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상과 문학의 관련 방식
2. 근대문학과 아나키즘의 세 접점
3. 조명희와 흑도회․아나키즘의 관련성
4. 작품세계의 아나키즘적 양상
2. 근대문학과 아나키즘의 세 접점
3. 조명희와 흑도회․아나키즘의 관련성
4. 작품세계의 아나키즘적 양상
본문내용
제였던가.
조명희와 이기영에 대해 박영희는 ‘흑도회 회원’이었으나 ‘그 후에는 곧 우리 진영으로 왔었다’고 했는데, 이 진술은 이기영, 조명희가 KAPF 발족(1925. 8) 이후에 추가로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기진의 기억과 합치한다. 두 사람의 카프 가입을 곧 아나키즘의 청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카프는 처음 발족한 이래 1926년 말까지 ‘인텔리겐챠의 친목기관사교기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확고한 지도이론도 없이 맹원 각자의 분산적 활동이 방임된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나 시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준기관지 문예운동(1926. 1, 2)의 발간을 계기로 하여 “문예운동에 글쓰는 동지로써 르조아에 중독된 잡지에도 투고를 하게 되면 그 필자의 글은 본 잡지의 주의 상 棄稿하여 (중략) 중간파 회색파는 할 수 잇는 대로 업새기”로 한다는 방침도 나왔다. 이러한 방침과 아울러서 계급문학시비론(개벽, 1925. 2) 이래로의 조선문단 관계자들을 일제히 공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취지는 어디까지나 아나계와 보르계를 막론하고 계급문학 진영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러니까 조명희와 이기영이 문예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역시 아나키즘에서 탈피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이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카프가 마침내 실질적 운동 조직체로서 이념적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앞 장에서 살핀 대로 1927년 전반기에 아나-보르 논쟁의 1차 접전을 통해 김화산 등의 아나계를 배제하게 되는 제1차 방향전환에서였다. 조명희와 이기영은 기실 아나-보르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그 이후 소위 제2기 카프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요컨대 두 사람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명확하게 이행한 것은 제1차 방향전환 무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행과정에 대하여 박영희는 조명희의 경우를 지목하여 “그는 아주 천천히 맑스주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었다”고 술회하면서, 낙동강(조선지광, 1927. 7)이 그의 “사상적 발전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카프의 조직과 이론의 규정력보다는 작가 자신의 주체적 성찰을 통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을 수행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상의 내재적 전환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던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세계를 살핌으로써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4. 작품세계의 아나키즘적 양상
동경유학의 목적이 ‘문학공부’였음을 언급한 생활기록의 단편에는 도일 이전에 조명희의 독서 편력이 소일꺼리였던 신소설과 구소설, 민우보의 哀史’(매일신보, 1918. 7. 28~1919. 2. 8, 152회), 당시 신문잡지의 창작물, 일본소설과 文藝俱樂部 등의 순서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애사 즉 V.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감동에 끌려 문학에 입지하기 전에는 “문예라는 말의 의미도 글짜까지도 몰랐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우선 궁금한 점은 이광수의 무정(매일신보, 1917)에 대한 고의적인 묵살 혐의. 이 글이 문예운동(1926. 2)의 이광수 등 조선문단 관계자들에 대한 공격, 김우진의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조선지광, 1926. 5) 이후에 씌어졌다는 것에 유의할 만하다. 다음으로는 애사의 연재 이후에 신문잡지라고 해야 매일신보, 학지광, 기독청년(동경;1917. 11~19. 12) 정도가 고작인데다, 31운동에 연관되기도 했던 처지로 그 해 겨울 동경으로 떠나기까지는 문학에 깊이 경도하기에 기간이 너무 짧고 또 시국도 불안정했다는 점. 