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윤선도와 증손 윤두서의 예술혼이 서려 있는 녹우단(綠雨壇)
2.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생애
3.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대표적 작품
4.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시가 문학의 특징
5. 고산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 자화상의 수수께끼
6. 참고문헌
2.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생애
3.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대표적 작품
4.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시가 문학의 특징
5. 고산 윤선도의 증손 윤두서 자화상의 수수께끼
6. 참고문헌
본문내용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는 이이첨, 유희분 등의 횡포와 과거시험의 비리와 부패, 언로의 차단 등을 고발하는 ‘병진상소’(丙辰上疏)를 올렸다. 장선희 정경운, 『호남문학기행』, 박이정, 2000, 140쪽
<병진소>로 인해 그의 양부 윤유기는 관직을 삭탈 당하였으며,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린 윤선도는 두어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곧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42세(인조 6년)에 별시 초시에 장원하여 봉림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본격적인 출사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어서 공조 좌랑 호조 정랑 형조 정랑 성산 현감 등을 지내가 49세(인조 13년)에는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행차를 따르기 위해 뱃길로 강화도를 향했으나, 이내 청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남하하던 중 천석이 수려한 보길도를 발견하였고, 은거에 들어가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으니, 그의 나이 52세 때(인조 16년)의 일이다.
1년이 채 안되는 영덕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 온 윤선도는 해남의 산중에 수정동(水晶洞)과 문소동(聞簫洞) 그리고 금쇄동(金鎖洞)이라 불리우는 또 다른 은거지를 마련하고, 이곳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오가며 은돈 생활의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그의 중기 작품인 <산중신곡(山中新曲)>19수(56세에 지음)와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3수(59세에 지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65세에 지음)는 이 산중과 바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명편들이다.
윤선도가 사부로서 인도하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그는 다시 성균관 사예예조 참의 등의 직함을 받아 조정에 나아갔으나, 역시 조신들의 배척을 받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향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인 <몽천요(夢天謠)> 3수는 이 때(66세)의 심경을 읊조린 것으로 잠시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효종의 사후에는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치러야 할 상례를 둘러 싼 서인과의 논쟁 끝에 74세(현종1년)의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 삼수 땅으로 마지막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광양으로의 이배를 거쳐 7년 만인 81세(현종 8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기거하다 숨을 거두니, 향년 85세였다. 김신중,『은둔의 노래 실존의 미학』, 다지리, 2001. 107-109쪽
고산 선생은 학문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하셨으며, 원림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는다. 해남 육현(六賢)의 한 분으로 향현사(鄕賢祠)인 해촌서원(海村書院) 해남읍 해리 소재
에 배향된 선생은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선비로 조선시대의 손꼽히는 지성이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였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 차례에 걸쳐 십 수년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여 국문학의 비조로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한시는 물론이고 국문시가는 값진 국문학의 보배이다. http://myhome.naver.com/dangmea/
3.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대표적 작품
고산이 각 분야에 남긴 업적은 대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문학에서 국문 문학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킨 점이다. 고산의 문집『고산유고』에는 14세 때부터 83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쓴 한시가 350여 수 실려 있으며 『고산유고』의 제6권 「하별집(下別集)」에 한시문과 가사(歌辭) 75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가사 75수는 장가인 가사(歌辭)가 아니라 단가인 시조를 일컫는 말이다.
고산이 남긴 시조는 모두 75수이며, 전기 - 중기 -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작품은 <견회요> 5수와 <우후요> 1수로 유배지 경원에서 쓰여진 것으이며, 작품에는 적극적인 현실 개입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중기 작품은 <산중신곡> 19수와 <산중속신곡> 3수 및 <어부사시사> 40수로 은둔지인 해남의 산중과 보길도에서 쓰여 졌으며, 작품에는 의식적인 현실 배격의 친자연적 성향이 나타나 있다.
후기 작품은 <몽천요> 3수, 그리고 제작배경이 알려지지 않은 <초연곡(初筵曲)> 과 <파연곡(罷宴曲)> 각 2수가 그것이다. 출사지 양주에서 각각 제작되었으며,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체념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이 75수 중 윤선도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한 것은 은둔지에서의 삶을 노래한 중기의 작품<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이다. 김신중,『은둔의 노래 실존의 미학』, 다지리, 2001. 109-110쪽 참고
그럼, 여기서 고산 윤선도 시조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산중신곡>은 이조 인조 20년에 고산이 전라남도 해남의 보길도 금쇄동에서 지낼 때 아름다운 대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가 56세 때인 1798년(정조 2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되며 당시 그는 병자호란에 임금을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덕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와 금쇄동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고산유고』의 제6권 「하별집(下別集)」가사편에 18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전남 해남의 종가(宗家)의 가첩에는 <고금영>을 포함한 19수가 수록 되어 있다. 만흥(漫興) 6수, 조무요(朝霧謠)《산중신곡(山中新曲)》속에 들어 있는 1수로, 월출산(月出山)의 천왕제일봉을 가리고 있는 안개를 미워한다는 내용인데, 당시 조정을 싸고 도는 간신배에 대한 풍자인 듯하다. 작자의 문집인《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월출산이 놉더니마
<병진소>로 인해 그의 양부 윤유기는 관직을 삭탈 당하였으며,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린 윤선도는 두어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곧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42세(인조 6년)에 별시 초시에 장원하여 봉림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본격적인 출사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어서 공조 좌랑 호조 정랑 형조 정랑 성산 현감 등을 지내가 49세(인조 13년)에는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행차를 따르기 위해 뱃길로 강화도를 향했으나, 이내 청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남하하던 중 천석이 수려한 보길도를 발견하였고, 은거에 들어가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으니, 그의 나이 52세 때(인조 16년)의 일이다.
