정치에서는 인민의 자존심있는 복종, 품위를 지키면서 하는 순종,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종속, 높은 정신을 잃지 않는 예속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은 온유한 덕목이다. 성실한 의와 엄격한 정의가 남성적인 것이라면 인은 여성적인 온유함과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인을 행함에 있어서 의나 정의를 도외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무장 마사무네는 “의가 지나치면 융통성이 없어지고 인이 지나치면 문약해 진다”라고 하여 인과 의, 정의 사이의 조화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의 온유와 자비의 정신은 무사의 피비린내 나는 전공을 미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다음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해준다.
1184년, 원씨와 평씨의 군대가 이찌계곡에서 벌였던 전투는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데 다음 이야기는 거기에서 큰 공을 세운 나오자네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씨측의 무장이었던 나오자네는 마침 말을 타고 홀로 도망가는 적을 발견하고
이렇게 어릴 때부터 강한 심성을 기르게 하여 진정한 용기에 다다르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진정한 용기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무르는 법이며 그것이 외부로 표출될 때는 평정, 침착의 형태를 띄게 된다. 진정으로 용감한 자는 항상 침착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고, 어떠한 사물도 그의 정신적 평정을 흐트러뜨릴 수 없어야 한다.
전투의 한가운데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천재지변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죽음의 공포가 다가와도 자제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무사도의 용기란 전장에 나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드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과 그러한 용기를 바탕으로 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난처해하지 않는 마음, 정신적 능력에 항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의 표현이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용기에 관한 일화가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유명한 무사인데, 그가 자객의 창에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자객은 도칸이 시가(詩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도칸의 옆구리에 창을 깊이 찌르고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던졌다.
“생명이 얼마나 아깝겠느냐 지금이야말로 도칸은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는 치명상을 입고서도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응답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라고 일찍이 생각하는 바 아니나 죽음에 다다러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아들이거나 위와 같이 느긋하게 시가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용기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일본 무사도와 흔히 비교되는 사상이나 정신으로 서양의 기사도 정신을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랑도나 선비정신과 비교를 한다. 용기에 관해서는 서양과 우리나라, 일본은 별다른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기사도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었는데, 기사도가 추구하는 덕목은 무용,성실,명예,예의,경건,겸양,약자보호 등이 있다. 기사의 존립조건이기도 한 무용과 성실은 초기에 있어 기사도의 핵심을 이룬 덕목이었다. 한국 화랑도의 이른바 세속오계도 이에 대응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선비정신이란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지조 의식을 말한다. 기사도나 화랑도, 그리고 무사도는 내용면에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용기에 관한 면에서는 모두 비슷하다. 서양의 기사도나 우리나라의 화랑도선비정신, 그리고 일본의 무사도 모두 자신이 섬기는 군주나 왕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용기에 관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무사도의 이러한 용기는 다른 덕목들의 원천이 된다. 자신이나 가문, 또는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기의 생명으로써 주군을 모시는 충의, 그리고 극기의 정신을 실천하고 내면화 하기 위해서 용기는 기본적으로 무사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3.4 인(仁)
‘무사의 인정’이라는 일본어 관용구가 있다. 어찌보면 별 뜻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이 말 안에는 일본 무사도의 고귀한 정신이 담겨져있다. 일본 무사도에 있어서 인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정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예로부터 이 인이라는 덕목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러한 인정으로서의 인은 정의를 전제로 한 것이며 상대방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과 권력을 보유하는 가운데 베풀어진다. 무사는 무력을 보유하고 사용하는 특권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는 약자, 패자, 짓밟힌 자에게 인을 베푸는 것을 참다운 무사의 미덕이라 여겼으며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무사도의 정신인 인은 또한“사냥꾼은 품안에 날아든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격언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의 지배 계급은 무사들이었다. 이러한 지배층으로서의 무사들에게 인은 민심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과거 일본의 봉건제도 하에서 백성들의 생명과 몸을 지키는 역할을 통치자가 수행했고 때문에 통치자의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자칫하면 전제정치로 이어질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는 백성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무단정치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한 상태 아래에서 최악의 전제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강조된 덕목인 바로 인이었다. 이러한 인은 공자나 맹자가 말한 통치자의 덕목으로서의 인(仁)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일본의 봉건군주와 봉신사이에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의무에 대한 의식이 비교적 얇다. 그러나 봉건 군주가 선조나 ‘천(天)’,즉 하늘에 대해 느끼는 책임의식은 매우 강하다. 전통적으로 봉건군주는 하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도록 위임받았다고 인식했으므로 백성들에게 있어서 봉건군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있었다. 무사도는 이러한 부권정치를 받아들였고 이를 더욱 공고히 했다. 부권정치는 전제정치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전제정치에서는 인민의 마지못해 하는 복종만을 강요하지만 부권정치에서는 인민의 자존심있는 복종, 품위를 지키면서 하는 순종,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종속, 높은 정신을 잃지 않는 예속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은 온유한 덕목이다. 성실한 의와 엄격한 정의가 남성적인 것이라면 인은 여성적인 온유함과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인을 행함에 있어서 의나 정의를 도외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무장 마사무네는 “의가 지나치면 융통성이 없어지고 인이 지나치면 문약해 진다”라고 하여 인과 의, 정의 사이의 조화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의 온유와 자비의 정신은 무사의 피비린내 나는 전공을 미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다음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해준다.
1184년, 원씨와 평씨의 군대가 이찌계곡에서 벌였던 전투는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데 다음 이야기는 거기에서 큰 공을 세운 나오자네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씨측의 무장이었던 나오자네는 마침 말을 타고 홀로 도망가는 적을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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