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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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식민지 근대화론-중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1.1. 근대화의 정의
1.2. 식민지 근대화 이론의 정의

2. 본론
2.1.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과 근거
2.2. 식민지 근대화론비판에 대한 주장과 근거

본문내용

질적인 문제가 되어야 할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와 분배관계에서의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간의 민족적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인구, GDP, 그리고 1인당 GDP에 대한 시계열 통계를 한 ‘앵거스 메디슨’의 자료를 통해 20세기 한국의 1인당 GDP를 그래프로 그리면 왼쪽 그래프와 같다.
그래프에서는 한국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중엽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더불어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대로 과연 일제강점기하의 조선의 경제발전이 1960~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의 완성의 토대가 되었을까?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일제 강점기 조선의 경제발전에 대한 주장들이 여러 측면에서, 심지어 자신들이 내세우는 실증적인 면에서조차 비판되고 타당성을 가지기 힘들게 되자, 급기야 이제는 그러한 물적인 것이 아닌 식민지 시절 일제의 근대적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경영 경험을 의미하는 인적 인프라가 1960~1970년대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의 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데에 대한 근거는 1991년 당시의 기준으로 한국의 50대 재벌기업의 설립자 중 60%가 식민지 시절의 사업경험을 어느 정도씩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60~1970년대의 한국의 고도성장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교육이나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포드재단 등의 재정지원으로 제2k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의 조속한 국가발전을 위한 ‘발전 행정론’의 영향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의 경영학 기술의 도입에 의해 구조상으로는 높은 교육열에 의한 급속한 고학력자의 증가 등의 인적 인프라에 의해서인 것이지, 결코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일제 강점기의 교육이나 기술이 토대가 된 것이 아니다. 아래의 표에서 볼수 있듯이 해방 직전인 1944년에도 중학교 졸업 이상의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불과 전체 인구의 1.03%에 불과했고,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불과 전체 인구의 0.13%에 불과했다. 그러한 교육 수준으로는 아무리 상층부의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뛰어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할지라도 그러한 정책이나 경영을 실제로 수행할 하층부의 인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했을 때 2년도 되지 않은 ㅖ은 기간인 1947년 5월말에 초등학교 학생수는 59%, 교사 수는 13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등학교 학생수는 100%, 교사 수는 400% 급증했다. 고등교육은 더욱 팽창했다. 교육에 대한 이런 높은 열기가 계속되어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2005년에는 전체 인구의 22.2%가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게 되었고, 무학은 불과 전체 인구의 5.3%로 떨어졌다. 이처럼 오히려 일제 강점기가 아닌, 조선의 해방이 1960~197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의 배경이 되는 교육열을 이끌어낸 것이며, 다시 말해 일제의 식민지배는 오히려 이러한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뜨거운 욕구를 억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대자본 또는 독점자본이 조선에 투자해 조선의 공업이 발전했고, 이에 따라 조선인이 운영하는 공장 수, 자본금, 진출 업종이 많이 늘어나게 된 것만은 사실이나, 민족별로 이중적인 공업구조 때문에 그것이 조선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조선인의 공업은 근대적인 대공업으로는 발전할 전망이 없었다. 하지만 해방은 한국인 기업에 제약 없이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해방 후 경공업에서 시작된 한국의 공업 발전은 1960~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거치며 눈부시게 성장했다. 특히 조선, 자동차, 일반 기계등의 일부 업종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기업환경과 해방 후 기업환경을 비교해본다면 식민지 체제의 청산, 즉 해방이 한국의 기업 발전에도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실질적인 민중의 삶의 질에 있어서도, 일제 강점기엔 1930년대 말까지 노동의 공급과잉 때문에, 그리고 노동에 대한 초과수요가 발생하는 1940년대의 전시 통제경제시기에는 임금에 대한 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조선인의 실질적인 임금은 겨우 생존가능한 수준을 밑돌았다. 해방 후에도 이런 상황은 60년대까지 계속 되었다. 해방 후 한국이 다시 농업국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농업생산마저 충분하지 못해 보릿고개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보릿고개가 없어지게 된 것은 역시 1970년대 들어서이다. 비로소 한국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면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그제야 실질적인 임금도 생존수준을 넘어 상승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결국 결론적으로 일제 강점기, 즉 20세기 전반기는 뉴 라이트 계열의 경제학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식민지 조선의 경제가 여전히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당시의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하던 시기였고, 이런 정체상태에서 벗어나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된 시기는 1960년대 중엽 이후이며,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서의 식민지 조선 경제의 근대화를 운운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실증통계의 부실과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근대적 요소만을,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주장하며 결론에 의도적으로 맞추기 위한 목적론적 해석인 것이다. 허수열 교수님
1951년 대구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 동 대학원 석, 박사
일본 교토대 초빙 외국인 학자,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현 충남대학교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 : ‘개발없는 개발:일제하 조선경제개발의 현상과 본질’, ‘역사학과 지식정보사회’, ‘정보통신혁명과 사회변화’
2006년 11월 ‘임종국 상’ 학술부문 수상
  • 가격2,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11.09.01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9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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