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론(서울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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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약개론(서울신학대학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받았다. 마키아의 반란으로 인해 제사장제도에 변화가 왔다. 헤롯 대왕이 사망한 이래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제장들은 다시 한번 유대의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대제사장은 로마총독의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적지 않은 경우 그의 정치적 압력을 사용하여 통치자로 하여금 그의 정책을 바꾸도록 하기도 했다.
7)로마 치하에서 A. D. 135년 바코흐바의 난까지
연속적으로 유대지역을 통치했던 나라들의 통치시기를 연대별로 명확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가 A. D. 63년에 폼페이를 정복한 후부터 유대에 대한 보호권을 행사하였고 헤롯과 제사장들을 분봉왕으로 동일시 하였다. 헤롯대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그의 문능력한 아들인 아켈라우스가 왕으로서 그의 뒤를 이었으나 그가 통치자로서 매우 평판이 나쁘다는 것이 확인되자 로마는 그를 패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몇몇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지방을 직접적으로 통치했다.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제사장직 계승에 자신이 입후보자를 내세워 개입함으로써 미움을 샀다. 그의 계승자인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의 재판과 죽음에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총독일 것이다.
A. D. 37년에 갈리굴라 황제의 계승은 새로운 위기를 가져 왔다. 갈리굴라는 자신이 신이라는 q망상에 사로잡혀 자기의 동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울 것을 명령하였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시리아의 총독인 페트로니우스가 위임되었다. 그는 그러한 위기를 연기하는 방책에 성공하였고 A. D. 41년에 갈리굴라 황제가 죽음으로써 그 문제는 다행히 해결되었다 .A. D. 66년 유대저쟁이 시작되기까지 전시대에 걸쳐서, 로마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는 걔속되는 긴장이 있었다. 후기의 총독둘 중에는 엠 안토니우스 벨릭스와 풀시우스 페스투스가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연관되어 언급되어 있다. 벨릭스가 총독으로 있을 그 시기에 유대에는 악의, 또는 실수로 인해서 소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벨릭스의 계승자인 풀시우스 페스투스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행정가 였던거 같다.페스투스의 죽음과 유대전쟁의 발발 사이의 정치적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분쟁은 A. D. 66년에 여러 도시에서의 연이은 폭동들과 함께 시작되었고 가도시에서 로마 주둔군들이 유대 폭도들에 의해서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네로는 유대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의 지휘관으로서 베스파시안을 임명했다. 그는 A. D. 67년 추기에 60,000명의 군사를 희생시키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갔다.67년 7월에 동부 로마의 군단들은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아들 디도가 유대의 통치임무를 맡아 떠나자,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A. D. 70년에 로마에 도착했다.지스칼라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시몬 바 지오라 라는 또 따른 열심당원과 시몬의 아들인 엘리아자르와 연합 되었다 .A. D. 70년 보디도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포위공격했다. 그 도시는 결국 기근과 살인적인 분쟁으로 인해 무력해졌으면 그 해 8월 로마에게 정복되어 성벽이 파괴 되었다. 나머지 요새인 헤로디움, 마캐러스 그리고 마사다의 정복을 마치기까지에는 3년 이상이 더 걸렸다.
트라얀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와 구레네의 유대인들이 심각하게 충돌한 폭동들이 있었다.
A. D. 135년에 하드리안이 이끈 바 코흐바의 반란과 함께 유대 독립의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바 - 코흐바는 그 도시에서 쫓겨나 체포되었고 예루살렘은 어떠한 유대인도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로마인의 도시가 되었으며 이전에 여호와의 얘배자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던 곳에 쥬피터의 신전이 세워졌다.비록 정치적인 의미에서 나라는 패망했으나 유대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A. D. 90년에 유대 랍비인 요나단 벤 자카이는 암니아에서 율법강의를 위해 학교를 개설했다. 그와 함께 그때까지 그들의 믿음을 지켜온 여러 바리새인 교사들이 합세했다. 비록 제사장이 사라지고 희생제사는 없어졌어도 율법교사들은 선행과 율법연구로 제단이 없는 제물들을 대신하면서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제2장 사회, 경제적 상황
1.사회적 상황
첫 세기의 사회적 상황은 20세기의 현대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자와 가난한 자, 도덕적 인간들과 범죄자들, 자유민과 종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으며 그 시대를 이끌어온 사회, 경제적인 상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시대와 유사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1)유대사회
유대교나 이방인의 세계에나 부유한 귀족층들은 있었다. 유대교 사회에서는 종교 계급이 귀족 계급에 속해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제사장의 가족들과 지도적인 랍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교의 최대회의인 산헤드린의 회원 중에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땅을 소작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농작물을 팔아서 이익을 차지했던 지주계급이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대부분 농부나 장인들이었으며 상인들도 있었다. 유대교에는 노예제도가 보편화 되지 않았는데 대부분 팔레스타인들은 자유민 이었던것 같다. 유대인 가운데서는 사회적인 분화는 그들에게 부과된 율법의 의무 때문에 다소간의 억제되었다. 귀족 정치는 항상 자기들의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사회에 내제해 있는 이러한 고유한 평등사상은 소수에 의한 과두정치가 너무 억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2)이방사회
(1) 귀족 계급
첫세기 이방 세계의 사회적 계층은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참주정치가 일어나기 전의 로마의 내전들은 제국의 사회적 구조들을 전적으로 붕괴시켰다.
(2)중산계급
전쟁포로를 노예로 사용했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크게 확산됨으로써 로마제국의 중산층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3)평민계급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으며 그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비참했다.
(4)노예와 범죄자들
노예들은 로마제국의 인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려우나 아마도 로마 거주자 중에서 절반 봇되는 수가 자유민이었으며 이들 중 몇 안되는 자들만이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었다. 전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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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0
  • 저작시기200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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