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2
Ⅱ. 본론
1. 집현전 ………………………………………… 2
2. 한글창제 ………………………………………… 3
3. 과학기술 ………………………………………… 5
4. 음악 ………………………………………… 8
5. 군주로서의 자질 ……………………………… 9
Ⅲ. 결론 ………………………………………… 10
☞ 참고 문헌
☞ 참고 사이트
Ⅱ. 본론
1. 집현전 ………………………………………… 2
2. 한글창제 ………………………………………… 3
3. 과학기술 ………………………………………… 5
4. 음악 ………………………………………… 8
5. 군주로서의 자질 ……………………………… 9
Ⅲ. 결론 ………………………………………… 10
☞ 참고 문헌
☞ 참고 사이트
본문내용
씩 어긋났으며 인쇄속도의 향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새 청동활자 주조사업을 벌였는데 세종 16년에 시작된 이 사업에는 이천, 김돈, 장영실, 이순지 등이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갑인자이다.
갑인자는 사각기둥 모양을 하고 각 활자의 크기가 한결같아 글자 사이도 일정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활자가 활판에 잘 들어맞아 꿀 찌꺼기를 쓰지 않고 활자 사이에 대나무조각을 끼워넣는 것만으로 활자를 잘 고정시킬 수 있었다. 갑인자는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이영덕, 같은 책, 237면
뿐만 아니라 한글 청동활자도 처음으로 주조해 함께 썼다.
(4) 지리학
조선초 태조가 천문도를 제작해 새 왕조를 천문학적으로 정당화하고 태종이 세계지도를 만들어 세계 속의 조선의 위상을 나타냈다면 세종대에는 나라의 여러 가지 “사실적 정보”를 수집, 정리한 지리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지리지의 편찬작업은 세종 6년에 착수되어 8년만에 『신찬팔도지리지』로 완성되었다. 세종은 처음에 이 일을 변계량에게 맡겼는데 학자들은 맹사성, 권진, 윤희, 신장 등이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남아 있지 않으나 그 기초자료로서 만든 도지의 하나인 『경상도지리지』가 남아 그 편찬과정과 내용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경상도지리지』는 자연환경에서 경제, 군사, 인구에 이르는 방대한 정보를 포괄하고 있다. 『신찬팔도지리지』의 완성 이후에도 계속적인 증보와 재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신찬팔도지리지』가 완성되어 나라 전체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뒤 정밀한 실측지도제작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책이 상지와 화공들을 이끌고 함길, 평안, 황해 3도에 가서 산천의 형세를 그리고 주 군의 거리를 실측해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팔도도』이다. 『팔도도』에는 『신찬팔도지리지』에 들어 있는 방대한 정보가 시각적으로 나타나 있다.
지도의 보완 및 지도 제작사업도 계속되었다. 각도에 주 군 사이의 거리를 조사 보고하도록 시달해 지도 제작의 참고자료로 썼다. 이런 지속적인 노력은 단종대에 시작해 세조대에 끝난 『동국지도』로 결산되었다. 이영덕, 같은 책, 236~237면
(5) 의약학
의학분야에서 세종대왕이 이룬 업적은 여러면에서 괄목할 만하다. 첫째로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이 쉽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의료제도를 개혁하였다. 특히 세종대왕은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 왕실의 의료를 맡은 내의원, 일반 백성들을 위한 의료시설인 혜민서, 가난한 사람과 무의탁 병자 및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동서활인원 등 네 가지 의료시설을 두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습독청을 설치하였고 의학 분야에서 재능있고 박식한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하여 국가고시를 시행하였다. 그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장래의 의원들은 이론뿐만 아니라 임상 실습을 하기 위해 의생방을 거쳐야 했다. 또한 세종대왕은 문과 출신자 중 우수한 사람들에게 의학업무를 전담하게 하는 유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유의제도로 말미암아 유능한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은 물론, 우수한 관리들을 정부 내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의료제도의 개혁 이외에 세종대황은 한국 의학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인간과 땅은 하나이며 한국의 토착 약초들이 한국인의 질병 치료에 도움이 도리 것이라는 신념 위에서 세종대왕은 한국산 약초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세종대왕은 또한 의학자들을 외국에 보내어 약용 식물에 대한 여러 책을 수집,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풍부한 의학 지식을 갖도록 하였다. 