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1. 문제제기
2. 개국 외교 공신
II. 장면외교의 정치 사회적 배경 및 대외정책의 기조
1. 가정과 종교 및 교육적 요인
2. 장면정부의 외교정책 배경
3. 국제정치환경 및 외교원칙
III. 장면정부 대외정책의 명.암
1. 대미정책 :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 체결
2. 대일정책 : 한일 회담 재개 및 국교 정상화 시도
3. 대 유엔외교 및 통일정책
4. 제3세계 및 비동맹 중립주의 외교
IV. 외교망의 확대와 외교의 다변화 시도
V. 결론 및 시사점
1. 장면의 안보외교적 리더십 문제
2. 교과서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가로서 한계
1. 문제제기
2. 개국 외교 공신
II. 장면외교의 정치 사회적 배경 및 대외정책의 기조
1. 가정과 종교 및 교육적 요인
2. 장면정부의 외교정책 배경
3. 국제정치환경 및 외교원칙
III. 장면정부 대외정책의 명.암
1. 대미정책 :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 체결
2. 대일정책 : 한일 회담 재개 및 국교 정상화 시도
3. 대 유엔외교 및 통일정책
4. 제3세계 및 비동맹 중립주의 외교
IV. 외교망의 확대와 외교의 다변화 시도
V. 결론 및 시사점
1. 장면의 안보외교적 리더십 문제
2. 교과서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가로서 한계
본문내용
식 민주주의에서도 책임과 원칙 그리고 국민의 이에 맞는 체질개선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등에 대한 명백한 원리를 인식시키지 못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장면의 통치성격의 모호성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대로 자유방임적 그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국민의 정치의식 속에도 병리현상이 분명히 내재하고 있었다. 즉 독재정권 타도에서 세운 눈앞의 성공에 지나치게 자만한 탓으로 정치투입에의 자제를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1956년 대통령선거시의 야당의 슬로건이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대중이 대정부 기대에 있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고 유토피아적인 시간관을 심어준 것이었다. 즉 이승만 정권만 물러나면 민주사회든 경제건설이든 자동적으로 그리고 당장에 이루어진다는 정신상태였던 것 같다. 이러한 통치행태의 과제에의 상반된 이해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사태를 낳고 말았다. 민의원 의장단석 점거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장면 정부는 속수무책이었으며, 설상가상 격으로 61년 3월 22일 혁신계를 중심으로 남북 데탕트를 요구하는 횃불데모가 일어나며 곧이어 4월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북한 학생회담론(5월내 판문점에서 개최)이 튀어 나왔다. 한국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통일문제에 대한 소수 국민계층의 직접적인 간섭이다. 즉 통일안보외교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2. 교과서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가로서 한계
한국 역사상 단군이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식시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각오한 장면은 틀림없이 소신과 신념이 있는 <정치가>였다. 이해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장면은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에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다마오까 쯔도무(王岡勉)라고 창씨개명했다. 그는 그의 뇌리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신만 정확히 하고 있다면 창씨개명을 했다 해서 일본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론을 각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창씨개명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톨릭 재단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창씨개명에 항거함으로써 학교경영의 화 또는 폐교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결단이었다. 그가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5년간 봉사할 때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해방·독립을 맞게 되면 창씨개명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 규탄을 받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소신이요 지론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 성서구절을 그는 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후진국으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 분열되어 항상 상호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상당히 사악하게 만드는 것인데, 장면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인한 투철한 종교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격렬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질책도 퍼부어야 하나, 장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흔히 이를 우유부단 또는 무능으로 매도하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장면처럼 고차적인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정치가 고도로 발전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과 같은, 더욱이 제 2 공화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 지도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장면 정부가 충직하게 고수한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원칙은 통치권력, 즉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지배로부터 야당세력의 대정부비판 또는 반대의 자유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데에는 유익한 이념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들 자신이 통치권력을 획득하고 정부를 운영함에는 지극히 불편한 이념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장면 정부는 서구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할 정도로 창의적이고 대담한 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현실비판과 부정의 논리를 그대로 허용 방치한 결과로 장면 정부의 효율성은 물론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정통성(4·19 혁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장면 정부가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훌륭한 이념이며 제도인가를 인지했을 뿐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 장단점을 가지며 어떠한 환경 여건 속에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현실인식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후 겨우 12년 밖에 안 된 후진적 신생국으로서의 장면 정부나 국민대중이 분단상황하에서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할 단계에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복지의 공약을 순조롭게 성취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한국적 상황하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면 정부의 외교정책 역시 60년대 국제 데탕트 초기의 세계적 국제기류에 편승하여 대 비동맹 중립권 외교의 구상이나 외교망의 확장 계획 역시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국가로서는 한계가 있음이 당연하다. 