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정조의 사회통합사상
2) 명검론
3) 언론
4) 진퇴론
Ⅲ. 정조의 탕평책
1) 탕평의 개념과 탕평론 대두
2) 의리 탕평론의 전개
Ⅳ. 정조의 왕권 강화책
1) 탕평책의 계승
2) 규장각의 설치
3) 장용영의 설치
4) 화성 신도시 건설
Ⅴ. 결론
Ⅱ. 본론
1. 정조의 사회통합사상
2) 명검론
3) 언론
4) 진퇴론
Ⅲ. 정조의 탕평책
1) 탕평의 개념과 탕평론 대두
2) 의리 탕평론의 전개
Ⅳ. 정조의 왕권 강화책
1) 탕평책의 계승
2) 규장각의 설치
3) 장용영의 설치
4) 화성 신도시 건설
Ⅴ. 결론
본문내용
가지고 탕평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다.
문체반정은 타락해 가는 문체를 순정한 문체로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것으로 노론 벽파 계열인 연암 朴趾源 일파의 신체문을 겨냥하고 있지만 당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정조는 북학파 계열인 문체가 명말청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수성을 잃고 있다는 비판을 가하고 그들에게 반성문을 요구하는 것으로 문체반정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론인 부교리 이동직이 남인인 이가환의 문체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오자 정조는 문체반정의 근본적인 목적이 사색을 타파하는 탕평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이에 문풍의 진작과 탕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하여 문체반정을 추진하게 된 경위가 밝혀졌다.
노론 전권 체제가 굳어지고 있던 정치 상황 속에서 영조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초부터 붕당간의 상호 견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리와 명분을 새롭게 하는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당론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론 벽파를 회유하여 자신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時派 중심의 정계 구도로 재편하려는 의도가 노론 벽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문체반정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문체 내지 문풍이라는 당의를 입혀 어려운 정치 문제를 풀어가려는 정조의 고난도 정치 술수었다. 그 결과 노론계의 많은 인물이 시파로 전향함으로써 정조의지지 기반이 확대되었다.
2) 규장각의 설치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하여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도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宗簿侍에 소각을 따로 세워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을 받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어서를 봉안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이후 유명 무실한 존재였던 규장각을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세력 기반 구축과 문화 정책을 추진하는 기관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규장각은 그 기능이나 성격이 정치 정세에 따라, 혹은 상황 변동에 의해 조금씩 변질되며 그 조직이나 제도도 몇 번에 걸쳐 정비된다. 홍문관에서 관장하던 경연의 임무를 이관받아 정조가 주체가 되는 학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비서실의 기능과 文翰의 기능, 사관과 시관의 역할을 했고 정책 입안은 물론 정책 개발을 위한 참고 도서를 수집하여 소장하는 한편 서적 간행까지 했다.
규장각은 이러한 기능 외에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시키는 공무원 교육원의 역할을 함으로써 정조의 친위세력 형성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른바 抄啓文臣이라 하여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하여 일정 기간 동안 교육시키는 문신 재교육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규장각 내각의 실천 목표인 인재 양성의 구체적 장치이고 이 장치는 정조의 친위세력으로서도 일정한 몫을 했다.
3) 장용영의 설치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장치로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기관은 정조의 경호부대로 시작된 壯勇衛를 모태로 하여 규모를 대폭 확대하여 설치한 壯勇營이다. 정조는 문반의 핵심 관료군을 규장각에 모아 두뇌 집단으로 삼고 권력 유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군대를 장용영으로 개편하여 친위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5군영이 각 붕당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정치 군대로 변질되고 군영이 정치 자금의 공급원 역할까지 하던 상황에서 군제 개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한 양란 후 2세기에 걸쳐 평화기가 계속되고 문치주의가 극성기에 이르러 조선 후기 사회가 전반적으로 문약해지는 데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던 것도 장용영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장용영은 內營과 外營으로 구성되었다. 내영은 서울의 본영으로 지휘관은 장용사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불렸다. 규모는 이전의 馬步軍 3 哨에서 5 司 25초로 확대되고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외영은 화성에 두어 5천명의 병마를 주둔시켰다. 다음 단계로 주변의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등 다섯 읍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용에 소속시켜 지역 공동 방위군인 協守軍 부대를 조직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이라는 문무 핵심 친위기구를 조직하여 왕권을 강화, 권력 기반을 확고히 했다.
4) 화성 신도시 건설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은 정조의 왕권 강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여 자신의 정통성과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아버지의 능침을 수원 남쪽의 花山으로 이장하고 그 수호 도시로서 화산 북쪽을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조선이 中華라는 문화적 자부심을 기저로 하여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도 중화의 도성인 화성의 존재가 필요했다.
화성 건설 사업은 1974년 봄에 착수되어 2년 반 만인 1796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건설비용은 86만 냥이었다. 화성 건설은 북학사상의 영향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신기술을 응용하여 벽돌을 만들고 거중기를 비롯한 건축 기계들을 제작하여 사용한 점도 특기할 일이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에 옮기고 顯隆園이라 한 것이 정조 13년으로 이때에 이미 정조는 수원을 건설하려는 기획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화성으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을 투자하여 직할시로 삼아 현륭원의 관리와 수원 행차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도록 했다. 정조는 우선 화성 주변에 대대적인 수리 시설과 국영 농장인 屯田을 두었다. 수원이 농업 도시로 발전한 기반은 이 때 다져진 것이다. 주민들의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지방민들에게도 혜택을 줌으로써 화성은 농업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하여 윤택하고 살기좋은 신도시로 부상했다.
