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영감”을 제공해 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loving Providence)였다.
29 벡(S. A. Beck)이 지적한 것처럼, 전쟁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한국인들 사이에 일시적인 불안감을 조성하였으며,
몇몇 신앙의 단체들을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선교사들은 흩어진 이들이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복음의 밭을 다시 일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예상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수가 적었으며,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돌아와 오히려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자신들이 추구하여야
할 참된 안식처라는 인식이 점증했다. 그 결과 “주의 사역이 놀라운 방식으로 백성들 가운데 확산되고 있었다.”
30 케이블(E. M. Cable)은 1904년 북장로교 보고서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기회의 문이 이전보다 더욱 활짝 열렸다. 이교주의에서 대거 탈출하여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놀라운 운동이 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성공과 현재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놀라운 기회, 그리고 그 상황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지 소수의 사역자들로 인해 당황하고 있다. 대감리교회가 우리의 실제적인 상황을 목도하고 알게 된다면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제시된 기회를 포용하는 일을 연기한다는 것은 곧 한국의 복음화에 재난을 초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국의 교회가 이 위대한 긴급 상황에 충실히 응하여 구호품을 보내, 너무도 긴급하게 요청되는 재정 및 지원 강화를 해줄 것을 희망한다.
31 북감리교 선교사 모리스(Morris)가 1905년 북감리교 연회에서 보고한 것처럼 전쟁터로 변한 평양의 위기가 백성들을 돌아서게
만들었으며, 교세가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32 평양시 교회들은 초신자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그들의 교육을 미처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33 하디가 지적한 대로 “1904-1905년, 러일전쟁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 바로 이때 원산 부흥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34 정치적 혼란과 부흥운동,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이 이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이 민중의 마음을 가난할 대로 가난하게 만들어
그들의 심령이 복음의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옥토가 되게 하셨다
.35 본래 유순하고 종교성이 강해 서양교육이나 고등교육 없이도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한국인들의 심령이
고난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더욱 더 옥토로 변한 것이다. 게일이 말한 것처럼, “이미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36 환난과 역경의 시대에 영적 각성이 이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확실히 1903년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찾아 볼 수 없었던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뚜렷하게 감지되었다.
37 영적 각성의 첫 징후, 송도(개성) 남 감리교 선교회
역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산 부흥운동이 있기 전 1901년부터 남감리교 선교회의 송도 선교부 지역에서
부흥운동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곳 송도는 오늘날 개성으로 더 알려진 곳으로 1897년 컬리어(C. T. Collyer)가 도착한 이후 남감리교 선교회의
선교 거점이 된 곳이다.
38 이곳에 선교가 시작된 지 4년 후인 1901년 10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연합으로 개최한 신학회에서 수업 시작부터
마지막 끝날 때까지 “성령이 강력하게 임재하여” 참석한 이들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새롭게 다짐하는”39역사가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이 같은 개성의 성령의 역사는 1902년 사경회와 고난 주일 특별기도회 때 다시 나타났고,
40그 이듬해 1월 존스(George Heber Jones)가 인도한 속장과 권사들을 위한 서울의 북감리교 선교회와 남감리교 선교회의
연합 사경회에서 다신 반복되었다.
41 그러나 이 보다도 더 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1903년 1월 구정을 맞아 열린 개성의 신년기도회에서였다.
42 개성의 남감리교 선교회는 새해를 맞아 헌신을 다짐하고 자신들의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해마다 부흥회 형태의
신년기도회를 갖는 전통이 있었다.
1903년 1월 30일(음력 정월 초하루) 크램(Cram) 목사의 인도로 신년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구정 첫날 이장포교회에서 30여명이 낮에 전도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는 장단읍교회에서 남녀 20여명이 모여 전도집회를 갖고,
그 다음날 개성 북부의 한 교회당에서 전도집회가 계속되었다.
부흥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43 매일 오전에는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전도하고 저녁에는 기도회를 가졌다.
이와 같은 전도와 기도회는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와 함께 오순절의 성령의 강한 역사가 영적 각성을 수반한 가운데 모인 이들 중에 강하게 임한 것이다.
1903년 연례 보고서에서 크램이 보고한 대로 신년 시즌 동안 열린 부흥회에 “성령의 분명한 임재와 권능이” 현시되었다.
44 이 부흥회는 “집회에 대한 열기나 성령의 분명한 임재와 능력이 나타난 점에서 옛 감리교 부흥운동이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감수성이 예민한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45 1903년 3월, 그 현장에 있던 문경호 전도사는 신학월보에 개성의 영적 각성 움직임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증언하였다:
숑도 북부 병교회당의셔 젼도엿 아침에 열시부텨 열두 시 반@까(ㅏ)지 젼도고 저역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ㅏ)지 긔도회를 열고 형졔자매들이 각각 간증을 게 엿 교인들이 날마다 점점 늘허 회당에 안질 틈이
업게 모혀셔 례 대 이때에 셩신임이 예젼 오순절에 일 이십 인의게 감화시듯키 이 례당의 모인 형제 자매들의게
각각 감화시더니 하로 젼도할 시대에 왼회O이 눈물을 흘니고
“사랑의 섭리”(loving Providence)였다.