더욱이 경제발전을 위해 무리한 대일 정상화 추진과 불평등 조약인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의 체결은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불가피성은 인정되지만 무한한 자유의 허용으로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대중의 간섭(데모)과 야당의 대정부 과격 비판 등은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장면 정부의 안보외교 리더십을 훼손시킴으로써 결국 쿠데타를 획책, 기회만 엿보고 있던 박정희 세력에게 정부붕괴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장면 정부는 비록 단명내각으로 정부 출범 당시 제시한 외교원칙들이 이상주의적 정책이었다고 비판받고 있으나, 한국 외교사상 최초로 제 3 세계 외교를 구상 실현하려 했으며 비록 미국원조 수혜국으로서 대미의존도가 심화된 국가재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미의존 탈피를 위해 다변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 대일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 등은 1공화국과 비교해서 외교적 진취성을 띈 장면 정부의 대외 정책이 특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국민의 정치의식 속에도 병리현상이 분명히 내재하고 있었다. 즉 독재정권 타도에서 세운 눈앞의 성공에 지나치게 자만한 탓으로 정치투입에의 자제를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1956년 대통령선거시의 야당의 슬로건이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대중이 대정부 기대에 있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고 유토피아적인 시간관을 심어준 것이었다. 즉 이승만 정권만 물러나면 민주사회든 경제건설이든 자동적으로 그리고 당장에 이루어진다는 정신상태였던 것 같다. 이러한 통치행태의 과제에의 상반된 이해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사태를 낳고 말았다. 민의원 의장단석 점거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장면 정부는 속수무책이었으며, 설상가상 격으로 61년 3월 22일 혁신계를 중심으로 남북 데탕트를 요구하는 횃불데모가 일어나며 곧이어 4월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북한 학생회담론(5월내 판문점에서 개최)이 튀어 나왔다. 한국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통일문제에 대한 소수 국민계층의 직접적인 간섭이다. 즉 통일안보외교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2. 교과서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가로서 한계
한국 역사상 단군이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식시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각오한 장면은 틀림없이 소신과 신념이 있는 <정치가>였다. 이해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장면은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에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다마오까 쯔도무(王岡勉)라고 창씨개명했다. 그는 그의 뇌리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신만 정확히 하고 있다면 창씨개명을 했다 해서 일본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론을 각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창씨개명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톨릭 재단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창씨개명에 항거함으로써 학교경영의 화 또는 폐교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결단이었다. 그가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5년간 봉사할 때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해방·독립을 맞게 되면 창씨개명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 규탄을 받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소신이요 지론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 성서구절을 그는 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후진국으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 분열되어 항상 상호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상당히 사악하게 만드는 것인데, 장면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인한 투철한 종교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격렬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질책도 퍼부어야 하나, 장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흔히 이를 우유부단 또는 무능으로 매도하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장면처럼 고차적인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정치가 고도로 발전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과 같은, 더욱이 제 2 공화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 지도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장면 정부가 충직하게 고수한 자유민주주의의 원리 원칙은 통치권력, 즉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지배로부터 야당세력의 대정부비판 또는 반대의 자유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데에는 유익한 이념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들 자신이 통치권력을 획득하고 정부를 운영함에는 지극히 불편한 이념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장면 정부는 서구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할 정도로 창의적이고 대담한 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현실비판과 부정의 논리를 그대로 허용 방치한 결과로 장면 정부의 효율성은 물론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정통성(4·19 혁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장면 정부가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훌륭한 이념이며 제도인가를 인지했을 뿐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 장단점을 가지며 어떠한 환경 여건 속에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현실인식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후 겨우 12년 밖에 안 된 후진적 신생국으로서의 장면 정부나 국민대중이 분단상황하에서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할 단계에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복지의 공약을 순조롭게 성취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한국적 상황하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면 정부의 외교정책 역시 60년대 국제 데탕트 초기의 세계적 국제기류에 편승하여 대 비동맹 중립권 외교의 구상이나 외교망의 확장 계획 역시 국가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국가로서는 한계가 있음이 당연하다. 더욱이 경제발전을 위해 무리한 대일 정상화 추진과 불평등 조약인 한·미 경제원조기술조약의 체결은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불가피성은 인정되지만 무한한 자유의 허용으로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대중의 간섭(데모)과 야당의 대정부 과격 비판 등은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장면 정부의 안보외교 리더십을 훼손시킴으로써 결국 쿠데타를 획책, 기회만 엿보고 있던 박정희 세력에게 정부붕괴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장면 정부는 비록 단명내각으로 정부 출범 당시 제시한 외교원칙들이 이상주의적 정책이었다고 비판받고 있으나, 한국 외교사상 최초로 제 3 세계 외교를 구상 실현하려 했으며 비록 미국원조 수혜국으로서 대미의존도가 심화된 국가재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미의존 탈피를 위해 다변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 대일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 등은 1공화국과 비교해서 외교적 진취성을 띈 장면 정부의 대외 정책이 특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