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1 올바른 접근
제 1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02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03 그리스도의 인격 04 그리스도의 부활
제2부 인간의 상태
05 죄의 실상과 성격 06 죄의 결과
제3부 그리스도가 하신 일
07 그리스도의 죽음 08 그리스도의 구원
제4부 인간이 해야 할 일
09 비용 계산 10 결정 11 그리스도인의 삶
제 1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02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03 그리스도의 인격 04 그리스도의 부활
제2부 인간의 상태
05 죄의 실상과 성격 06 죄의 결과
제3부 그리스도가 하신 일
07 그리스도의 죽음 08 그리스도의 구원
제4부 인간이 해야 할 일
09 비용 계산 10 결정 11 그리스도인의 삶
본문내용
생활의 모범으로 주나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이익을 우리가 항상 감사함으로 받게 하옵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삶의 복된 발자취를 따르도록 날마다 우리 스스로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Stott는 “그리스도를 지옥으로 보냈다”라고 서슴없이 제시한다. 1초라도 그리스도는 지옥에 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가 있는데, 신비를 풀어 지옥에 갔다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제 8 장 그리스도의 성령과 그리스도 교회
구원은 죄만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나쁜 결과도 극복할 수 있다 죄의 근원의 청산은 죄의 나쁜 결과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지, 서로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죄의 근원이 없는데, 죄의 나쁜 열매가 맺힌 다는 것은 근원이 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즉 구원이란 말은 포괄적인 술어이다.
(1) 그리스도의 성령
좋은 열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외부적인 행동은 우리 내부적인 본성의 표현이다. 내부의 본성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 새로운 성품은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탄생이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탄생이며 거듭난 것이다.
첫째, 성령은 오순절에 생겨난 것도 아니며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구약성경의 예언. 성령의 활동이 증가되고 확장되는 때를 기독교의 시작으로 알고 기다렸다. 성령의 활동이 증가되고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승천에 의해서 성령이 파송됨의 분기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돌판에 기록된 법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 자신이 지상에 있었던 것보다 그에게 더 나았다. 고 제시하면서 대한 성경구절은 요 16:7, 14:7을 제시하고, 공생애에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지만 성령충만한 시기와 구별하였다. Stott의 이해는 예수님의 사역보다 성령의 사역이 더 우월하다는 모호하고 위험한 발상을 준다. 뒤에서 그는 예수님의 성령이 의해서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놓친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의 힘의 소멸은 내재하는 성령에 의해서라고 도식을 수립한다.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서 소멸되고 극복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교회
죄는 이웃, 창조주로부터 이간질시킨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모든 악한 결과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언약을 세웠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시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저주로 보았다. 이방세계의 혜택을 추구했고,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도래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다.
그리스도께서 왔다. 나사렛 예수는 오랫 동안 기다리던 천국이 가까웠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를 지칭하셨다. 이 하나님의 언약은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로 성장하여 실현되었다. 몸을 하나로 단결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한 성령에 의해 조성된 이 영적 통일성은 때때로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적인 교회와 볼 수 있고 지역적인 개 교회들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한다.
슬프다! 외면적으로 세례를 받고 외형적 교회의 회원으로 환영받은 사람들 중에도 위에서부터 나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영접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성령의 첫 열매는 사랑이다. 그의 본성이 사랑이며 그가 내재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준다. 비록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다할지라도 -많은 오점과 추악을 갖은 - 교회에서 상호교제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넓은 세계에 그리스도을 증거하여 믿는 형제들을 규합시켜야 한다.
[John Stott의 “기독교 기본 진리” 비평]
한국 기독교 교회에서 Stott의 [기독교 기본 진리]는 입문서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Stott의 신학사조는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권성수 교수에 의해서 영원멸절설에 대해서, 차영배 교수에 의해서 성령 이해에 대해서 비판을 받았다. Stott는 한국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수 많은 찬사 속에서 비판은 함몰되었다. 찬사 속에서 Stott의 신학의 근본에 대해서는 평가되지 못하고 파편적인 진술에 의해서 전체가 평가되었다. 본 정리자는 Stott의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 사조가 Karl Barth와 유사하거나 동일함을 인식하였다. Karl Barth는 Harnak의 사조를 거의 반영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계승자라고 생각한다. Karl Barth가 그의 스승인 하르낙을 거부한 것은 종교를 거부한 것까지 동일하지만, 과격하게 종교를 궤멸시키는 것에는 하르낙이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Barth는 자기에게 부합하지 않는 종교를 파멸(폐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Stott는 이러한 유럽의 근대 및 현대 사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런데 복음주의의 지성으로 한국에 소개됨으로 거의 모두 비판 없이 스토트의 내용을 찬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유럽의 근대, 현대 철학과 신학 사조에 대해서 전무하기 때문이다. 혹 근, 현대 사조를 모른다할지라도, 고대 정통 신학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면 Stott의 문제점에 대해서 쉽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인식하길 바라며 스토트의 저작을 요약하며 비판을 계획하였다.
