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놀이의 이해 - 놀이의 의미, 줄다리기, 강강술래, 답교놀이, 귀족적 놀이(투호, 승람도놀이), 서민적 놀이(석진, 씨름), 오늘날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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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놀이의 이해 - 놀이의 의미, 줄다리기, 강강술래, 답교놀이, 귀족적 놀이(투호, 승람도놀이), 서민적 놀이(석진, 씨름), 오늘날의 놀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놀이
1) 놀이의 어원
2) 호모루덴스 [Homo ludens]
3) 인간이 노는 이유

3. 줄다리기

4. 강강술래

5. 답교놀이

6. 귀족적 놀이, 서민적 놀이
1) 귀족적 놀이
(1) 투호
(2) 승람도놀이
2) 서민적 놀이
(1) 석전
(2) 씨름

7. 오늘날의 놀이

본문내용

대한 체계적인 관념을 자제들에게 익혀주기 위하여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2) 서민적 놀이
(1) 석전
돌싸움이란 두 편의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돌을 던져가며 편싸움을 하는 놀이로 석전(石戰)이라 부르기도 한다. 돌싸움은 민속놀이 중 가장 남성적이고 전투적인 놀이이다. 주로 개천이나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두 편 마을사람들이 서로 돌맹이를 던지며 싸우다가 맞붙어 이른바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 놀이의 연원을 살펴보면 아득한 옛날 원시공동사회 이전 수렵시대까지로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쇠붙이를 가공하여 사용할 줄 몰랐던 그 때에는 돌맹이나 나무 등이 생활도구 혹은 무기로 긴요하게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철제무기가 발달하였을 때 돌이나 몽둥이는 여전히 무기로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돌싸움은 실전에 대비한 훈련으로 민중의 자체방어의 일상적 몸가짐으로 널리 보급되어 민속놀이로도 자리잡혀 온 것 같다.
그러나 돌싸움놀이는 세시풍속의 놀이적 성격에서 벗어나 전쟁에 대비한 군대조직인 석투반(石投班)이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등에 있어 왔다고 옛 기록이 전하고 있다. 석투반 활동의 한 예를 들면 조선 중종 때의 삼포왜란 때에 안동 · 김해지방에서는 척석(擲石)꾼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여러번에 걸쳐 법령에 의해 돌싸움을 금지해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편싸움의 격렬성이 자아내는 위험도와 부작용 때문이었으나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위정자가 민중의 힘을 두렵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금지령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아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가 끝내 없어지지 않은 것은 민중들의 공동체적이고 진취적 기상의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에는 저들의 악랄한 통치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민속놀이인 돌싸움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2) 씨름
두사람이 달려들어 힘을 겨루고 재주를 부려 상대방을 넘어뜨려 이기고 지는 것을 결정하는 운동경기를 말한다.[註] 한자로는 각저(角抵) · 각저(角紗) · 각력(角力) · 용희(勇戱) · 상박(相撲)이라고도 한다.
씨름은 본래 무희였던 만큼 고대사회로부터 각종 제전행사나 놀이가 있을 때 힘센 남자들이 서로 힘을 겨루어 승부를 결정하여 이긴 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씨름은 어느 한 민족이나 어느 한 국가에서 발생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각 민족과 나라별로 제각기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씨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중국과 일본은 씨름에 대한 많은 기록과 다양한 법식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씨름은 이미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만주 통구에 있는 4C경의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각저총 주실(主室) 석벽에는 두사람이 맞붙어 씨름하는 광경과 심판하는 사람 · 구경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이 고분 벽화를 통해서 볼 때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씨름을 매우 좋아했고 또 상당히 성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 나타난 씨름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충혜왕조가 처음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씨름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이 정무를 폐신(嬖臣)인 배전(裴佺)과 주주(朱柱) 등에게 위임하고 날마다 내수(內竪)로 더불어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의 예(禮)가 없었다.[註]
왕이 용사(勇士)를 거느리고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註]
공주가 연경궁으로 옮기니 왕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여 주고 밤에는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註]
왕이 고룡보(高龍普)로 더불어 시가(市街) 다락에 좌정하고 격구(擊毬)와 씨름놀이를 구경하고 용사들에게 포(布)를 수없이 상주었다.[註]」
이상『고려사』에 나타난 씨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때 충혜왕이 씨름을 매우 좋아했던 것과 당시 씨름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당시 씨름꾼을 ‘용사’라 불렀음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씨름에 대한 기록들이 상당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동국세시기』 · 『경도잡지』 · 『개성지』 · 『어간야담』등에 씨름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7. 오늘날의 놀이
예전 놀이에는 풍요, 다산등 의미가 부여되어 일종의 미신의 역할을 하였는데, 지금의 놀이는 너무 재미, 즉 쾌락만을 추구 하고 의미가 결여된 거 같다. 이루어지진 않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단합을 통하여 풍작을 비는 그런 서민적인 모습을 찾기 힘들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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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4.06.02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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