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목차
Ⅰ. 이상의 생애
1. 연보
1) 출생과 유년시절
2) 학창시절 1 (신광, 동광, 보성시절)
3) 학창시절 2 (경성고공시절)
4) 건축기사 시절
5) 문단활동기
6) 동경시절과 죽음
2. 전기적 특징
1) 집안의 과도한 기대
2) 개명에 대하여
3) 이상의 여인들
Ⅱ. 모더니즘과 심리소설
1. 모더니즘
1) 유형
2)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2. 심리소설
1) 심리소설
Ⅲ. 이상의 시세계
1. 내용적 특징
1) 불안의식
2) 자기폐쇄성
3) 자의식의 분열
4) 성
2. 형식적 특징
1) 다다이즘적 요소
2) 초현실주의적 요소
Ⅳ.이상의 소설세계
1. 이상 소설의 글쓰기 양상
1) 일상언어의 표현과 자전적 글쓰기
2) 내면의식을 표현하는 글쓰기
3) 상호관련적 글쓰기
2. 이상 소설의 논의
1) 죽음에 관한 논의
2) 분신의 의미
3) 기호학
4) ‘위티즘’의 수사학
5) 미학적 측면
1. 날개
1) 서지사항
2) 줄거리
3) 핵심정리
4) 구성
5) 인물분석
6) 작품의 특징
2. 종생기
1) 서지사항
2) 줄거리
3) 제목 <종생기((終生記)>
4) 핵심사항
5) 구성
6) 인물분석
7) 작품의 특징
1)신심리주의 기법(자의식의 표현)
Ⅵ. 이상의 소설과 7차 교육과정
◈ 참고 문헌 ◈
1. 연보
1) 출생과 유년시절
2) 학창시절 1 (신광, 동광, 보성시절)
3) 학창시절 2 (경성고공시절)
4) 건축기사 시절
5) 문단활동기
6) 동경시절과 죽음
2. 전기적 특징
1) 집안의 과도한 기대
2) 개명에 대하여
3) 이상의 여인들
Ⅱ. 모더니즘과 심리소설
1. 모더니즘
1) 유형
2)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2. 심리소설
1) 심리소설
Ⅲ. 이상의 시세계
1. 내용적 특징
1) 불안의식
2) 자기폐쇄성
3) 자의식의 분열
4) 성
2. 형식적 특징
1) 다다이즘적 요소
2) 초현실주의적 요소
Ⅳ.이상의 소설세계
1. 이상 소설의 글쓰기 양상
1) 일상언어의 표현과 자전적 글쓰기
2) 내면의식을 표현하는 글쓰기
3) 상호관련적 글쓰기
2. 이상 소설의 논의
1) 죽음에 관한 논의
2) 분신의 의미
3) 기호학
4) ‘위티즘’의 수사학
5) 미학적 측면
1. 날개
1) 서지사항
2) 줄거리
3) 핵심정리
4) 구성
5) 인물분석
6) 작품의 특징
2. 종생기
1) 서지사항
2) 줄거리
3) 제목 <종생기((終生記)>
4) 핵심사항
5) 구성
6) 인물분석
7) 작품의 특징
1)신심리주의 기법(자의식의 표현)
Ⅵ. 이상의 소설과 7차 교육과정
◈ 참고 문헌 ◈
본문내용
인사동에 카페 「쓰루(鶴)」을 인수해 경영했으나 얼마 못가 실패, 다방「69」를 설계하나 양도하고, 다방 「무기(麥)」를 설계, 양도. 계속된 경영 실패로 그의 가족은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성천, 인천 등지로 여행.
1936 (27세)
3월,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시와 소설』을 편집 1집만 내고 창문사 나옴. 「지비 1·2·3」(중앙),「역단」(가톨릭청년)을 발표. 수필「선망률도」(조광)「조춘점묘」(매일신보),「가외가전」,「여상」,「낙수」, 「Epigram」,「매상」등을 발표.
단편「지주회시」,「날개」등을 발표. 전부터 알았던 이화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떠남. 그 곳에서 「공포의 기록」,「종생기」,「권태」,「슬픈 이야기」, 「환시기」등을 씀.
시「위독」(조선일보), 수필「행복」(여성), 「추등잡필」,「1세기식」(삼사문학)등 발표. 소설「봉별기」(여성),「동해」(조광), 동화「황소와 도깨비」(매일신보)등을 발표.
1937 (28세)
2월,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 3월,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 4월17일 오전 4시,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향년 만 26년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유실. 5월에 「종생기」(조광),「권태」 발표.
