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기존 연구의 검토
2. 연구 목적
Ⅱ. 송강 정철의 생애와 시대상황
1. 송강 정철의 생애
1) 유년시절
2) 청년시절
3) 정계시절
4) 환로의 진퇴
2. 시대적 문단의 현황
1) 사회적 상황
2) 주자학적 문학관
3) 15~16세기 가사문학의 특징
Ⅲ. 사상적 배경
1. 유교적 사상
1) 충신연군
2) 우국애민
2. 불교적 사상
3. 도교적 사상
1) 은둔
2) 신선지향
3) 기주취락
Ⅳ. 결론
*송강 정철 연보
*참고 문헌
1. 기존 연구의 검토
2. 연구 목적
Ⅱ. 송강 정철의 생애와 시대상황
1. 송강 정철의 생애
1) 유년시절
2) 청년시절
3) 정계시절
4) 환로의 진퇴
2. 시대적 문단의 현황
1) 사회적 상황
2) 주자학적 문학관
3) 15~16세기 가사문학의 특징
Ⅲ. 사상적 배경
1. 유교적 사상
1) 충신연군
2) 우국애민
2. 불교적 사상
3. 도교적 사상
1) 은둔
2) 신선지향
3) 기주취락
Ⅳ. 결론
*송강 정철 연보
*참고 문헌
본문내용
기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1580년 선조는, 송강이 동인이 득세한 내직에는 뜻이 없어함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한다. 임지에 부임한 송강은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며 <관동별곡>등 수 많은 작품을 생산하고 민생에 역점을 둔, 민본정치 실현에 주력한다. 이듬해 2월에는 내직으로 돌아왔지만, 12월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한양을 떠나게 된다. 도내의 세액과 부역을 개혁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1584년 49세의 송강에게 커다란 슬픔이 닥쳐오는데, 바로 율곡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50세를 고비로 송강은 조정에서 물러난다. 처음에는 고양 중심에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비방의 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창평으로 내려갔다.
54세가 될 때 까지 송강은 창평에 주로 머물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들을 남기게 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난리를 피해 강화도에 있던 송강은 58세를 일기로 12월 18일 숨을 거둔다.
2. 시대적 문단의 현황
1) 사회적 상황
송강 정철은 조선 중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 굴곡 많은 인생역정을 이어왔다. 당쟁의 발단은 성종이 지방에 근거를 두고 학문에만 정진하던 사림세력을 중앙 무대에 등용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림의 정계진출은 관직에 뜻을 두는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관직의 수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 간의 또 다른 대립과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권용주, <송강정철의 시문학연구> 박사학위논문, 세종대, 1994
성종의 의도는 조선개국에 이바지한 공으로 얻게 된 확고한 정치적 기반 아래에서 훈구세력이 독점하던 권력의 지나친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이로 인해 정국은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의 심화를 불러일으켰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은 사화로까지 번져가게 된 것이다. 1498년의 무오사화부터 1504년의 갑자사화, 1519년의 기묘사화, 1545년의 을사사화가 4대 사화인데 송강은 마지막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을 걸어왔던 것이다.
2) 주자학적 문학관
숭유정책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유교사상 중에서도 주자가례와 주자의 정치철학은 조선왕조의 양반사회에서 정통적인 학풍과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주자학은 불교와 노장사상에 의해 실추된 본연의 자세를 찾기 위해 힘쓰고자 하는, 사변적이며 이론적인 학문으로 성리학, 또는 송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자학적 사조 아래서의 문학관은 문학자체가 지니는 본성으로써 중요성을 강조하지 못하고 그 효용성만을 인식하였다. 이리하여 문학으로써 도를 담아 전파시켜 시속을 교화시킨다는 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관념은 이 땅에 주자학적인 사회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자리잡게 된다.
