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의의
Ⅱ.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역사
Ⅲ.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영향
Ⅳ.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유래
Ⅴ. 풍수지리(풍수지리설)와 풍수설화
1. 행복 추구의 의지
2.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에 대한 보상
3.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4. 운명과 의지의 조화
5. 현세 중심의 세계관
Ⅵ. 풍수지리(풍수지리설)와 풍수사
1. 도선
2. 무학
3. 남사고
4. 정북창
5. 이토정
6. 서산대사
7. 두사총
8. 이서계
Ⅶ.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기법
1. 용법과 구성산형
2. 혈장의 지하수맥, 기맥선 분석
3. 양택명당의 지하수맥, 기맥선 측정
참고문헌
Ⅱ.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역사
Ⅲ.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영향
Ⅳ.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유래
Ⅴ. 풍수지리(풍수지리설)와 풍수설화
1. 행복 추구의 의지
2.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에 대한 보상
3. 선의 승리에 대한 믿음
4. 운명과 의지의 조화
5. 현세 중심의 세계관
Ⅵ. 풍수지리(풍수지리설)와 풍수사
1. 도선
2. 무학
3. 남사고
4. 정북창
5. 이토정
6. 서산대사
7. 두사총
8. 이서계
Ⅶ. 풍수지리(풍수지리설)의 기법
1. 용법과 구성산형
2. 혈장의 지하수맥, 기맥선 분석
3. 양택명당의 지하수맥, 기맥선 측정
참고문헌
본문내용
자는 경칭하여 지관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기에 풍수사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한문지식에 해박해야 되고 풍수의 서적을 여러 권 학습한 후 선배 풍수사에게 실지(실지)의 지도과정을 거친 후에 드디어 전국의 산을 답산하여 이론과 실제의 부합여부를 공부한 후에야 풍수사에 자격을 얻게 되었으므로 풍수사가 되기 위하여서는 십여 년의 오랜 연구가 필요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관으로 임용될 수 있는 자는 모든 과정 을 이수한 후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지리학과의 전부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풍수사는 한문의 지식이 많은 자만이 공부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경제적으로 계급적으로 여유가 있는 양반 이상 신분이나 시도할 수 있는 학문으로 풍수사의 지위에 오른 자는 사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다른 점성술이나 맹인 무녀의 업과는 본질적으로는 차원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풍수사의 일정한 자격규준이 정하여져 있지 않은 관계로 풍수의 이론이나 실제에 통달하지 않은 자도 풍수사로 자칭하여 일반인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풍수사는 한문의 실력이 많은 자만이 공부할 수 있어서 과거로부터 승려에게 많은 풍수사가 배출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풍수사로는 도선(신라말) 무학(이조) 서산대사, 휴정(이조선조시대), 남사고(이조명종) 등이 있다.
1. 도선
도선의 자는 옥룡 호는 연기 성은 최씨로 낭천 구림촌 사람이다. 그 어머니의 최씨가 겨울에 우물에서 얻은 오이를 먹고 임신하여 낳으니 아버지가 없음으로 어머니 성을 쫓아 최씨라 했다.
나서 얼마 안 되어 숲에 버리니 많은 비둘기가 모여 와서 젖으로 길렀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다. 인하여 이를 구림(구림)이라 하였다. 그는 열세 살에 당나라 배를 따라 당에 들어가 일행선사를 사사했다 한다. 어떤 책에는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 한 덩이를 보내어 이걸 먹게 했다. 그로부터 임신했다는데 나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아주 달랐다고 했다.
무지승현에는 신라사람 최씨가 동산에 오이가 있어 한자 남짓한 것을 따먹고 임신되어 달을 거듭하여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그 예사와 다르게 난것을 나쁘게 여겨 대숲에 버렸다. 수일이 지나서 나서보니 비둘기와 독수리가 와서 아기를 날개로 덮고 있었다. 부모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다 길렀다. 성장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도선이라 이름 했다. 후에 그 땅을 구림이라 했다.
나이 열다섯에 영민하고 숙성했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독수하니 해를 넘기지 않아 대의에 통했다. 신라 흥덕왕원년(AD 826)에 나서 칠십이 세로 신라 효공왕이년(AD 898)에 입적했다.
그 시로 도선국사이다. 입적할 즈음에 하루는 제자를 불러 「나는 장차 가련다. 인연을 타고 왔다가 인연이 다하여 가는 것이 도리에 떳떳한 일이거든 어찌 슬퍼할 것이냐?」하고 도사리고 앉아 입적했다. 그가 남긴 음양설 수편이 있어 후세의 풍수지리를 말하는 이는 다 그를 종으로 하고 있다.
