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들어가는 말
II. 본론
1. 불교의 세계관과 생명의 원리
(1) '생명'이란
(2) 불교의 세계관
(3) 불교의 연기법
(4) 불교의 마음
2. 불교의 생명원리 추구
(1) 苦와 해탈
(2) 무아를 통한 생사의 흐름의 이해와 순응
III. 나오는 말
II. 본론
1. 불교의 세계관과 생명의 원리
(1) '생명'이란
(2) 불교의 세계관
(3) 불교의 연기법
(4) 불교의 마음
2. 불교의 생명원리 추구
(1) 苦와 해탈
(2) 무아를 통한 생사의 흐름의 이해와 순응
III. 나오는 말
본문내용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나\'는 환경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비로소 그 생명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교류를 망각하고서 신체와 마음이라는 이원으로 구성된 자기에만 집착하기 일쑤이다. 이 같은 습성을 불교에서는 아집 아집 : 자신의 심신 가운데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 선척적인 것인 구생(俱生)과 후천적인 것인 분별(分別)로 나눈다. ≒인집(人執).
이라고 한다. 이 아집의 배후에 가로놓인 편향된 무지를 투철한 지례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유식의 철학이다. 그렇게 전환해 나갈 때 한편에는 객관 세계가 엄연하게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마음이라는 주체가 있다. 그 둘은 감각 기관을 매개로 하여 교섭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자기는 그와 같은 사실의 총체와 다를 바 없다고 유식론은 가르친다.
불교는 마음 이해는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변화하는 마음에 집착하여 자신의 육체와 영혼만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삶의 습관은 올바로 자신, 我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자신은 모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성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함으로 그들은 연기에 의해 어우러지고 흩어지는 생명의 길의 흐름에 역행하게 된다. 그들은 다른 생명체나 물질들을 소중하게 여기기보다는 육체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지배하려 하고 이용하려 한다.
2. 불교의 생명 원리 추구
(1) 苦와 해탈 해탈 : 불교에서 인간의 속세적(俗世的)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
불교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관과 생명관의 원리 하에서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추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해탈은 불교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이다. 해탈이란 바로 生, 老, 病, 死, 憂, 悲, 苦, 惱 중 인간의 삶에 수반되는 모든 苦로부터의 해방이다. 해탈과 고통, 이 둘은 별개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고통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라도 평안의 상태인 해탈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각성에 의해 일상적인 마음 작용의 진상을 간파할 때, 고는 더 이상 고가 아닌 해탈의 상태로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해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불교가 이해하는 고에 대해 살펴보자.
붓다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비유하곤 하였다. 붓다의 이런 말은 불교가 마치 염세주의처럼 보이게 한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붓다는 고통을 철저히 파악하고 원인을 규명하여 극복하려는 의도 하에 세상의 고통의 바다라고 비유한 것이다. 불교는 세상이 고통인 원인으로 무상, 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무상이기 때문에 고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상 자체가 고통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인 진실을 그로인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무상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하는 데서 고통이 가중된다는 뜻이다. 고통의 원인이 무상을 체험하는 데 있다면, 처음부터 온갖 것은 무상임을 철저히 인식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무상이란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항상 적용되는 진리이다.
불교는 고통을 크게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生.老.病.死라는 기본적인 고통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부득고(求不得苦), 육신과 정신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것으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오음성고(五陰盛苦) 8고가 있다.
고통의 근본은 \'갈애\'이다. 갈애는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맹목적으로 지니게 되는 욕구이기도 하다. 이 갈애는 원래 무상인 세상사를 진솔하게 인정하지 않는 무지 즉 무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모르고서 사는 게 사람들의 인생이다.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지 더욱 커져만 간다. 뿐만 아니라 욕심이 큰 사람일수록 자신이 당해야 할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고통은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고통으로 인해 악이 창궐하는 세상,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되는 삶의 진상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극복되어야만 한다.
붓다 붓다(부타) :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
는 세상이 고통이라고 설한 것은 고통인 악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단을 찾기 위해 이 세계의 특성과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고통은 생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함으로 발생하는 부작용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이 흐름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우러짐과 흩어짐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은 해탈,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무아를 통한 생사의 흐름의 이해와 순응
1) 無我 무아 : 산스크리트로 아트만(atman:自我)에 대비되는 말. ‘내가 아닌 것[非我]’이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
개념
붓다가 살았을 당시 인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살펴보겠다.