1년이 채 안되는 영덕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 온 윤선도는 해남의 산중에 수정동(水晶洞)과 문소동(聞簫洞) 그리고 금쇄동(金鎖洞)이라 불리우는 또 다른 은거지를 마련하고, 이곳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오가며 은돈 생활의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그의 중기 작품인 <산중신곡(山中新曲)>19수(56세에 지음)와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3수(59세에 지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65세에 지음)는 이 산중과 바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명편들이다.
윤선도가 사부로서 인도하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그는 다시 성균관 사예예조 참의 등의 직함을 받아 조정에 나아갔으나, 역시 조신들의 배척을 받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향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인 <몽천요(夢天謠)> 3수는 이 때(66세)의 심경을 읊조린 것으로 잠시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효종의 사후에는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치러야 할 상례를 둘러 싼 서인과의 논쟁 끝에 74세(현종1년)의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 삼수 땅으로 마지막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광양으로의 이배를 거쳐 7년 만인 81세(현종 8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기거하다 숨을 거두니, 향년 85세였다. 김신중,『은둔의 노래 실존의 미학』, 다지리, 2001. 107-109쪽
고산 선생은 학문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하셨으며, 원림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는다. 해남 육현(六賢)의 한 분으로 향현사(鄕賢祠)인 해촌서원(海村書院) 해남읍 해리 소재
에 배향된 선생은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선비로 조선시대의 손꼽히는 지성이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였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 차례에 걸쳐 십 수년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여 국문학의 비조로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한시는 물론이고 국문시가는 값진 국문학의 보배이다. http://myhome.naver.com/dangmea/
3.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대표적 작품
고산이 각 분야에 남긴 업적은 대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문학에서 국문 문학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킨 점이다. 고산의 문집『고산유고』에는 14세 때부터 83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쓴 한시가 350여 수 실려 있으며 『고산유고』의 제6권 「하별집(下別集)」에 한시문과 가사(歌辭) 75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가사 75수는 장가인 가사(歌辭)가 아니라 단가인 시조를 일컫는 말이다.
고산이 남긴 시조는 모두 75수이며, 전기 - 중기 -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작품은 <견회요> 5수와 <우후요> 1수로 유배지 경원에서 쓰여진 것으이며, 작품에는 적극적인 현실 개입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중기 작품은 <산중신곡> 19수와 <산중속신곡> 3수 및 <어부사시사> 40수로 은둔지인 해남의 산중과 보길도에서 쓰여 졌으며, 작품에는 의식적인 현실 배격의 친자연적 성향이 나타나 있다.
후기 작품은 <몽천요> 3수, 그리고 제작배경이 알려지지 않은 <초연곡(初筵曲)> 과 <파연곡(罷宴曲)> 각 2수가 그것이다. 출사지 양주에서 각각 제작되었으며,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체념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이 75수 중 윤선도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한 것은 은둔지에서의 삶을 노래한 중기의 작품<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이다. 김신중,『은둔의 노래 실존의 미학』, 다지리, 2001. 109-110쪽 참고
그럼, 여기서 고산 윤선도 시조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산중신곡>은 이조 인조 20년에 고산이 전라남도 해남의 보길도 금쇄동에서 지낼 때 아름다운 대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가 56세 때인 1798년(정조 2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되며 당시 그는 병자호란에 임금을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덕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와 금쇄동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고산유고』의 제6권 「하별집(下別集)」가사편에 18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전남 해남의 종가(宗家)의 가첩에는 <고금영>을 포함한 19수가 수록 되어 있다. 만흥(漫興) 6수, 조무요(朝霧謠)《산중신곡(山中新曲)》속에 들어 있는 1수로, 월출산(月出山)의 천왕제일봉을 가리고 있는 안개를 미워한다는 내용인데, 당시 조정을 싸고 도는 간신배에 대한 풍자인 듯하다. 작자의 문집인《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월출산이 놉더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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