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기독교의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적 동기
2.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명확히 해 보려고 하는 이유는 이 세계가 바로 그들이 관련하여 살고 활동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
Ⅱ. 도교의 세계관
Ⅲ. 동서양(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1. 집합적 세계관
2. 통체적 세계관
1) 어떤 진술에 있어서 집합적 세계관에서는 그 진술의 범위와 함의가 분명하나, 통체적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2) 하나의 진술 속에 통체적 세계관의 사유방법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경험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으나, 집합적 세계관의 사유방법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3) 통체적 세계관의 사유방법
Ⅳ. 고구려의 세계관
Ⅴ. 마을공동체의 세계관
Ⅵ. 노동자(근로자)의 세계관
1. 양질 전화의 법칙(변화의 형태에 관한 법칙)
2. 대립물 통일의 법칙(변화의 원인에 관한 법칙)
3. 부정의 부정 법칙(변화의 과정에 관한 법칙)
Ⅶ. 결정론적 세계관
참고문헌
1.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적 동기
2.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명확히 해 보려고 하는 이유는 이 세계가 바로 그들이 관련하여 살고 활동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
Ⅱ. 도교의 세계관
Ⅲ. 동서양(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1. 집합적 세계관
2. 통체적 세계관
1) 어떤 진술에 있어서 집합적 세계관에서는 그 진술의 범위와 함의가 분명하나, 통체적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2) 하나의 진술 속에 통체적 세계관의 사유방법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경험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으나, 집합적 세계관의 사유방법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3) 통체적 세계관의 사유방법
Ⅳ. 고구려의 세계관
Ⅴ. 마을공동체의 세계관
Ⅵ. 노동자(근로자)의 세계관
1. 양질 전화의 법칙(변화의 형태에 관한 법칙)
2. 대립물 통일의 법칙(변화의 원인에 관한 법칙)
3. 부정의 부정 법칙(변화의 과정에 관한 법칙)
Ⅶ. 결정론적 세계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아마도 신모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종자는 생명을 내장한 것으로 고구려의 재생하는 운명을 상징한다. 비둘기가 활에 맞아 떨어지나 朱蒙이 보리씨를 입에서 꺼내고 물을 뿌려 살아나게 한 것은 물의 재생력을 믿은 朱蒙의 제례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 朱蒙은 보리씨가 풍요, 다산을 상징하는 종자이므로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곡식 종자 중에서 왜 보리씨였는가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한편 穀母神 柳花에 대한 장례와 제사의 기록이 『三國史記』에 나오는데 高句麗 뿐 아니라 夫餘에서도 柳花를 태후로서 모셨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 太后禮葬之遂立神廟 冬十月遣使扶餘 饋方物以報其 德
高句麗에서는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 가서 柳花의 제사를 모셨다.
冬十月 王幸扶餘祀太后廟
특히 10월에 국모신의 제사를 했다는 것은 매우 신빙성 있는 기사이다. 10월에 행해진 國母神 柳花의 제사는 모신기일의 제사가 아니라 동맹제 때 행해진 제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동맹제 때 국모신에 대한 제사일 것으로 짐작되는 수신제도 동시에 거행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高句麗 시조신의 奉祭는 계승되었다. 중국의 『北史』를 보면
敬鬼神多淫詞 有神廟二所 一日扶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日高登神 云是其始祖扶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이라 하여 유화와 주몽 모자이신의 제를 계속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주몽의 모신을 모셨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의 전승자료에도 나타난다.
동신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그 터는 좀 넓으나 전우는 비루하여 곁채 문간들이 삼십 칸인데 지붕을 잇지 않아 황량하다. 정정의 방에는 ‘동신성모의 당’이라 쓰였는데 장막으로 가리도 사람에게 신상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로 새긴 부인상이겠는데 혹은 부여처 하신녀라고 한다. 그가 주몽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된 때문에 제사한다.
徐兢이 高句麗와 高麗의 國名을 중국인들이 흔히 혼용했듯이 혼동했고 또 고려
왕실을 高句麗의 후예로 독단했기 때문에 河神女가 朱蒙을 낳아 高麗의 시조가 되었다고 했으나 高麗시대에 聖母信仰이 행해졌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렇듯 朱蒙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후손들의 숭배와 추모를 받았는데 이는 柳花의 풍요와 생번력을 상징하는 穀母神的인 性格 때문이다. 穀母神은 곧 祖上神이 되므로 穀母神 崇拜思想에는 祖上神 崇拜의 관념도 포함되어 있다.
Ⅴ. 마을공동체의 세계관
마을의 홍수를 담은 이야기 가운데 많이 보이는 화소는 ‘홍수 때 XX만큼 남은 山頂’이다. ‘큰물(홍수)이 나서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이 마을의 어느 산이 XX만큼 남았다’는 내용이다. 천지개벽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천지개벽이나 온 세상이 잠기는 홍수의 화소는 ‘노아의 홍수’로 대표되는 범세계적인 신화적 상징이다.