또 하나 수긍되지 않는 점은 文藝俱樂部(1895.1~1933.1)가 그 무렵 통속화한 대중 오락지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몇가지 의문점은 앞장에서 지적한 대로 생활기록의 단편이 변증적 진술로서 과거 생활에 대한 자기비하을 다소 과장하고 있는 글임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같은 글의 “북경행에 실패한 뒤에 동경행을 뜻 둔지는 여러 해이다”라고 말한 부분 등도 애사를 읽은지 채 일년도 못되는 동안에 일본으로 ‘문학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것과 상충된다. 북경사관학교를 목표로 했던 1914년의 가출 즉 ‘북경행’과 동경유학 사이의 5년여 세월을 함께 지낸 장조카 조중흡에 의하면, 늘 독서에 파묻혔던 조명희의 책들 가운데 早稻田文學 강의록이 많았다고 한다. 坪內逍遙가 주간을 맡은 제1차(1891~98) 早稻田文學은 처음에 교외교육용 강의록 중심이었으나 차츰 문학적 색채를 보였고 <沒理想論爭>으로 유명한데, 제2차(1906~27)에 들어서는 자연주의의 아성으로서 문단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문예지이다. 文藝俱樂部를 서서 읽었다면, 수년간 유학을 계획하던 조명희가 강의록 중심의 초창기 早稻田文學만이 아니라 제2차분까지 읽었던 것으로 봄직하다. 요컨대 조명희의 문학입문은 대중없이 충동에 맡겨진 것이 아니었고, 적어도 동경에 도착한지 몇 개월 남짓해서 만난 김우진의 <극예술협회>에 들어갈 수준은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명희의 첫 발표작 김영일의 사는 <동우회>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당시 무대감독 김우진의 요청에 의해 ‘단시일’에 급히 써낸 습작으로 김우진의 ‘칭찬’을 받고 바로 상연되었고, 귀국한 192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1921년 중반경 조명희의 문학적 역량은 <극예술협회> 좌장 김우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수준이었던 모양으로, 일본에 건너온 초기부터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시작이었다. 그가 정작 시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국 후에 출판한 시집 봄잔듸밧위에(춘추각, 1924. 6. 15)를 통해서인데, 이 시집은 ‘봄잔듸밧위에의 部’ 13편, ‘蘆水哀音의 部’ 8편, ‘어둠의 춤의 部’ 22편 등 총43편을 싣고 있으며, 그 창작 시기는 각각 귀국 후, 유학 초기, 그 다음부터 귀국 전까지로 밝혀져 있다. 이 3부 구성의 의의에 대한 작자 자신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주목을 요한다.
이 난호은 3부가 다 그 부부마다 사상과 시풍이 변천됨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선으로 표시한다면 초기작 蘆水哀音에는 투명치 못하고 거치로나마 흐르는 곡선이 일관하여 잇고, 그 다음 어둠의 춤 가운대에는 굴근 곡선이 긋
조명희와 이기영에 대해 박영희는 ‘흑도회 회원’이었으나 ‘그 후에는 곧 우리 진영으로 왔었다’고 했는데, 이 진술은 이기영, 조명희가 KAPF 발족(1925. 8) 이후에 추가로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기진의 기억과 합치한다. 두 사람의 카프 가입을 곧 아나키즘의 청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카프는 처음 발족한 이래 1926년 말까지 ‘인텔리겐챠의 친목기관사교기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확고한 지도이론도 없이 맹원 각자의 분산적 활동이 방임된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나 시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준기관지 문예운동(1926. 1, 2)의 발간을 계기로 하여 “문예운동에 글쓰는 동지로써 르조아에 중독된 잡지에도 투고를 하게 되면 그 필자의 글은 본 잡지의 주의 상 棄稿하여 (중략) 중간파 회색파는 할 수 잇는 대로 업새기”로 한다는 방침도 나왔다. 이러한 방침과 아울러서 계급문학시비론(개벽, 1925. 2) 이래로의 조선문단 관계자들을 일제히 공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취지는 어디까지나 아나계와 보르계를 막론하고 계급문학 진영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러니까 조명희와 이기영이 문예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역시 아나키즘에서 탈피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이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카프가 마침내 실질적 운동 조직체로서 이념적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앞 장에서 살핀 대로 1927년 전반기에 아나-보르 논쟁의 1차 접전을 통해 김화산 등의 아나계를 배제하게 되는 제1차 방향전환에서였다. 조명희와 이기영은 기실 아나-보르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그 이후 소위 제2기 카프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요컨대 두 사람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명확하게 이행한 것은 제1차 방향전환 무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행과정에 대하여 박영희는 조명희의 경우를 지목하여 “그는 아주 천천히 맑스주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었다”고 술회하면서, 낙동강(조선지광, 1927. 