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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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김수영 시인
1. 생 애 (1921.11.27-1968.6.16)

2. 김수영 신화라는 현상

3. 활동 및 작품경향의 변화
① 초기(광복~6.26이전)
② 1950년대
③ 4.19 민주주의혁명
④ 5.16군사쿠데타 이후
- 양심의 살아 있는 시화와 시의 완성

4. 결론

본문내용

있다. 사소한 자연현상 속에서 인간 세계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시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생명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거대한 힘과의 싸움을,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의 말로써 그려내고 있다.
이 시보다 앞서 나왔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보면 절정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한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권력에는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 고발하는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의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인 <풀>이라는 걸작을 창작하게 되는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4. 결론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쓴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김수영은 시와 관련한 자신의 사유의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대립항들을 이끌어 들인다. 그들 대립항들의 핵심은 예술의 자율적 본질과 사회적 본질의 첨예한 대립의 문제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김수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촉발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서구 근대 예술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 부단히 제기된 문제이며, 그러한 사정은 우리 근대 시문학사의 성립과 전개과정에서도 결코 예외적이지 않았다.
김수영에게서 특별한 점은 그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그 두 가지 요인들을 추상적 이분법의 구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것들이 통일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대해 고민하였다는 것이다.
김수영의 대표적 시론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현실성과 예술성의 문제와 함께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김수영이 예술의 사회적 본질과 자율적 본질에 대한 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내용과 형식이라는 범주만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했다면 그 시도는 그 자체로서 형식적인 범주의 논의 속에 한정되고 말았을 것이다.
김수영에 따르면 시에서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그와 같이 추상적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술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식은 작품의 기법이나 기교 혹은 단순히 감각적 요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식은 작품에 수용된 모든 개별적 요인들의 미학적 연관 관계에 대한 총괄 개념이다.
현대의 문제적 상황에 대한 의식 없이는 현대시를 쓸 수 없으므로 시인은 현실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지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씨를 쓰는 사람이므로 '언어의 작용'에 투신할 수 있는 기술자로서의 고민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시에 대한 김수영의 사유의 핵심이었다.
예술성과 현실성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통일될 수 있는 어떤 지점이나 순간에 대한 김수영의 사유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1920년대의 "내용과 형식 논쟁'이나 1930년대의 '기교주의 논쟁', 그리고 1960년대의 '순수와 참여 논쟁'의 자장권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인이 가진 작품의 시사적 맥락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 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말이나 문장이 어렵고 복잡하여 매끄럽지 못하다)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말하였다.
김수영은 부단히 '제 정신'혹은 '양심'을 지키는 것을 시의 창조 행위와 동일시하였으며, 이러한 동일시가 김수영 문학에 윤리적 밀도를 부여하였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사회와 삶에 대한 지식인의 윤리적인 태도를 시인의 예술적 창조 행위 쪽으로 부단히 근접시키려 했던 김수영의 노력이 그를 4.19 이래 보기 드문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받게 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로 인해 정작 그의 문학은 생성으로 절적 비약을 하는 초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김수영의 사망 1주기를 맞아 도봉산에 시비가 건립되었고, 미완성의 장편소설 <의용군>이 <월간문학>에 발표되었다. 민음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하고 있다. 2001년 10월 금관문화훈장이 사후에 수여되었다.
1921.11.27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지주이던 부친 태욱과 모친 안형순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김해. 효제국민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1941) 후 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전문부에 입학(1941). 일가족이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1943)함. 조선학병징집을 피해 귀국(1943)한 뒤 가족이 있는 길림성(吉林省)으로 가(1944) 길림성 길림제육고(吉林第六高)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며 영문학과 연극 활동에 매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1945)되자 다시 서울로 귀국(1945)하여 미군 통역일을 하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영어영문학과 4학년에 편입(1945)했으나 중퇴. 6.25 발발(1950)시 서울에 그대로 남아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징집되어 인민해방군으로 전투에 참가.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해방군에서 탈출하여 포로가 된 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석방(1952)됨. 이후 미군통역, 주간 태평양 기자,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1954) 등을 맡아보며 생계를 유지하다 1955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자택서 직접 양계(養鷄)업을 하며 시작(詩作), 번역, 평론에 전념. 1968. 6. 15 귀가길에 버스에 치여 의식 불명 상태에 있다 다음날 사망(1968. 6.16).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 김수영시비가 제막됨(시인의 시 <풀>이 새겨짐).두 권의 <김수영전집>(민음사, 1981)을 출간한 민음사에서 1981년부터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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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11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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