29 벡(S. A. Beck)이 지적한 것처럼, 전쟁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한국인들 사이에 일시적인 불안감을 조성하였으며,
몇몇 신앙의 단체들을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선교사들은 흩어진 이들이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복음의 밭을 다시 일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예상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수가 적었으며,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돌아와 오히려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자신들이 추구하여야
할 참된 안식처라는 인식이 점증했다. 그 결과 “주의 사역이 놀라운 방식으로 백성들 가운데 확산되고 있었다.”
30 케이블(E. M. Cable)은 1904년 북장로교 보고서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기회의 문이 이전보다 더욱 활짝 열렸다. 이교주의에서 대거 탈출하여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놀라운 운동이 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성공과 현재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놀라운 기회, 그리고 그 상황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지 소수의 사역자들로 인해 당황하고 있다. 대감리교회가 우리의 실제적인 상황을 목도하고 알게 된다면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제시된 기회를 포용하는 일을 연기한다는 것은 곧 한국의 복음화에 재난을 초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국의 교회가 이 위대한 긴급 상황에 충실히 응하여 구호품을 보내, 너무도 긴급하게 요청되는 재정 및 지원 강화를 해줄 것을 희망한다.
31 북감리교 선교사 모리스(Morris)가 1905년 북감리교 연회에서 보고한 것처럼 전쟁터로 변한 평양의 위기가 백성들을 돌아서게
만들었으며, 교세가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32 평양시 교회들은 초신자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그들의 교육을 미처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33 하디가 지적한 대로 “1904-1905년, 러일전쟁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 바로 이때 원산 부흥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34 정치적 혼란과 부흥운동,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이 이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이 민중의 마음을 가난할 대로 가난하게 만들어
그들의 심령이 복음의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옥토가 되게 하셨다
.35 본래 유순하고 종교성이 강해 서양교육이나 고등교육 없이도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한국인들의 심령이
고난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더욱 더 옥토로 변한 것이다. 게일이 말한 것처럼, “이미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36 환난과 역경의 시대에 영적 각성이 이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확실히 1903년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찾아 볼 수 없었던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뚜렷하게 감지되었다.
37 영적 각성의 첫 징후, 송도(개성) 남 감리교 선교회
역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산 부흥운동이 있기 전 1901년부터 남감리교 선교회의 송도 선교부 지역에서
부흥운동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곳 송도는 오늘날 개성으로 더 알려진 곳으로 1897년 컬리어(C. T. Collyer)가 도착한 이후 남감리교 선교회의
선교 거점이 된 곳이다.
38 이곳에 선교가 시작된 지 4년 후인 1901년 10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연합으로 개최한 신학회에서 수업 시작부터
마지막 끝날 때까지 “성령이 강력하게 임재하여” 참석한 이들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새롭게 다짐하는”39역사가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이 같은 개성의 성령의 역사는 1902년 사경회와 고난 주일 특별기도회 때 다시 나타났고,
40그 이듬해 1월 존스(George Heber Jones)가 인도한 속장과 권사들을 위한 서울의 북감리교 선교회와 남감리교 선교회의
연합 사경회에서 다신 반복되었다.
41 그러나 이 보다도 더 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1903년 1월 구정을 맞아 열린 개성의 신년기도회에서였다.
42 개성의 남감리교 선교회는 새해를 맞아 헌신을 다짐하고 자신들의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해마다 부흥회 형태의
신년기도회를 갖는 전통이 있었다.
1903년 1월 30일(음력 정월 초하루) 크램(Cram) 목사의 인도로 신년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구정 첫날 이장포교회에서 30여명이 낮에 전도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는 장단읍교회에서 남녀 20여명이 모여 전도집회를 갖고,
그 다음날 개성 북부의 한 교회당에서 전도집회가 계속되었다.
부흥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43 매일 오전에는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전도하고 저녁에는 기도회를 가졌다.
이와 같은 전도와 기도회는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와 함께 오순절의 성령의 강한 역사가 영적 각성을 수반한 가운데 모인 이들 중에 강하게 임한 것이다.
1903년 연례 보고서에서 크램이 보고한 대로 신년 시즌 동안 열린 부흥회에 “성령의 분명한 임재와 권능이” 현시되었다.
44 이 부흥회는 “집회에 대한 열기나 성령의 분명한 임재와 능력이 나타난 점에서 옛 감리교 부흥운동이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감수성이 예민한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45 1903년 3월, 그 현장에 있던 문경호 전도사는 신학월보에 개성의 영적 각성 움직임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증언하였다:
숑도 북부 병교회당의셔 젼도엿 아침에 열시부텨 열두 시 반@까(ㅏ)지 젼도고 저역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ㅏ)지 긔도회를 열고 형졔자매들이 각각 간증을 게 엿 교인들이 날마다 점점 늘허 회당에 안질 틈이
업게 모혀셔 례 대 이때에 셩신임이 예젼 오순절에 일 이십 인의게 감화시듯키 이 례당의 모인 형제 자매들의게
각각 감화시더니 하로 젼도할 시대에 왼회O이 눈물을 흘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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