3) 15~16세기 가사문학의 특징
훈민정음의 창제와 국문시가 창작 경험의 축적 그리고 장가형 시가형태와 서정시가의 음악성에 대한 당대 시가인들의 사회 미학적 요구는, 15세기에 우리나라 고전시가상 매우 큰 미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사체 시가를 발생, 발전시켰다.
15~16세기의 국문시가 영역에서 특징적인 것은 사림파 문사들의 자연예찬이나, 안빈낙도를 다루는 은일가사가 문학적 조류를 형성하였는데, 정치적 패배로 인한 상심을 이러한 방법으로 위안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은일가사의 흐름을 보면 정극인의 <상춘곡>은 송순의 <면앙정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정철의 <성산별곡>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연군’, ‘애민’, ‘풍류’ 사상이 녹아 흐르는 여러 편의 가사를 창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학적 문학관이 팽배했던 당시에 그도 비록 관료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했으나, 효용성에만 치우친 문학작품을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Ⅲ. 사상적 배경
시대 현실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정당하고 의미 있게 행동하기 위한 실천적 규준을 일컬어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반에 작용한다.
고전문학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논함에 있어 유교, 불교, 도교와 민간신앙 즉, 무속의 사상적 문제는 항상 거론되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4대 사상은 비단 문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문화를 형성하는 모태가 되었고, 특히 유불선 사상은 전 한문화권의 근간이 되는 공통적 문화의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터이다.
송강가사의 시 정신에서도 이러한 제 사상적 요소들이 그 저류에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민간신앙의 모습은 거의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교, 불교, 도교의 큰 맥락 안에서 송강 가사의 배경이 되는 사상적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교적 사상
송강의 생애와 시대상황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당시는 유교의 절대지상주의 사회였다. 정치, 사회, 문화 및 민중의 생활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까지도 유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대표적인 실천 강령인 충, 효, 예는 인간 교육의 기본으로써, 효용성 위주의 문학관이 팽배해 있던 당시로서는 문학작품의 소재, 주제면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충신연군
송강의 가사문학 중 그 전체가 ‘충신연군’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관동별곡>, <성산별곡>등에도 ‘연군지정’이 빈번히 노래되고 있음을 볼 때, ‘연군지정’은 그의 전 작품의 기조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緣연分분이며 하 모 일이런가.
<사미인곡>의 첫 구에서부터 임금을 사모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내세우고 있다. <속미인곡>에서는 지나친 교태 때문에 낭군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여인의 입을 빌어 연군을 노래하고 있다. 예전의 그 총애를 다시 받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는 심정이 애잔하게 묘사되고 있다.
<관동별곡>은 기행가사로 분류된다. 그러나 연군지정의 심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사미인곡>의 서술방법이 비유적 표현이라면 <관동별곡>은 직접적으로 감은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
1580년 선조는, 송강이 동인이 득세한 내직에는 뜻이 없어함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한다. 임지에 부임한 송강은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며 <관동별곡>등 수 많은 작품을 생산하고 민생에 역점을 둔, 민본정치 실현에 주력한다. 이듬해 2월에는 내직으로 돌아왔지만, 12월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한양을 떠나게 된다. 도내의 세액과 부역을 개혁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1584년 49세의 송강에게 커다란 슬픔이 닥쳐오는데, 바로 율곡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50세를 고비로 송강은 조정에서 물러난다. 처음에는 고양 중심에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비방의 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창평으로 내려갔다.
54세가 될 때 까지 송강은 창평에 주로 머물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들을 남기게 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난리를 피해 강화도에 있던 송강은 58세를 일기로 12월 18일 숨을 거둔다.
2. 시대적 문단의 현황
1) 사회적 상황
송강 정철은 조선 중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 굴곡 많은 인생역정을 이어왔다. 당쟁의 발단은 성종이 지방에 근거를 두고 학문에만 정진하던 사림세력을 중앙 무대에 등용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림의 정계진출은 관직에 뜻을 두는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관직의 수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 간의 또 다른 대립과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권용주, <송강정철의 시문학연구> 박사학위논문, 세종대, 1994
성종의 의도는 조선개국에 이바지한 공으로 얻게 된 확고한 정치적 기반 아래에서 훈구세력이 독점하던 권력의 지나친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이로 인해 정국은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의 심화를 불러일으켰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은 사화로까지 번져가게 된 것이다. 1498년의 무오사화부터 1504년의 갑자사화, 1519년의 기묘사화, 1545년의 을사사화가 4대 사화인데 송강은 마지막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을 걸어왔던 것이다.