오산설임초영에 「도선국사를 말하는 이가 당나라 일행의 제자라 함은 잘못이다. 일행은 당나라 현종 때 사람이요 도선은 왕태조의 아버지 융과 같은 때의 사람이다. 왕태조의 고려는 바로 조씨의 송나라와 때를 같이했다. 그러니 도선과 서로 상거하기 수백 년일 뿐 아니라 그를 일행의 문인이라 한 것은 어찌 망녕되지 않겠느냐?」하였다.
도선은 고려 왕건이 탄생하기 앞서 왕건이 탄생하여 삼한을 통일하여 국가를 일으킬 것을 예언하여 맞힌 것으로도 유명하고 그가 풍수설을 전한 이래 고려 일제는 물론 이조를 통하여 국민사이에 풍수지상법을 깊이 스며들게 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도선의 저로 정감록, 도선밀기가 있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의 위찬이며 현재 정감록이란 이름 속에 편입되어 있는 도선비결도 그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도선 비결이 도선의 저작한 것이라면 고려와 이조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고려 사백년을 껑충 뛰어서 이조 오백년의 일만을 예언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선 비결에 「임신년에 섬오랑캐가 나라를 좀먹으니 가히 송백에 의지할 것이요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하니, 산도 이롭지 못하고 물도 이롭지 못하고 궁궁이 이롭다 」라고 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예언한 것으로 더욱 유명해 졌다.
2. 무학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 무학은 그 로서 삼기군 사람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십사년( AD 1327)에 나서 이조 태종오년(AD 1405)에 입적하니 그 나이가 칠십구 세였다.
무학은 이태조가 등국하기 전에 태조의 꾼 꿈을 해몽하여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여 맞힌 것으로 유명하고 또 태조가 등국한 후에 팔도의 방백에게 교하여 무학을 찾게 하였으나 해가 넘도록 찾지 못하였다. 그 후 기순(기전) 해서 , 개서의 세 방백이 함께 길을 같이하여 이를 찾아 곡산(황해도) 고달산에 이르니 산 아래에 초가 두어 채가 있고 거기에 한 고승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세방백이 그 추종을 버리고 그 동에 들어가서 세 인을 소나무에 걸어 놓고 짚신을 신고 도보로 걸어 그 초암에 이르니 한 중이 소코잠방이들 입고 손에 호미를 잡고 나물밭을 매고 있거늘 세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이 암자는 누가 창건한 것이요?」
「노승이 손수 얽어 만든 것이니다.」
「무슨 소견으로 여기 복거하는 거요?」
「저 삼인봉 때문이니이다.」
「무엇을 삼인봉이라고 하는고?」
「당전한 세 봉우리 이것이 세 개의 인이니 만약 집을 여기에 지으면 마땅히 삼도의 관찰사가 세 개의 인을 동중나무 위에 거니 이것이 그것에 상응하는 것이니이다.」
하니 세 방백이 뛰어나가 손을 잡고
「이이가 무학이도다」
하고 이와 함께 돌아가 태조께 상문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섬기기를 스승의 에로써 하고 인하여 무학이 곧 한양에 이르러
「인왕산을 진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용호로 하소서」
하니 정도전이 이걸 비난하여
예로부터 임금은 모두 남면하여 다스리고 동향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하니 무학이 「내말을
초기에 풍수사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한문지식에 해박해야 되고 풍수의 서적을 여러 권 학습한 후 선배 풍수사에게 실지(실지)의 지도과정을 거친 후에 드디어 전국의 산을 답산하여 이론과 실제의 부합여부를 공부한 후에야 풍수사에 자격을 얻게 되었으므로 풍수사가 되기 위하여서는 십여 년의 오랜 연구가 필요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관으로 임용될 수 있는 자는 모든 과정 을 이수한 후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지리학과의 전부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풍수사는 한문의 지식이 많은 자만이 공부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경제적으로 계급적으로 여유가 있는 양반 이상 신분이나 시도할 수 있는 학문으로 풍수사의 지위에 오른 자는 사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다른 점성술이나 맹인 무녀의 업과는 본질적으로는 차원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풍수사의 일정한 자격규준이 정하여져 있지 않은 관계로 풍수의 이론이나 실제에 통달하지 않은 자도 풍수사로 자칭하여 일반인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풍수사는 한문의 실력이 많은 자만이 공부할 수 있어서 과거로부터 승려에게 많은 풍수사가 배출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풍수사로는 도선(신라말) 무학(이조) 서산대사, 휴정(이조선조시대), 남사고(이조명종) 등이 있다.
1. 도선
도선의 자는 옥룡 호는 연기 성은 최씨로 낭천 구림촌 사람이다. 그 어머니의 최씨가 겨울에 우물에서 얻은 오이를 먹고 임신하여 낳으니 아버지가 없음으로 어머니 성을 쫓아 최씨라 했다.
