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창, 구결, 이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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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창, 구결, 이두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 론∙∙∙∙∙∙1p

Ⅱ본 론
1. 어휘표기∙∙∙∙∙∙2p
2. 이 두∙∙∙∙∙∙3p
3.향 찰∙∙∙∙∙∙7p
4.구 결∙∙∙∙∙∙10p

Ⅲ결 론∙∙∙∙∙∙17p

#참고문헌∙∙∙∙∙∙18p

본문내용

서지체(吏胥之體)’라고도 불렀다. 훈민정음 창제 후 이두는 그 존재가치를 상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훈민정음 이전부터 써내려오던 관습으로 인하여 사용되어 오다가 사회적으로 서리계층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문어로 굳어져 19세기말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로 대체될 때까지 쓰인 것이다.
3. 향찰
(1)『삼국유사(三國遺事)』와 『균여전(均如傳)』의 향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의 언어가 어느 시대의 언어인가를 고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 노래들이 지어진 시대는 작품에 따라 각기 다르다. 멀리는 삼국시대인 진평왕 때부터 가까이는 9세기 후반 헌강왕 때까지 걸친 것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향가는 작품이 이루어진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13세기 후반 『삼국유사』가 저술된 때에 와서야 문자로 정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이 신라시대의 언어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이 작품을 문자화한 일연(一然)이 이 노래의 내용을 이해하고 『삼국유사』에 실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유사』의 원간은 1310년대에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의 손으로 된 듯하나 전하는 책이 없고, 조선 초기에 간행된 중간본이 영본으로 전하며 완질은 16세기의 중간본이 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향가의 본래 표기와 와전된 부분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로 잡을 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들 작품의 언어를 고대국어로 추정하는 데는 세심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향가들의 문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의 석독구결이 있다. 석독구결 등의 연구를 통하여 향가의 언어를 고증하면 많은 부분에서 새로운 해독이 가능할 것이다.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11수의 향가로 아루어진 것이다.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광종 때인 10세기 중반에 지은 것이므로 고려시대 초기의 국어를 반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한 작가에 의하여 동시에 지어진 작품이므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합한 『삼국유사』의 향가보다는 훨씬 일관성이 있다. 또 최행귀(崔行歸)의 한역시(漢譯詩)가 붙어 있고 40권본(卷本) 『화엄경(華嚴經)』에 바탕을 둔 노래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확실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노래도 지어진 지 100여 년 후인 1075년에 혁련정(赫連挺)이 편찬한 『균여전(均如傳)』에 실려 전하던 것을 13세기 중엽의 승려인 천기(天其)가 간행한 대장경 속에 수록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원전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외에 고려시대의 향가로 전하는 것에는 예종(睿宗)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다.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년)에 지은 것이지만 1636년의 간기(刊記)를 가진 『평산신씨세보(平山申氏世譜)』에 실린 ‘太師開國壯節 行狀 및 跋’에 실려 전한다. 신흠(申欽)의 발(跋)에 의하면 이 행장은 임진왜란 전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나 난으로 인하여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을 후손이 수습한 것이라 한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표기법이나 언어 사실은 12세기의 것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전승과정에서 일어난 잘못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지었다고 하는 <승원가(僧元歌)>가 있다. 차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완전히 표기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 문자화되었고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고려시대의 국어자료로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차자표기 자료에 신득청(申得淸)이 지었다고 하는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가 있다. 역시 18세기 이후의 언어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향찰이 18세기 이후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2) 경기체가(景幾體歌)
또 다른 향창자료로는 차자표기로 된 고려의 가요 중에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있다. 고려 고종 때에 당대의 학자들이 지었다고 하는 <한림별곡(翰林別曲)>과 안축(安軸. 1282~1348)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이 그것이다.
한자어들을 우리말의 순서로 열거하고 끝에 ‘……景 幾如何/景 긔 엇더하닛고’를 붙이는 형식의 노래다. 향찰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자료로 새로이 주목해야 할 것은 ‘기(記. 또는 記釋)’ 또는 ‘석의(釋義)’이다. 『균여전』에서는 균여가 남긴 기석을 10종 열거하고 있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석화엄지귀장원통기(釋華嚴旨歸章圓通記)>, <화엄경삼보장원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 등 5종이다. 이들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발기(跋記)를 보면 모두 방언 또는 신라의 고어가 섞여 있었던 것인데 후대에 그 방언을 삭제하고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찌기 양재연 선생은 이것이 곧 향찰이라고 하였다. 이 기석은 균여의 강의를 그 제자들이 집록(集錄)한 것으로 원문에 대한 풀이와 주해가 동시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한문구도 없을 수 없으나 우리말의 표현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조선시대 자료로 현재 남아 전하는 시경석의 등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3) 향찰표기법의 특징
향찰을 대표하는 향가는 아직 완전한 해독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가운데 해독이 분명한 것을 중심으로 향찰표기법의 특성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개념부의 표기
① 음독자표기; 太平, 善化公主, 薯童房, 四十八大願.
② 훈독자표기; 春·봄, 母牛·암쇼, 浮去·@[ㅳㅡ]가-, 憂(音)·시름, 岩(乎)·바회.
③ 가자표기; 毛冬·모@[ㄷㆍㄹ], 於冬是·어드리, 於內·어@[ㄴㆍ], 阿孩·아@[ㅎㆍㅣ], 阿邪也·아야야.
2) 토의 표기
① 말음첨기; 憂音·시름, 夜音·밤, 道尸·길, 有叱·잇-, 岩乎·바회, 折叱可·것가, 前乃·저나.
② 조사의 표기; ⓐ주격-雪是·눈이, 脚烏伊·가로리. ⓑ속격-耆郞矣모史·耆郞@[ㅇㆍㅣ] 즈시, 蓬次叱巷中·다

키워드

향찰,   이두,   구결,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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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0.04.18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0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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