Ⅴ. 결론
조선시대의 시대사상이 성리학이고 조선 후기 사회는 성리학 이념이 국가 사회에 구체화된 역사의 장이었다. 이 시대 국민적 화합과 동의는 어떻게 모색되고 가능성을 확보해 갔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그 문화의 꽃이 만개한 진경시대 최고의 통치자의 사회통합사상을 먼저 알아보았다. 정조는 의리가 변질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었다. 당시대는 성리학적 명분 사회였기 때문에 명분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행위의 기본 축으로 작용했다.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의 동의를
문체반정은 타락해 가는 문체를 순정한 문체로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것으로 노론 벽파 계열인 연암 朴趾源 일파의 신체문을 겨냥하고 있지만 당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정조는 북학파 계열인 문체가 명말청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수성을 잃고 있다는 비판을 가하고 그들에게 반성문을 요구하는 것으로 문체반정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론인 부교리 이동직이 남인인 이가환의 문체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오자 정조는 문체반정의 근본적인 목적이 사색을 타파하는 탕평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이에 문풍의 진작과 탕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하여 문체반정을 추진하게 된 경위가 밝혀졌다.
노론 전권 체제가 굳어지고 있던 정치 상황 속에서 영조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초부터 붕당간의 상호 견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리와 명분을 새롭게 하는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당론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론 벽파를 회유하여 자신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時派 중심의 정계 구도로 재편하려는 의도가 노론 벽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문체반정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문체 내지 문풍이라는 당의를 입혀 어려운 정치 문제를 풀어가려는 정조의 고난도 정치 술수었다. 그 결과 노론계의 많은 인물이 시파로 전향함으로써 정조의지지 기반이 확대되었다.
2) 규장각의 설치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하여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도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宗簿侍에 소각을 따로 세워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을 받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어서를 봉안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이후 유명 무실한 존재였던 규장각을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세력 기반 구축과 문화 정책을 추진하는 기관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규장각은 그 기능이나 성격이 정치 정세에 따라, 혹은 상황 변동에 의해 조금씩 변질되며 그 조직이나 제도도 몇 번에 걸쳐 정비된다. 홍문관에서 관장하던 경연의 임무를 이관받아 정조가 주체가 되는 학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비서실의 기능과 文翰의 기능, 사관과 시관의 역할을 했고 정책 입안은 물론 정책 개발을 위한 참고 도서를 수집하여 소장하는 한편 서적 간행까지 했다.
규장각은 이러한 기능 외에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시키는 공무원 교육원의 역할을 함으로써 정조의 친위세력 형성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른바 抄啓文臣이라 하여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하여 일정 기간 동안 교육시키는 문신 재교육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규장각 내각의 실천 목표인 인재 양성의 구체적 장치이고 이 장치는 정조의 친위세력으로서도 일정한 몫을 했다.
3) 장용영의 설치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장치로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기관은 정조의 경호부대로 시작된 壯勇衛를 모태로 하여 규모를 대폭 확대하여 설치한 壯勇營이다. 정조는 문반의 핵심 관료군을 규장각에 모아 두뇌 집단으로 삼고 권력 유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군대를 장용영으로 개편하여 친위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5군영이 각 붕당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정치 군대로 변질되고 군영이 정치 자금의 공급원 역할까지 하던 상황에서 군제 개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한 양란 후 2세기에 걸쳐 평화기가 계속되고 문치주의가 극성기에 이르러 조선 후기 사회가 전반적으로 문약해지는 데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던 것도 장용영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장용영은 內營과 外營으로 구성되었다. 내영은 서울의 본영으로 지휘관은 장용사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불렸다. 규모는 이전의 馬步軍 3 哨에서 5 司 25초로 확대되고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외영은 화성에 두어 5천명의 병마를 주둔시켰다. 다음 단계로 주변의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등 다섯 읍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용에 소속시켜 지역 공동 방위군인 協守軍 부대를 조직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이라는 문무 핵심 친위기구를 조직하여 왕권을 강화, 권력 기반을 확고히 했다.
4) 화성 신도시 건설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은 정조의 왕권 강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여 자신의 정통성과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아버지의 능침을 수원 남쪽의 花山으로 이장하고 그 수호 도시로서 화산 북쪽을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조선이 中華라는 문화적 자부심을 기저로 하여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도 중화의 도성인 화성의 존재가 필요했다.
화성 건설 사업은 1974년 봄에 착수되어 2년 반 만인 1796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건설비용은 86만 냥이었다. 화성 건설은 북학사상의 영향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신기술을 응용하여 벽돌을 만들고 거중기를 비롯한 건축 기계들을 제작하여 사용한 점도 특기할 일이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에 옮기고 顯隆園이라 한 것이 정조 13년으로 이때에 이미 정조는 수원을 건설하려는 기획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화성으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을 투자하여 직할시로 삼아 현륭원의 관리와 수원 행차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도록 했다. 정조는 우선 화성 주변에 대대적인 수리 시설과 국영 농장인 屯田을 두었다. 수원이 농업 도시로 발전한 기반은 이 때 다져진 것이다. 주민들의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지방민들에게도 혜택을 줌으로써 화성은 농업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하여 윤택하고 살기좋은 신도시로 부상했다.
Ⅴ. 결론
조선시대의 시대사상이 성리학이고 조선 후기 사회는 성리학 이념이 국가 사회에 구체화된 역사의 장이었다. 이 시대 국민적 화합과 동의는 어떻게 모색되고 가능성을 확보해 갔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그 문화의 꽃이 만개한 진경시대 최고의 통치자의 사회통합사상을 먼저 알아보았다. 정조는 의리가 변질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었다. 당시대는 성리학적 명분 사회였기 때문에 명분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 행위의 기본 축으로 작용했다.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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