(1) 우리 마을 승봉산은 천지개벽시에 되만큼 남아서 되봉산(승봉산)이라 하고, 자은마을의 말봉산은 말만큼 남았다고 해서 말봉산이 되었다.(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자은)
(2) 옛날 바닷물이 넘어와서 온 산이 다 묻혔을 때 삿갓만큼 남아서 삿갓봉이 되었다.(봉화군 소천면 승부리)
(3) 마을 뒷산이 경주 천지가 바다가 되었을 때 산등이 한 뼘만큼 남았다고 해서 함박등이라고 했다.(경북 월성군 현곡면 가정2리)
(4) 천지개벽시 방아산은 방아만큼 남아서 방아산, 달음산은 달만큼 남아서 달음산이 되었다.(진양군 사봉면 북마성리)
(5) 아주 옛날 큰물이 들어 온 마을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무안 앞쪽의 종남산은 종발만큼 남았고, 그 옆의 덕대산은 덕석만큼 남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곳에 바다에서 나는 조개 껍질 등이 보인다고 한다.(밀양군 무안면 무안)
(6) 우리 마을 뒷산 석류봉은 옛날에 해일이 일어나 다 물에 잠기고 이 산꼭대기가 석류만큼 남았다고 해서 석류봉이 되었다.(김해군 상동면 우계리)
세상이 물에 잠겨 물바다가 된 것이므로 홍수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럽게 바다의 상징과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배를 맸다든가 배가 드나들었다는 흔적이 배말뚝이나 고리, 지명 등으로 남아있다. 위의 예화와 겹쳐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홍수와 행주는 연결되는 상징임을 알 수 있다.
(7) 이 곳이 바다가 되었을 적에 순금산까지 물이 찼다. ‘배내기재’에 가면 조개에다 바다돌이 있다. 그리고 ‘배반’ 앞에는 뱃줄 맨 흔적이 있다. 근처 ‘질매재’는 그 때 질매 노루만큼 남아서 질매재가 되었고, 여기 ‘술기재’(치술령)도 그 때 수리 앉을 만큼 남았다고 술기재가 되었다.(경북월성군 외동면 석계 1리)
(8) 예전에 경주 천지가 바다가 되었다. 지금도 그 때 배를 매었던 돌이 있고, 현곡면 아래 ‘까잼들’이라는 동네는 가자미가 올라와 동네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함박등’은 그 때 한뼘만큼 남아서 함박등이 되었다. (월성군 현곡면 가정2리)
(9) 옛날 홍수가 나 물바다가 되었는데 산에다 말뚝을 박고 고리를 달아서 배를 띄웠다고 해서 산이름이 고리봉(環峰)이 되었다.(전남 남원군 대강면 대동)
(10)옛날 홍수가 나서 배를 댔다고 마을 이름이 배나리이다.(경북 영덕군 창수면 배나리)
마을 또는 지역 소재의 산 또는 산 이름의 유래를 전하는 일군의 전설들에는 이렇게 신화적 대홍수에 대한 오랜 기억이 스며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마을(고을)이 옛날에는 바다여서 배가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많다. 인간의 역사에서 홍수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재해인 만큼 이에 대한 크고 작은 기억과 다양한 의미화가 이루어진 것이라 보이는데, 그러한 홍수에 대한 기억들이 결국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의 인용은 특히 홍수 때 잠기지 않은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부분이다.
(11) “...느닷
종자는 생명을 내장한 것으로 고구려의 재생하는 운명을 상징한다. 비둘기가 활에 맞아 떨어지나 朱蒙이 보리씨를 입에서 꺼내고 물을 뿌려 살아나게 한 것은 물의 재생력을 믿은 朱蒙의 제례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 朱蒙은 보리씨가 풍요, 다산을 상징하는 종자이므로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곡식 종자 중에서 왜 보리씨였는가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한편 穀母神 柳花에 대한 장례와 제사의 기록이 『三國史記』에 나오는데 高句麗 뿐 아니라 夫餘에서도 柳花를 태후로서 모셨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 太后禮葬之遂立神廟 冬十月遣使扶餘 饋方物以報其 德
高句麗에서는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 가서 柳花의 제사를 모셨다.
冬十月 王幸扶餘祀太后廟
특히 10월에 국모신의 제사를 했다는 것은 매우 신빙성 있는 기사이다. 10월에 행해진 國母神 柳花의 제사는 모신기일의 제사가 아니라 동맹제 때 행해진 제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동맹제 때 국모신에 대한 제사일 것으로 짐작되는 수신제도 동시에 거행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高句麗 시조신의 奉祭는 계승되었다. 중국의 『北史』를 보면
敬鬼神多淫詞 有神廟二所 一日扶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日高登神 云是其始祖扶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이라 하여 유화와 주몽 모자이신의 제를 계속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주몽의 모신을 모셨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의 전승자료에도 나타난다.