나서 얼마 안 되어 숲에 버리니 많은 비둘기가 모여 와서 젖으로 길렀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다. 인하여 이를 구림(구림)이라 하였다. 그는 열세 살에 당나라 배를 따라 당에 들어가 일행선사를 사사했다 한다. 어떤 책에는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 한 덩이를 보내어 이걸 먹게 했다. 그로부터 임신했다는데 나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아주 달랐다고 했다.
무지승현에는 신라사람 최씨가 동산에 오이가 있어 한자 남짓한 것을 따먹고 임신되어 달을 거듭하여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그 예사와 다르게 난것을 나쁘게 여겨 대숲에 버렸다. 수일이 지나서 나서보니 비둘기와 독수리가 와서 아기를 날개로 덮고 있었다. 부모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다 길렀다. 성장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도선이라 이름 했다. 후에 그 땅을 구림이라 했다.
나이 열다섯에 영민하고 숙성했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독수하니 해를 넘기지 않아 대의에 통했다. 신라 흥덕왕원년(AD 826)에 나서 칠십이 세로 신라 효공왕이년(AD 898)에 입적했다.
그 시로 도선국사이다. 입적할 즈음에 하루는 제자를 불러 「나는 장차 가련다. 인연을 타고 왔다가 인연이 다하여 가는 것이 도리에 떳떳한 일이거든 어찌 슬퍼할 것이냐?」하고 도사리고 앉아 입적했다. 그가 남긴 음양설 수편이 있어 후세의 풍수지리를 말하는 이는 다 그를 종으로 하고 있다.
오산설임초영에 「도선국사를 말하는 이가 당나라 일행의 제자라 함은 잘못이다. 일행은 당나라 현종 때 사람이요 도선은 왕태조의 아버지 융과 같은 때의 사람이다. 왕태조의 고려는 바로 조씨의 송나라와 때를 같이했다. 그러니 도선과 서로 상거하기 수백 년일 뿐 아니라 그를 일행의 문인이라 한 것은 어찌 망녕되지 않겠느냐?」하였다.
도선은 고려 왕건이 탄생하기 앞서 왕건이 탄생하여 삼한을 통일하여 국가를 일으킬 것을 예언하여 맞힌 것으로도 유명하고 그가 풍수설을 전한 이래 고려 일제는 물론 이조를 통하여 국민사이에 풍수지상법을 깊이 스며들게 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도선의 저로 정감록, 도선밀기가 있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의 위찬이며 현재 정감록이란 이름 속에 편입되어 있는 도선비결도 그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도선 비결이 도선의 저작한 것이라면 고려와 이조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고려 사백년을 껑충 뛰어서 이조 오백년의 일만을 예언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선 비결에 「임신년에 섬오랑캐가 나라를 좀먹으니 가히 송백에 의지할 것이요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하니, 산도 이롭지 못하고 물도 이롭지 못하고 궁궁이 이롭다 」라고 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예언한 것으로 더욱 유명해 졌다.
2. 무학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 무학은 그 로서 삼기군 사람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십사년( AD 1327)에 나서 이조 태종오년(AD 1405)에 입적하니 그 나이가 칠십구 세였다.
무학은 이태조가 등국하기 전에 태조의 꾼 꿈을 해몽하여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여 맞힌 것으로 유명하고 또 태조가 등국한 후에 팔도의 방백에게 교하여 무학을 찾게 하였으나 해가 넘도록 찾지 못하였다. 그 후 기순(기전) 해서 , 개서의 세 방백이 함께 길을 같이하여 이를 찾아 곡산(황해도) 고달산에 이르니 산 아래에 초가 두어 채가 있고 거기에 한 고승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세방백이 그 추종을 버리고 그 동에 들어가서 세 인을 소나무에 걸어 놓고 짚신을 신고 도보로 걸어 그 초암에 이르니 한 중이 소코잠방이들 입고 손에 호미를 잡고 나물밭을 매고 있거늘 세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이 암자는 누가 창건한 것이요?」
「노승이 손수 얽어 만든 것이니다.」
「무슨 소견으로 여기 복거하는 거요?」
「저 삼인봉 때문이니이다.」
「무엇을 삼인봉이라고 하는고?」
「당전한 세 봉우리 이것이 세 개의 인이니 만약 집을 여기에 지으면 마땅히 삼도의 관찰사가 세 개의 인을 동중나무 위에 거니 이것이 그것에 상응하는 것이니이다.」
하니 세 방백이 뛰어나가 손을 잡고
「이이가 무학이도다」
하고 이와 함께 돌아가 태조께 상문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섬기기를 스승의 에로써 하고 인하여 무학이 곧 한양에 이르러
「인왕산을 진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용호로 하소서」
하니 정도전이 이걸 비난하여
예로부터 임금은 모두 남면하여 다스리고 동향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하니 무학이 「내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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