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이 글의 목적
2. 이 글의 요약
3. 마무리
2. 이 글의 요약
3. 마무리
본문내용
그가 요세(了世, 1163~1245)이었다. 그는 의종 17년(1163)에 태어나 12세의 어린나이로 천태교관을 배우고 23세에 승선에 급제하여 천태종의 종지를 펼 것을 원하였다. 그는 천태종풍을 버리지 못하고 끝내 자신의 길을 택하여 수련하엿는데, 참의를 닦음에 있어 육신이 허락하는한 하루에도 오십 삼 불을 예하기를 12번씩이나 하였으므로, 이러한 행법을 보고 서참회라고 속칭하였다 한다. 혜심은 지눌의 수제자였는데 매우 지혜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사람 이었다. 혜심은 지눌의 충실한 조술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가의 위치를 철저히 굳힌 느낌이 든다. 교회별전이라는 책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세속적 영예에 눈이 어두워 서로 헐뜯고 다투는 수라장 속에 뛰어든 만은 승려들의 탈선에 경종을 울리고 있으며, 더욱 주술적 타력 의존의 폐습에 잠겨 불도의 타락을 자초하던 고려 왕실 주변의 그릇된 신앙 풍조를 타파하는 중대한 교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눌과 혜심 이 후에도 조계산은 계속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충렬왕(忠烈王, 1275~1308)대까지 고려 정신 문화계의 중심이 되었다. 충렬왕 때 조계산 이외 지역에서 활약한 가장 두드러진 승려는 일연(一然, 1206~1289)과 혜영(惠永, 1228~1294) 두 스님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음으로써 우리나라의 종교사적인 고사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록하여 후세에 주체적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연과 같은 시대의 승려인 혜영은 화엄교학을 천명함으로써 높이 평가된다.
충렬왕 이후 불교계의 타락과 분열 대립은 몽고족이라는 이민족의 지
충렬왕 이후 불교계의 타락과 분열 대립은 몽고족이라는 이민족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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