1939
「실락원」(조광),「실화」(문장)등 유고로 발표.
1) 출생과 유년시절
김해경은 1910년 음력 8월 20일에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해경은 이름을 지어준 조부 병복의 성화로 젖을 때자마자 3살 때 아들이 없는 백부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김해경은 어린 시절 남달리 총명해서 백부와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문향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시집 온 큰어머니에게는 질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해경을 총명하지만 매우 내성적인 아이로 만들었다.
2) 학창시절 1 (신광, 동광, 보성시절)
8세가 되어 그는 백부의 개화된 식견에 의해 취학 적령기에 맞춰서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해경은 졸업반인 4학년때 담배 ‘칼표’껍질에 그려진 그림을 거의 그대로 모방해서 그리는 등 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자질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어린아이가 놀이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로 조숙했던 해경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15살에는 보성고보에 동광학교가 해체ㆍ편입되어 해경도 소속되는데, 그는 거기서 고유섭, 유진산, 이헌구, 임화, 김상기, 원용석 등과 1년 아래의 김기림, 김환태 등을 만나게 된다. 또 이 시절 그는 현미빵(빵떡)을 팔면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고, 이런 고학 생활은 고공 시절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교사 황의돈과 김상용 등에 의해서 문학적 분위기를 익혔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보성의 미술 교사인 고희동의 지도로 3학년때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풍경’으로 입선된 일도 있었다. 이런 미술적 재능은 외로웠던 해경의 내면의 또 다른 분출구였다.
3) 학창시절 2 (경성고공시절)
17살이 되던 1926년 4월 해경은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총독부 건설과 기사직에 근무했던 백부의 권유에 의해서기도 했지만, 고공은 해경이 그림과 문학에 대한 꿈을 이루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그나마 미술을 할 수 있는 곳은 경성고공뿐이었기 때문이다. 학우들은 해경이 고공을 선택한 것은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열정이 서서히 그림에서 문학으로 옮겨갈 즈음에 그는 고공의 회람지인 <난파선>을 주도하며 도안 삽화와 함께 편집도 맡고 자작시도 실어 그의 예술적 자질을 펼쳐나갔다. 또 그는 시작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1인치가 넘는 두꺼운 무괘지 노우트에는 바늘끝 같은 날카로운 만년필 필촉으로 쓰인 시들이 활자 같은 정자로 빼곡 들어가 차 있었다. 그는노우트를 책상 서랍 속에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한다.
4) 건축기사 시절
1929년 4월 해경은 고공을 졸업하자마자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직에 취직하여, 1931년에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1933년에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4년간 그 직장에서 일했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데도 열중하였으며, 31년에는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백부가 사망하였다.
5) 문단활동기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백부의 유산을 나누어 23년만에 자신의 친부모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상은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가 구본웅과 함께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거기서 그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금홍을 만나 1933년 7월부터 1934년 6월까지 곧 카페 ‘제비’가 문을 열어 닫을 때까지 같이 지낸다.
요양 후에 기운을 차린 상은 더욱 문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정지용과의 친분으로 <카톨릭 청년>에 시를 발표하게 되는데 지용의 영향으로 국어 사용이나 언어의 미학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 25세에는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 <오감도>를 연재하였지만 일반대중의 항의로 연재는 중단되었다. 이무렵 상은 하융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려 독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다음해인 35년에는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는 경영실패로 파산하게 된다. 그 후 계속해서 다방 ‘학’과 ‘69’, ‘맥’도 모두 실패하고 만다. 잇다른 카페경영의 실패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성천으로 떠났다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하여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하였으며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 편집에도 관여하였다. 그런 속에서 새로운 여인 변동림과 신흥사에서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금정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변동림과의 결혼도 이상을 행복하고 안정되게 하지는 못했는지 김유정을 찾아가 동반자살을 권유했으나 김유정이 응하지 않자 그 해 10월 동경으로 떠난다.
6) 동경시절과 죽음
이상은 ‘새로운 희망, 컨디
1936 (27세)
3월,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시와 소설』을 편집 1집만 내고 창문사 나옴. 「지비 1·2·3」(중앙),「역단」(가톨릭청년)을 발표. 수필「선망률도」(조광)「조춘점묘」(매일신보),「가외가전」,「여상」,「낙수」, 「Epigram」,「매상」등을 발표.