그의 목적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제목의 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정종 2년(1399년)에 간행한 《향약집성방》의 내용을 좀더 보완한, 56권으로 되어있는 이 약학 지침서는 959가지 질병의 치료를 다루고 있으며, 각 항목은 병의 증상, 처방, 그러한 정보를 얻은 원전을 수록하고 있다. 이 방대한 양의 지침서는 한국의 의서들을 인용하고 특정한 약용 재료들을 한국의 언제,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그 분포 실태를 조사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한, 당, 송, 원대에 쓰인 중국 의서들을 160종 이상 인용하였다. 《향약집성방》은 한국 의학의 독자성 확립과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4. 음악
세종조를 포함한 조선 전기의 음악은 고려조와 같이 아악(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이라는 삼자 구도로 전승디었지만 세종조에 이르러 대대적인 전환의 국면을 맞았다. 말할 수 없이 미비하였던 아악의 위기, 고려조로부터 이어받은 속악의 난장(亂狀), 고제(古制) 및 고전(古典)에 맞지 않는 용악(用樂)의 예..... 등등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았던 麗末鮮初의 음악 상황을 종합적이고 대대적인 음악 문화사업을 통해 정립시킴으로써 후대에 물려줄 풍부한 음악유산을 이룩한 것이다.
먼저 아악 분야를 보자. 태종대의 음악과 구성의 많은 부분이 그 이전 고려시대의 것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어서 세종대왕과 그의 신하들은 아악이 수정되어야 할 축적된 오류를 여전히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세종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을 주로 제공한 사람은 박연(1378~1458)이라는 신하였는데 그는 고대의 음악을 연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과 한국의 음악에 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하였다. 세종과 박연은 비록 본격적으로 ‘신유학적’이 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송대(960~1279)의 음악과 이론에 특히 의존하였다.
1423년에서 1430년 사이에 세종의 감독하에 박연은 아악에 사용하기 위하여 수백 가지 악기의 제작을 준비하였고 이러한 악기 제작을 위해서 악기도감(樂器都監)이라는 특별한 기관이 세워졌다. 이때 만들어진 악기들로는 칠현금(七絃琴), 생(笙), 봉소(鳳簫), 훈(塤), 여러 종류의 대나무 관악기,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이 국가 제례나 알현의 목적으로 편찬되고 수정되었는데 그 모든 음악이 《아악보》라는 책에 기록되었으며 이 책의 서문은 정인지(1396~1478)가 썼다. 《아악보》는 1454년에 《세종실록》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악기제작과 함께
갑인자는 사각기둥 모양을 하고 각 활자의 크기가 한결같아 글자 사이도 일정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활자가 활판에 잘 들어맞아 꿀 찌꺼기를 쓰지 않고 활자 사이에 대나무조각을 끼워넣는 것만으로 활자를 잘 고정시킬 수 있었다. 갑인자는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글자체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이영덕, 같은 책, 237면
뿐만 아니라 한글 청동활자도 처음으로 주조해 함께 썼다.
(4) 지리학
조선초 태조가 천문도를 제작해 새 왕조를 천문학적으로 정당화하고 태종이 세계지도를 만들어 세계 속의 조선의 위상을 나타냈다면 세종대에는 나라의 여러 가지 “사실적 정보”를 수집, 정리한 지리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지리지의 편찬작업은 세종 6년에 착수되어 8년만에 『신찬팔도지리지』로 완성되었다. 세종은 처음에 이 일을 변계량에게 맡겼는데 학자들은 맹사성, 권진, 윤희, 신장 등이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남아 있지 않으나 그 기초자료로서 만든 도지의 하나인 『경상도지리지』가 남아 그 편찬과정과 내용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경상도지리지』는 자연환경에서 경제, 군사, 인구에 이르는 방대한 정보를 포괄하고 있다. 『신찬팔도지리지』의 완성 이후에도 계속적인 증보와 재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신찬팔도지리지』가 완성되어 나라 전체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뒤 정밀한 실측지도제작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책이 상지와 화공들을 이끌고 함길, 평안, 황해 3도에 가서 산천의 형세를 그리고 주 군의 거리를 실측해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팔도도』이다. 『팔도도』에는 『신찬팔도지리지』에 들어 있는 방대한 정보가 시각적으로 나타나 있다.
