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단군신화
2. 주몽신화
3. 박혁거세신화
4. 김수로왕 신화
2. 주몽신화
3. 박혁거세신화
4. 김수로왕 신화
본문내용
)라고도 불렀다.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탄생했으므로 계림국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림이 상서(祥瑞)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
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었는데, 그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해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쳤다가 후세에 와서 신라를 국호(國號)로 정했다고 한다.
나라를 다슨린 지 61년 만에 혁거세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장사를 지내려고 했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 사람의 온몸
를 각각 장사 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불렀다. 담엄사(曇嚴寺) 뒤에 있는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김수로왕 신화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上巳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으므로 구지라 했다
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 3백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를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약에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서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1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화하여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이내 평상(平床)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殷)나라 천을(天乙) 탕왕
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하고 혹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다
이라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일컬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었는데, 그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해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쳤다가 후세에 와서 신라를 국호(國號)로 정했다고 한다.
나라를 다슨린 지 61년 만에 혁거세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장사를 지내려고 했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 사람의 온몸
를 각각 장사 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불렀다. 담엄사(曇嚴寺) 뒤에 있는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김수로왕 신화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上巳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으므로 구지라 했다
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 3백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를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약에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서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1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화하여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이내 평상(平床)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殷)나라 천을(天乙) 탕왕
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하고 혹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다
이라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일컬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추천자료
건국 신화들의 비교
건국설화를 통해본 백제의 형성과 백제 건국신화로서의 비류설화
삼국 건국신화의 유사점과 차의점
문화콘텐츠 일상속의 신화
구비문학개론-『神話(신화)』
한국인에게 있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의미와 앞으로 미치게 될 영향
신화에서 보여지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부자(父子) 관계 중심
[책요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
[한국외대 A+ 자료]신화와 종교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
건국신화에 대하여k,k
[건국신화][서사구조][전승체계][건국신화 상징][건국신화 신관]건국신화의 의미, 건국신화의...
[고구려건국신화][백제건국신화][고려건국신화][한국건국신화][대하건국신화][마한건국신화]...
한국 신화의 세계화 가능성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