동신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그 터는 좀 넓으나 전우는 비루하여 곁채 문간들이 삼십 칸인데 지붕을 잇지 않아 황량하다. 정정의 방에는 ‘동신성모의 당’이라 쓰였는데 장막으로 가리도 사람에게 신상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무로 새긴 부인상이겠는데 혹은 부여처 하신녀라고 한다. 그가 주몽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된 때문에 제사한다.
徐兢이 高句麗와 高麗의 國名을 중국인들이 흔히 혼용했듯이 혼동했고 또 고려
왕실을 高句麗의 후예로 독단했기 때문에 河神女가 朱蒙을 낳아 高麗의 시조가 되었다고 했으나 高麗시대에 聖母信仰이 행해졌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렇듯 朱蒙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후손들의 숭배와 추모를 받았는데 이는 柳花의 풍요와 생번력을 상징하는 穀母神的인 性格 때문이다. 穀母神은 곧 祖上神이 되므로 穀母神 崇拜思想에는 祖上神 崇拜의 관념도 포함되어 있다.
Ⅴ. 마을공동체의 세계관
마을의 홍수를 담은 이야기 가운데 많이 보이는 화소는 ‘홍수 때 XX만큼 남은 山頂’이다. ‘큰물(홍수)이 나서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이 마을의 어느 산이 XX만큼 남았다’는 내용이다. 천지개벽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천지개벽이나 온 세상이 잠기는 홍수의 화소는 ‘노아의 홍수’로 대표되는 범세계적인 신화적 상징이다.
(1) 우리 마을 승봉산은 천지개벽시에 되만큼 남아서 되봉산(승봉산)이라 하고, 자은마을의 말봉산은 말만큼 남았다고 해서 말봉산이 되었다.(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자은)
(2) 옛날 바닷물이 넘어와서 온 산이 다 묻혔을 때 삿갓만큼 남아서 삿갓봉이 되었다.(봉화군 소천면 승부리)
(3) 마을 뒷산이 경주 천지가 바다가 되었을 때 산등이 한 뼘만큼 남았다고 해서 함박등이라고 했다.(경북 월성군 현곡면 가정2리)
(4) 천지개벽시 방아산은 방아만큼 남아서 방아산, 달음산은 달만큼 남아서 달음산이 되었다.(진양군 사봉면 북마성리)
(5) 아주 옛날 큰물이 들어 온 마을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무안 앞쪽의 종남산은 종발만큼 남았고, 그 옆의 덕대산은 덕석만큼 남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곳에 바다에서 나는 조개 껍질 등이 보인다고 한다.(밀양군 무안면 무안)
(6) 우리 마을 뒷산 석류봉은 옛날에 해일이 일어나 다 물에 잠기고 이 산꼭대기가 석류만큼 남았다고 해서 석류봉이 되었다.(김해군 상동면 우계리)
세상이 물에 잠겨 물바다가 된 것이므로 홍수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럽게 바다의 상징과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배를 맸다든가 배가 드나들었다는 흔적이 배말뚝이나 고리, 지명 등으로 남아있다. 위의 예화와 겹쳐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홍수와 행주는 연결되는 상징임을 알 수 있다.
(7) 이 곳이 바다가 되었을 적에 순금산까지 물이 찼다. ‘배내기재’에 가면 조개에다 바다돌이 있다. 그리고 ‘배반’ 앞에는 뱃줄 맨 흔적이 있다. 근처 ‘질매재’는 그 때 질매 노루만큼 남아서 질매재가 되었고, 여기 ‘술기재’(치술령)도 그 때 수리 앉을 만큼 남았다고 술기재가 되었다.(경북월성군 외동면 석계 1리)
(8) 예전에 경주 천지가 바다가 되었다. 지금도 그 때 배를 매었던 돌이 있고, 현곡면 아래 ‘까잼들’이라는 동네는 가자미가 올라와 동네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함박등’은 그 때 한뼘만큼 남아서 함박등이 되었다. (월성군 현곡면 가정2리)
(9) 옛날 홍수가 나 물바다가 되었는데 산에다 말뚝을 박고 고리를 달아서 배를 띄웠다고 해서 산이름이 고리봉(環峰)이 되었다.(전남 남원군 대강면 대동)
(10)옛날 홍수가 나서 배를 댔다고 마을 이름이 배나리이다.(경북 영덕군 창수면 배나리)
마을 또는 지역 소재의 산 또는 산 이름의 유래를 전하는 일군의 전설들에는 이렇게 신화적 대홍수에 대한 오랜 기억이 스며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마을(고을)이 옛날에는 바다여서 배가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많다. 인간의 역사에서 홍수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재해인 만큼 이에 대한 크고 작은 기억과 다양한 의미화가 이루어진 것이라 보이는데, 그러한 홍수에 대한 기억들이 결국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의 인용은 특히 홍수 때 잠기지 않은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부분이다.
(11) “...느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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