지도의 보완 및 지도 제작사업도 계속되었다. 각도에 주 군 사이의 거리를 조사 보고하도록 시달해 지도 제작의 참고자료로 썼다. 이런 지속적인 노력은 단종대에 시작해 세조대에 끝난 『동국지도』로 결산되었다. 이영덕, 같은 책, 236~237면
(5) 의약학
의학분야에서 세종대왕이 이룬 업적은 여러면에서 괄목할 만하다. 첫째로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이 쉽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의료제도를 개혁하였다. 특히 세종대왕은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 왕실의 의료를 맡은 내의원, 일반 백성들을 위한 의료시설인 혜민서, 가난한 사람과 무의탁 병자 및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동서활인원 등 네 가지 의료시설을 두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습독청을 설치하였고 의학 분야에서 재능있고 박식한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하여 국가고시를 시행하였다. 그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장래의 의원들은 이론뿐만 아니라 임상 실습을 하기 위해 의생방을 거쳐야 했다. 또한 세종대왕은 문과 출신자 중 우수한 사람들에게 의학업무를 전담하게 하는 유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유의제도로 말미암아 유능한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은 물론, 우수한 관리들을 정부 내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의료제도의 개혁 이외에 세종대황은 한국 의학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인간과 땅은 하나이며 한국의 토착 약초들이 한국인의 질병 치료에 도움이 도리 것이라는 신념 위에서 세종대왕은 한국산 약초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세종대왕은 또한 의학자들을 외국에 보내어 약용 식물에 대한 여러 책을 수집,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풍부한 의학 지식을 갖도록 하였다. 그의 목적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제목의 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정종 2년(1399년)에 간행한 《향약집성방》의 내용을 좀더 보완한, 56권으로 되어있는 이 약학 지침서는 959가지 질병의 치료를 다루고 있으며, 각 항목은 병의 증상, 처방, 그러한 정보를 얻은 원전을 수록하고 있다. 이 방대한 양의 지침서는 한국의 의서들을 인용하고 특정한 약용 재료들을 한국의 언제,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그 분포 실태를 조사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한, 당, 송, 원대에 쓰인 중국 의서들을 160종 이상 인용하였다. 《향약집성방》은 한국 의학의 독자성 확립과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4. 음악
세종조를 포함한 조선 전기의 음악은 고려조와 같이 아악(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이라는 삼자 구도로 전승디었지만 세종조에 이르러 대대적인 전환의 국면을 맞았다. 말할 수 없이 미비하였던 아악의 위기, 고려조로부터 이어받은 속악의 난장(亂狀), 고제(古制) 및 고전(古典)에 맞지 않는 용악(用樂)의 예..... 등등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았던 麗末鮮初의 음악 상황을 종합적이고 대대적인 음악 문화사업을 통해 정립시킴으로써 후대에 물려줄 풍부한 음악유산을 이룩한 것이다.
먼저 아악 분야를 보자. 태종대의 음악과 구성의 많은 부분이 그 이전 고려시대의 것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어서 세종대왕과 그의 신하들은 아악이 수정되어야 할 축적된 오류를 여전히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세종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을 주로 제공한 사람은 박연(1378~1458)이라는 신하였는데 그는 고대의 음악을 연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과 한국의 음악에 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하였다. 세종과 박연은 비록 본격적으로 ‘신유학적’이 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송대(960~1279)의 음악과 이론에 특히 의존하였다.
1423년에서 1430년 사이에 세종의 감독하에 박연은 아악에 사용하기 위하여 수백 가지 악기의 제작을 준비하였고 이러한 악기 제작을 위해서 악기도감(樂器都監)이라는 특별한 기관이 세워졌다. 이때 만들어진 악기들로는 칠현금(七絃琴), 생(笙), 봉소(鳳簫), 훈(塤), 여러 종류의 대나무 관악기,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이 국가 제례나 알현의 목적으로 편찬되고 수정되었는데 그 모든 음악이 《아악보》라는 책에 기록되었으며 이 책의 서문은 정인지(1396~1478)가 썼다. 《아악보》는 1454년에 《세종실록》에 첨부되었다. 이러한 악기제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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