7)이 그의 “사상적 발전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카프의 조직과 이론의 규정력보다는 작가 자신의 주체적 성찰을 통해 아나키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을 수행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상의 내재적 전환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던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세계를 살핌으로써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4. 작품세계의 아나키즘적 양상
동경유학의 목적이 ‘문학공부’였음을 언급한 생활기록의 단편에는 도일 이전에 조명희의 독서 편력이 소일꺼리였던 신소설과 구소설, 민우보의 哀史’(매일신보, 1918. 7. 28~1919. 2. 8, 152회), 당시 신문잡지의 창작물, 일본소설과 文藝俱樂部 등의 순서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애사 즉 V.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감동에 끌려 문학에 입지하기 전에는 “문예라는 말의 의미도 글짜까지도 몰랐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우선 궁금한 점은 이광수의 무정(매일신보, 1917)에 대한 고의적인 묵살 혐의. 이 글이 문예운동(1926. 2)의 이광수 등 조선문단 관계자들에 대한 공격, 김우진의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조선지광, 1926. 5) 이후에 씌어졌다는 것에 유의할 만하다. 다음으로는 애사의 연재 이후에 신문잡지라고 해야 매일신보, 학지광, 기독청년(동경;1917. 11~19. 12) 정도가 고작인데다, 31운동에 연관되기도 했던 처지로 그 해 겨울 동경으로 떠나기까지는 문학에 깊이 경도하기에 기간이 너무 짧고 또 시국도 불안정했다는 점. 또 하나 수긍되지 않는 점은 文藝俱樂部(1895.1~1933.1)가 그 무렵 통속화한 대중 오락지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몇가지 의문점은 앞장에서 지적한 대로 생활기록의 단편이 변증적 진술로서 과거 생활에 대한 자기비하을 다소 과장하고 있는 글임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같은 글의 “북경행에 실패한 뒤에 동경행을 뜻 둔지는 여러 해이다”라고 말한 부분 등도 애사를 읽은지 채 일년도 못되는 동안에 일본으로 ‘문학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것과 상충된다. 북경사관학교를 목표로 했던 1914년의 가출 즉 ‘북경행’과 동경유학 사이의 5년여 세월을 함께 지낸 장조카 조중흡에 의하면, 늘 독서에 파묻혔던 조명희의 책들 가운데 早稻田文學 강의록이 많았다고 한다. 坪內逍遙가 주간을 맡은 제1차(1891~98) 早稻田文學은 처음에 교외교육용 강의록 중심이었으나 차츰 문학적 색채를 보였고 <沒理想論爭>으로 유명한데, 제2차(1906~27)에 들어서는 자연주의의 아성으로서 문단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문예지이다. 文藝俱樂部를 서서 읽었다면, 수년간 유학을 계획하던 조명희가 강의록 중심의 초창기 早稻田文學만이 아니라 제2차분까지 읽었던 것으로 봄직하다. 요컨대 조명희의 문학입문은 대중없이 충동에 맡겨진 것이 아니었고, 적어도 동경에 도착한지 몇 개월 남짓해서 만난 김우진의 <극예술협회>에 들어갈 수준은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명희의 첫 발표작 김영일의 사는 <동우회>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당시 무대감독 김우진의 요청에 의해 ‘단시일’에 급히 써낸 습작으로 김우진의 ‘칭찬’을 받고 바로 상연되었고, 귀국한 192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1921년 중반경 조명희의 문학적 역량은 <극예술협회> 좌장 김우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수준이었던 모양으로, 일본에 건너온 초기부터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시작이었다. 그가 정작 시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국 후에 출판한 시집 봄잔듸밧위에(춘추각, 1924. 6. 15)를 통해서인데, 이 시집은 ‘봄잔듸밧위에의 部’ 13편, ‘蘆水哀音의 部’ 8편, ‘어둠의 춤의 部’ 22편 등 총43편을 싣고 있으며, 그 창작 시기는 각각 귀국 후, 유학 초기, 그 다음부터 귀국 전까지로 밝혀져 있다. 이 3부 구성의 의의에 대한 작자 자신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주목을 요한다.
이 난호은 3부가 다 그 부부마다 사상과 시풍이 변천됨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선으로 표시한다면 초기작 蘆水哀音에는 투명치 못하고 거치로나마 흐르는 곡선이 일관하여 잇고, 그 다음 어둠의 춤 가운대에는 굴근 곡선이 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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