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근거
1. 임나일본부설의 개요
2. 근거
1) <<일본서기>>의 기사
2) 중국사서(송서ㅡ북제서, 양서)에 나오는 왜 5왕 기사
3) 칠지도명문
3. 기마민족설
Ⅲ.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제설
1.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2. 가야의 왜인설(加耶의 倭人說)
3. 분국설(分國說)
4.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
5.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Ⅳ.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반박
1. 대세론
2. 분국설(북한)
1) 신화의 분석
2) 전기 고분문화의 분석
3) 문헌자료의 분석
4) 5왕의 관직제수기사
3. 비류백제설
4. 구주왕조설 혹은 해양왕국설
Ⅴ.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문제점
Ⅵ.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비판
Ⅶ.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Ⅱ.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근거
1. 임나일본부설의 개요
2. 근거
1) <<일본서기>>의 기사
2) 중국사서(송서ㅡ북제서, 양서)에 나오는 왜 5왕 기사
3) 칠지도명문
3. 기마민족설
Ⅲ.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제설
1.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2. 가야의 왜인설(加耶의 倭人說)
3. 분국설(分國說)
4.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
5.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Ⅳ.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반박
1. 대세론
2. 분국설(북한)
1) 신화의 분석
2) 전기 고분문화의 분석
3) 문헌자료의 분석
4) 5왕의 관직제수기사
3. 비류백제설
4. 구주왕조설 혹은 해양왕국설
Ⅴ.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문제점
Ⅵ.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비판
Ⅶ.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가 일본열도 출신으로 생각하기 힘들고, 고령 가라국의 후예로 조상대에 신라에 의해 충주로 사민된 인물로 보아야 한다. 또 창원사의 봉림사에 있던 진경대사탑비문(923)에도 신라 사람인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예임을 밝히는 구절이 있다. 이 역시 가야 지역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며 분국론에서처럼 일본 지역을 가리킨다 할 수 없다.
◎임나일본부의 실체
일본서기의 여러 필사본과 주석서를 보면 일본부는 야마토의 미코토모치로 훈독되어진다. 즉 부란 미코토모치를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미코토모치는 왜의 사신이었고, 임나일본부란 왜에서 임나에 파견된 사신이었다.
Ⅵ.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비판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로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이다.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 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하여졌다. 그 예로 일본 서기 신공 황후 49년 조를 보면 신공 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7국과 4읍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 지금의 경남경북의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남전북과 충남의 일부를 정복하였으며, 백제왕의 조공을 받으면서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는데 그 중심 기관이 일본부라 하였다. 하지만 5세기 이전의 것은 신화적 전설로 간주하는 등 그 신빙성에 의문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보다 먼저 저술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든지 4세기의 일본은 열도조차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해외 침략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일본측 근거는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도 7세기에 들어 와서야 사용되는데 그 이전에 일본부라는 용어가 있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또,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를 보면 일본 무왕이 스스로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마한 7국왕을 자칭하면서 남송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한 기사와 이에 남송황제가 백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에 대해 무왕의 요구대로 관작을 수여한 기사가 있다. 관직명을 보면 임나와 가라가 중복된다든지, 마한진한은 이미 멸망했는데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명예직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남제에서도 백제 중신들에게 조선 태수, 대방 태수의 관직과 더불어 당시 북위 지역인 북중국의 광양 태수, 청하 태수 등의 관직을 수여하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왜왕의 요청에 의해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지역의 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송과 이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기에 백제는 빠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일본천왕의 신성화를 추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데 이 임나일본부의 존속시기나 그 성격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종래 일본 내의 통설적인 견해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왜가 신라를 위시한 삼한지역의 국가들을 평정했다는 369년경에 이 지역에 설치되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학자까지도 이같이 보지 않고 있다.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 설에 비해 한국측 기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Ⅶ. 결론 및 시사점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시민사관이 만들어낸 신빙성없는 학설임이 확인되었다. 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수정적 입장은 상당히 논의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6세기 이전의 가야사와 일본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야 하고 임나일본부설을 볼 때에도 역사적 사실을 작은 범위에서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김현구(1992), 임나일본부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일조각
김태식(1990), 임나일본부 문제의 연구현황과 전망, 경남대학교박물관가라문화연구소
김종간(2000), 임나와 임나일본부, 김해문화원
완건군 외 1명(1992), 임나일본부와 왜의 오왕, 가야문화연구원
연민수(2003), 임나일본부 재론, 가야문화연구원
정효운(2007), 새역사교과서와 임나일본부, 대한일어일문학회
◎임나일본부의 실체
일본서기의 여러 필사본과 주석서를 보면 일본부는 야마토의 미코토모치로 훈독되어진다. 즉 부란 미코토모치를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미코토모치는 왜의 사신이었고, 임나일본부란 왜에서 임나에 파견된 사신이었다.
Ⅵ.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의 비판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로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이다.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 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하여졌다. 그 예로 일본 서기 신공 황후 49년 조를 보면 신공 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7국과 4읍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 지금의 경남경북의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남전북과 충남의 일부를 정복하였으며, 백제왕의 조공을 받으면서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는데 그 중심 기관이 일본부라 하였다. 하지만 5세기 이전의 것은 신화적 전설로 간주하는 등 그 신빙성에 의문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보다 먼저 저술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든지 4세기의 일본은 열도조차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해외 침략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일본측 근거는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도 7세기에 들어 와서야 사용되는데 그 이전에 일본부라는 용어가 있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또,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를 보면 일본 무왕이 스스로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마한 7국왕을 자칭하면서 남송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한 기사와 이에 남송황제가 백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에 대해 무왕의 요구대로 관작을 수여한 기사가 있다. 관직명을 보면 임나와 가라가 중복된다든지, 마한진한은 이미 멸망했는데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명예직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남제에서도 백제 중신들에게 조선 태수, 대방 태수의 관직과 더불어 당시 북위 지역인 북중국의 광양 태수, 청하 태수 등의 관직을 수여하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왜왕의 요청에 의해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지역의 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송과 이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기에 백제는 빠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일본천왕의 신성화를 추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데 이 임나일본부의 존속시기나 그 성격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종래 일본 내의 통설적인 견해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왜가 신라를 위시한 삼한지역의 국가들을 평정했다는 369년경에 이 지역에 설치되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학자까지도 이같이 보지 않고 있다.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 설에 비해 한국측 기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Ⅶ. 결론 및 시사점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시민사관이 만들어낸 신빙성없는 학설임이 확인되었다. 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수정적 입장은 상당히 논의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6세기 이전의 가야사와 일본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야 하고 임나일본부설을 볼 때에도 역사적 사실을 작은 범위에서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김현구(1992), 임나일본부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일조각
김태식(1990), 임나일본부 문제의 연구현황과 전망, 경남대학교박물관가라문화연구소
김종간(2000), 임나와 임나일본부, 김해문화원
완건군 외 1명(1992), 임나일본부와 왜의 오왕, 가야문화연구원
연민수(2003), 임나일본부 재론, 가야문화연구원
정효운(2007), 새역사교과서와 임나일본부, 대한일어일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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