단편「지주회시」,「날개」등을 발표. 전부터 알았던 이화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떠남. 그 곳에서 「공포의 기록」,「종생기」,「권태」,「슬픈 이야기」, 「환시기」등을 씀.
시「위독」(조선일보), 수필「행복」(여성), 「추등잡필」,「1세기식」(삼사문학)등 발표. 소설「봉별기」(여성),「동해」(조광), 동화「황소와 도깨비」(매일신보)등을 발표.
1937 (28세)
2월,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 3월,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 4월17일 오전 4시,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향년 만 26년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유실. 5월에 「종생기」(조광),「권태」 발표.
1939
「실락원」(조광),「실화」(문장)등 유고로 발표.
1) 출생과 유년시절
김해경은 1910년 음력 8월 20일에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해경은 이름을 지어준 조부 병복의 성화로 젖을 때자마자 3살 때 아들이 없는 백부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김해경은 어린 시절 남달리 총명해서 백부와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문향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시집 온 큰어머니에게는 질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해경을 총명하지만 매우 내성적인 아이로 만들었다.
2) 학창시절 1 (신광, 동광, 보성시절)
8세가 되어 그는 백부의 개화된 식견에 의해 취학 적령기에 맞춰서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해경은 졸업반인 4학년때 담배 ‘칼표’껍질에 그려진 그림을 거의 그대로 모방해서 그리는 등 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자질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어린아이가 놀이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로 조숙했던 해경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15살에는 보성고보에 동광학교가 해체ㆍ편입되어 해경도 소속되는데, 그는 거기서 고유섭, 유진산, 이헌구, 임화, 김상기, 원용석 등과 1년 아래의 김기림, 김환태 등을 만나게 된다. 또 이 시절 그는 현미빵(빵떡)을 팔면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고, 이런 고학 생활은 고공 시절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교사 황의돈과 김상용 등에 의해서 문학적 분위기를 익혔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보성의 미술 교사인 고희동의 지도로 3학년때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풍경’으로 입선된 일도 있었다. 이런 미술적 재능은 외로웠던 해경의 내면의 또 다른 분출구였다.
3) 학창시절 2 (경성고공시절)
17살이 되던 1926년 4월 해경은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총독부 건설과 기사직에 근무했던 백부의 권유에 의해서기도 했지만, 고공은 해경이 그림과 문학에 대한 꿈을 이루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그나마 미술을 할 수 있는 곳은 경성고공뿐이었기 때문이다. 학우들은 해경이 고공을 선택한 것은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열정이 서서히 그림에서 문학으로 옮겨갈 즈음에 그는 고공의 회람지인 <난파선>을 주도하며 도안 삽화와 함께 편집도 맡고 자작시도 실어 그의 예술적 자질을 펼쳐나갔다. 또 그는 시작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1인치가 넘는 두꺼운 무괘지 노우트에는 바늘끝 같은 날카로운 만년필 필촉으로 쓰인 시들이 활자 같은 정자로 빼곡 들어가 차 있었다. 그는노우트를 책상 서랍 속에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한다.
4) 건축기사 시절
1929년 4월 해경은 고공을 졸업하자마자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직에 취직하여, 1931년에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1933년에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4년간 그 직장에서 일했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데도 열중하였으며, 31년에는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백부가 사망하였다.
5) 문단활동기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백부의 유산을 나누어 23년만에 자신의 친부모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상은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가 구본웅과 함께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거기서 그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금홍을 만나 1933년 7월부터 1934년 6월까지 곧 카페 ‘제비’가 문을 열어 닫을 때까지 같이 지낸다.
요양 후에 기운을 차린 상은 더욱 문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정지용과의 친분으로 <카톨릭 청년>에 시를 발표하게 되는데 지용의 영향으로 국어 사용이나 언어의 미학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 25세에는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 <오감도>를 연재하였지만 일반대중의 항의로 연재는 중단되었다. 이무렵 상은 하융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려 독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다음해인 35년에는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는 경영실패로 파산하게 된다. 그 후 계속해서 다방 ‘학’과 ‘69’, ‘맥’도 모두 실패하고 만다. 잇다른 카페경영의 실패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성천으로 떠났다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하여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하였으며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 편집에도 관여하였다. 그런 속에서 새로운 여인 변동림과 신흥사에서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금정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변동림과의 결혼도 이상을 행복하고 안정되게 하지는 못했는지 김유정을 찾아가 동반자살을 권유했으나 김유정이 응하지 않자 그 해 10월 동경으로 떠난다.
6) 동경시절과 죽음
이상은 ‘새로운 희망, 컨디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