2) 주자학적 문학관
숭유정책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유교사상 중에서도 주자가례와 주자의 정치철학은 조선왕조의 양반사회에서 정통적인 학풍과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주자학은 불교와 노장사상에 의해 실추된 본연의 자세를 찾기 위해 힘쓰고자 하는, 사변적이며 이론적인 학문으로 성리학, 또는 송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자학적 사조 아래서의 문학관은 문학자체가 지니는 본성으로써 중요성을 강조하지 못하고 그 효용성만을 인식하였다. 이리하여 문학으로써 도를 담아 전파시켜 시속을 교화시킨다는 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관념은 이 땅에 주자학적인 사회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자리잡게 된다.
3) 15~16세기 가사문학의 특징
훈민정음의 창제와 국문시가 창작 경험의 축적 그리고 장가형 시가형태와 서정시가의 음악성에 대한 당대 시가인들의 사회 미학적 요구는, 15세기에 우리나라 고전시가상 매우 큰 미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사체 시가를 발생, 발전시켰다.
15~16세기의 국문시가 영역에서 특징적인 것은 사림파 문사들의 자연예찬이나, 안빈낙도를 다루는 은일가사가 문학적 조류를 형성하였는데, 정치적 패배로 인한 상심을 이러한 방법으로 위안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은일가사의 흐름을 보면 정극인의 <상춘곡>은 송순의 <면앙정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정철의 <성산별곡>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연군’, ‘애민’, ‘풍류’ 사상이 녹아 흐르는 여러 편의 가사를 창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학적 문학관이 팽배했던 당시에 그도 비록 관료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했으나, 효용성에만 치우친 문학작품을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Ⅲ. 사상적 배경
시대 현실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정당하고 의미 있게 행동하기 위한 실천적 규준을 일컬어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반에 작용한다.
고전문학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논함에 있어 유교, 불교, 도교와 민간신앙 즉, 무속의 사상적 문제는 항상 거론되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4대 사상은 비단 문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문화를 형성하는 모태가 되었고, 특히 유불선 사상은 전 한문화권의 근간이 되는 공통적 문화의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터이다.
송강가사의 시 정신에서도 이러한 제 사상적 요소들이 그 저류에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민간신앙의 모습은 거의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교, 불교, 도교의 큰 맥락 안에서 송강 가사의 배경이 되는 사상적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교적 사상
송강의 생애와 시대상황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당시는 유교의 절대지상주의 사회였다. 정치, 사회, 문화 및 민중의 생활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까지도 유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대표적인 실천 강령인 충, 효, 예는 인간 교육의 기본으로써, 효용성 위주의 문학관이 팽배해 있던 당시로서는 문학작품의 소재, 주제면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충신연군
송강의 가사문학 중 그 전체가 ‘충신연군’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관동별곡>, <성산별곡>등에도 ‘연군지정’이 빈번히 노래되고 있음을 볼 때, ‘연군지정’은 그의 전 작품의 기조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緣연分분이며 하 모 일이런가.
<사미인곡>의 첫 구에서부터 임금을 사모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내세우고 있다. <속미인곡>에서는 지나친 교태 때문에 낭군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여인의 입을 빌어 연군을 노래하고 있다. 예전의 그 총애를 다시 받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는 심정이 애잔하게 묘사되고 있다.
<관동별곡>은 기행가사로 분류된다. 그러나 연군지정의 심상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사미인곡>의 서술방법이 비유적 표현이라면 <관동별곡>은 직접적으로 감은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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