정통 바라문교 계통이나 자이나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고 그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atman, 自我)을 상정하였다. 이 아트만은 형이상학적 실체로 윤회와 해탈의 주체였다. 그에 비해 유물론자들은 사후 단멸론적인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4원소의 이산에 불과하므로 사후에 남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붓다는 당시의 이러한 여러 사상 체계에 대해서 이것을 모두 이단설로서 비판하고 무아설을 주장하였다. 붓다는 자신은 我의 실재 비실재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는 無我說의 입장을 취하였다.
먼저 아트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하고 그에 따른 불교의 무아의 입장을
이라고 한다. 이 아집의 배후에 가로놓인 편향된 무지를 투철한 지례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유식의 철학이다. 그렇게 전환해 나갈 때 한편에는 객관 세계가 엄연하게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마음이라는 주체가 있다. 그 둘은 감각 기관을 매개로 하여 교섭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자기는 그와 같은 사실의 총체와 다를 바 없다고 유식론은 가르친다.
불교는 마음 이해는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변화하는 마음에 집착하여 자신의 육체와 영혼만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삶의 습관은 올바로 자신, 我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자신은 모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성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함으로 그들은 연기에 의해 어우러지고 흩어지는 생명의 길의 흐름에 역행하게 된다. 그들은 다른 생명체나 물질들을 소중하게 여기기보다는 육체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지배하려 하고 이용하려 한다.
2. 불교의 생명 원리 추구
(1) 苦와 해탈 해탈 : 불교에서 인간의 속세적(俗世的)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
불교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관과 생명관의 원리 하에서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추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해탈은 불교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이다. 해탈이란 바로 生, 老, 病, 死, 憂, 悲, 苦, 惱 중 인간의 삶에 수반되는 모든 苦로부터의 해방이다. 해탈과 고통, 이 둘은 별개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고통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라도 평안의 상태인 해탈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각성에 의해 일상적인 마음 작용의 진상을 간파할 때, 고는 더 이상 고가 아닌 해탈의 상태로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해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불교가 이해하는 고에 대해 살펴보자.
붓다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 비유하곤 하였다. 붓다의 이런 말은 불교가 마치 염세주의처럼 보이게 한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붓다는 고통을 철저히 파악하고 원인을 규명하여 극복하려는 의도 하에 세상의 고통의 바다라고 비유한 것이다. 불교는 세상이 고통인 원인으로 무상, 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무상이기 때문에 고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상 자체가 고통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인 진실을 그로인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무상이 아니라고 굳이 고집하는 데서 고통이 가중된다는 뜻이다. 고통의 원인이 무상을 체험하는 데 있다면, 처음부터 온갖 것은 무상임을 철저히 인식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무상이란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항상 적용되는 진리이다.
불교는 고통을 크게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生.老.病.死라는 기본적인 고통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부득고(求不得苦), 육신과 정신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것으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오음성고(五陰盛苦) 8고가 있다.
고통의 근본은 \'갈애\'이다. 갈애는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맹목적으로 지니게 되는 욕구이기도 하다. 이 갈애는 원래 무상인 세상사를 진솔하게 인정하지 않는 무지 즉 무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모르고서 사는 게 사람들의 인생이다.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지 더욱 커져만 간다. 뿐만 아니라 욕심이 큰 사람일수록 자신이 당해야 할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고통은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고통으로 인해 악이 창궐하는 세상,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되는 삶의 진상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극복되어야만 한다.
붓다 붓다(부타) :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
는 세상이 고통이라고 설한 것은 고통인 악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단을 찾기 위해 이 세계의 특성과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고통은 생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함으로 발생하는 부작용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이 흐름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우러짐과 흩어짐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은 해탈,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무아를 통한 생사의 흐름의 이해와 순응
1) 無我 무아 : 산스크리트로 아트만(atman:自我)에 대비되는 말. ‘내가 아닌 것[非我]’이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
개념
붓다가 살았을 당시 인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살펴보겠다.
정통 바라문교 계통이나 자이나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고 그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atman, 自我)을 상정하였다. 이 아트만은 형이상학적 실체로 윤회와 해탈의 주체였다. 그에 비해 유물론자들은 사후 단멸론적인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4원소의 이산에 불과하므로 사후에 남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붓다는 당시의 이러한 여러 사상 체계에 대해서 이것을 모두 이단설로서 비판하고 무아설을 주장하였다. 붓다는 자신은 我의 실재 비실재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는 無我說의 입장을 취하였다.
먼저 아트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하고 그에 따른 불교의 무아의 입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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