존 스토트는 시작에서 ‘창조’에서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시작한다. John R. Stott,『기독교 기본 진리』, 윤상범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62), 9-14. cf) 이하부터는 『기독교 기본 진리』는 BC로 표기한다.
그것은 스토트 신학의 시작이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 아닌 ‘하나님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하는 신학은 현대 신학의 사조이다. 정통 기독교 신학은 십자가의 구속에서 시작해서 창조를 인식하면서 순환적인 구조에서 영원한 경륜의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인간을 바라본다. 현대 신학 사조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가치로 귀결한다.
Stott는 “그리스도를 지옥으로 보냈다”라고 서슴없이 제시한다. 1초라도 그리스도는 지옥에 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가 있는데, 신비를 풀어 지옥에 갔다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제 8 장 그리스도의 성령과 그리스도 교회
구원은 죄만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나쁜 결과도 극복할 수 있다 죄의 근원의 청산은 죄의 나쁜 결과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지, 서로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죄의 근원이 없는데, 죄의 나쁜 열매가 맺힌 다는 것은 근원이 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즉 구원이란 말은 포괄적인 술어이다.
(1) 그리스도의 성령
좋은 열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외부적인 행동은 우리 내부적인 본성의 표현이다. 내부의 본성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 새로운 성품은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탄생이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탄생이며 거듭난 것이다.
첫째, 성령은 오순절에 생겨난 것도 아니며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구약성경의 예언. 성령의 활동이 증가되고 확장되는 때를 기독교의 시작으로 알고 기다렸다. 성령의 활동이 증가되고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승천에 의해서 성령이 파송됨의 분기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돌판에 기록된 법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 자신이 지상에 있었던 것보다 그에게 더 나았다. 고 제시하면서 대한 성경구절은 요 16:7, 14:7을 제시하고, 공생애에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지만 성령충만한 시기와 구별하였다. Stott의 이해는 예수님의 사역보다 성령의 사역이 더 우월하다는 모호하고 위험한 발상을 준다. 뒤에서 그는 예수님의 성령이 의해서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놓친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의 힘의 소멸은 내재하는 성령에 의해서라고 도식을 수립한다.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서 소멸되고 극복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교회
죄는 이웃, 창조주로부터 이간질시킨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모든 악한 결과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언약을 세웠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시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저주로 보았다. 이방세계의 혜택을 추구했고,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도래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다.
그리스도께서 왔다. 나사렛 예수는 오랫 동안 기다리던 천국이 가까웠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를 지칭하셨다. 이 하나님의 언약은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로 성장하여 실현되었다. 몸을 하나로 단결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한 성령에 의해 조성된 이 영적 통일성은 때때로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적인 교회와 볼 수 있고 지역적인 개 교회들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한다.
슬프다! 외면적으로 세례를 받고 외형적 교회의 회원으로 환영받은 사람들 중에도 위에서부터 나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영접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성령의 첫 열매는 사랑이다. 그의 본성이 사랑이며 그가 내재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준다. 비록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다할지라도 -많은 오점과 추악을 갖은 - 교회에서 상호교제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넓은 세계에 그리스도을 증거하여 믿는 형제들을 규합시켜야 한다.
[John Stott의 “기독교 기본 진리” 비평]
한국 기독교 교회에서 Stott의 [기독교 기본 진리]는 입문서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Stott의 신학사조는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권성수 교수에 의해서 영원멸절설에 대해서, 차영배 교수에 의해서 성령 이해에 대해서 비판을 받았다. Stott는 한국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수 많은 찬사 속에서 비판은 함몰되었다. 찬사 속에서 Stott의 신학의 근본에 대해서는 평가되지 못하고 파편적인 진술에 의해서 전체가 평가되었다. 본 정리자는 Stott의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 사조가 Karl Barth와 유사하거나 동일함을 인식하였다. Karl Barth는 Harnak의 사조를 거의 반영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계승자라고 생각한다. Karl Barth가 그의 스승인 하르낙을 거부한 것은 종교를 거부한 것까지 동일하지만, 과격하게 종교를 궤멸시키는 것에는 하르낙이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Barth는 자기에게 부합하지 않는 종교를 파멸(폐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Stott는 이러한 유럽의 근대 및 현대 사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런데 복음주의의 지성으로 한국에 소개됨으로 거의 모두 비판 없이 스토트의 내용을 찬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유럽의 근대, 현대 철학과 신학 사조에 대해서 전무하기 때문이다. 혹 근, 현대 사조를 모른다할지라도, 고대 정통 신학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면 Stott의 문제점에 대해서 쉽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인식하길 바라며 스토트의 저작을 요약하며 비판을 계획하였다.
존 스토트는 시작에서 ‘창조’에서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시작한다. John R. Stott,『기독교 기본 진리』, 윤상범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62), 9-14. cf) 이하부터는 『기독교 기본 진리』는 BC로 표기한다.
그것은 스토트 신학의 시작이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 아닌 ‘하나님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하는 신학은 현대 신학의 사조이다. 정통 기독교 신학은 십자가의 구속에서 시작해서 창조를 인식하면서 순환적인 구조에서 영원한 경륜의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인간을 바라본다. 현대 신학 사조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가치로 귀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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