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고려 후기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
1. 고려 후기 사회의 형성
2. 신흥 사대부의 등장
Ⅱ. 경기체가의 개괄적 성격
1. 경기체가의 개념
2. 경기체가의 향유층
3. 경기체가의 작품세계
Ⅲ. <한림별곡> 작품 해설
Ⅳ. 기출 문제 및 예상 문제 해설
- 참고문헌 -
1. 고려 후기 사회의 형성
2. 신흥 사대부의 등장
Ⅱ. 경기체가의 개괄적 성격
1. 경기체가의 개념
2. 경기체가의 향유층
3. 경기체가의 작품세계
Ⅲ. <한림별곡> 작품 해설
Ⅳ. 기출 문제 및 예상 문제 해설
- 참고문헌 -
본문내용
및 주관화하는 서정성이 강화됨과 동시에 엄격한 율격적 통제를 벗어난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주관적인 서정성을 드러내기에는 사물을 열거하면서 감탄하는 형식을 기본요건으로 삼는 경기체가의 정형성에 많은 제약을 많이 받았고, 결국 경물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며 남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또다른 교술시인 가사의 성장에 비례해 몰락하고 말았다. 조동일 교수는 위의 책에서 “먼저 나타난 경기체가가 쇠퇴하면서 후발 교술시 가사가 주도권을 차지해 오랜 생명을 누리면서 다음 시대에도 큰 구실을 했다. 시조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경기체가의 몰락과 가사 및 시조 장르의 존속을 확정적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 사대부들이 경기체가를 자기 생활 표현을 위한 사적인 문학으로 키워나감으로서 교화를 베풀고 훈민을 하는 수단으로서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승려들이 경기체가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계 경기체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서 “사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기체가 본래의 특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기존의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노래를 만들고자 했다.” 조동일 위의 책, 306쪽 참조
정리하자면, 처음『한림별곡』에서 교술성이 자리를 굳힌 이후, 안축의『관동별곡』과 『죽계별곡』에 이르러서 경기체가가 기본적으로는 교술성에 기초하지만 『한림별곡』에 비해서는 서정성이 함께 강화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조선 전기 사대부 국문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던 경기체가는 점차 서정성 내지는 개인적 경향을 보이는 동시에 정형성이 무너지고 형식이 산만해 지면서 서서히 해체되어 가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경기체가는 고려 후기 이때의 고려 후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무신란 이후 고려 전반을 칭한다.
에 새롭게 형성되어, 조선 전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조선 중기 이전에 가사 문학에 자리를 내주고 해체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Ⅲ. <한림별곡> 작품 해설
1. <한림별곡>의 작자, 향유층, 연행양상
<한림별곡>의 작자는 ‘高宗時 翰林諸儒所作(고종때 한림제유가 지었다)’이라 기록되어있는데, 고려 무신 정권기인 고종 조에 제작된 것으로 창작과정 및 창작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 문인층의 모임의 성격을 통해 그 연행상황을 짐작 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고려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김학성 외,『신편, 고전시가론』새문사, 2002, 245쪽
기미년 5월에 진강공의 집에 천엽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공이 한림 이인로, 한림 김극기, 유원 이담지, 사직 함순, 선달 이규보 등을 초청하여 시를 요구하였다. (중략) 이한림이 부르기를 (중략) 이선달을 부르기를 (중략) 다음 사람은 (중략) 비단장막 연이 제일 잘 되었다 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생황에 올렸다.
조문정공이 대제 유충기, 사간 이백순 및 여러문인들과 더불어 독락원에서 놀면서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시를 주고 받고 하는데(중략) 이백순이 짓기를 (중략) 유충기가 짓기를 (중략) 조문정공이 짓기를(중략) 하니 온 좌중이 놀라 다시 계속해 화답할 사람이 없었더라. 김학성 외, 앞의 책
<최자 보한집>
최충헌(진강공)의 주관으로 또는 문인들만의 연회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형식의 시를 돌아가며 부르고 그것을 악곡에 올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한림별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한림별곡 각 장도 여러 명의 문인들이 한 장씩 불렀다가 조동일 교수는 위의 책 180쪽에서 <한림별곡>이 돌림노래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품이 뛰어나자 악장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학성 외, 앞의 책
<한림별곡>은 악장으로서 조선조에도 연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행상황에 대한 조선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술과 고기를 내리고 명하기를 “너희들은 <한림별곡>을 부르고 즐겨라” 했다.
- <태종실록 13년 7월> -
술과 앵무잔을 승정원과 홍문관에 하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한림별곡>에 앵무잔이니 호박배니 하는 등의 말이 있으니 한림들에게 술잔을 돌려서 술을 많이 마시고 헤어지게 하라“ 했다.
- <성종실록 10년 11월> -
예문관 봉교 안진생 등이 아뢰기를... <한림별곡>을 본관의 모임에 노래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새로 된 검열 조위가 연회를 베풀어 신 등을 맞이했는데... ... 기생과 악공들이 장고, 피리. 필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종실록> 6년 8월 -
예문관이 더욱 심하다. (중략) 새벽이 되면 상관장이 술자리에서 일어선다. 여러 사람이 다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한림별곡을 부른다. 이에 맑은 노래 소리가 매미 울음처럼 쏟아지는 사이에 들끓는 음란한 음악이 섞인다. 날이 새야 비로소 흩어진다. - 성혼, <용제업화> 권 4 - 김학성 외, 앞의 책
이 기록을 통해서 볼 때 <한림별곡>은 임금과 고위직에 있는 관료들이 모이는 잔치에서 불렀으며 특히 에문관의 신참례에서는 공식적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림별곡>은 궁중가악의 중요 곡목일 뿐만 아니라 민간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남효온(1454~1492)이 개성에서 <한림별곡>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은 고려의 유산인 <한림별곡>이 전왕조의 수도에서 여전히 불리고 있음과 동시에 당시 훈구 사대부의 애창곡이었음을 뜻한다. 김명준, 앞의 책, 151쪽
이렇듯 이 작품이 조선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가며 사대부들에 의해 불렸던 이유는, 사대부들의 포부를 드러내고, 자부심을 내비침으로써 희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한림별곡>의 주제 - 개별적 열거와 포괄적 인식
경기체가는 화자의 정서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사물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전대절의 표현이 각 장에서 반복되며, 여음의 사용 이후, 화자의 정서를 표출시키는 후소절로 이어진다. <한림별곡> 1장을 예로 들면, 외부사물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주필, 유충기의 대책 등을 말한다.
의 열거에서 시작한 작품은 네 번째 행인 ‘위 시
다시 말해 사대부들이 경기체가를 자기 생활 표현을 위한 사적인 문학으로 키워나감으로서 교화를 베풀고 훈민을 하는 수단으로서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승려들이 경기체가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계 경기체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서 “사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기체가 본래의 특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기존의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노래를 만들고자 했다.” 조동일 위의 책, 306쪽 참조
정리하자면, 처음『한림별곡』에서 교술성이 자리를 굳힌 이후, 안축의『관동별곡』과 『죽계별곡』에 이르러서 경기체가가 기본적으로는 교술성에 기초하지만 『한림별곡』에 비해서는 서정성이 함께 강화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조선 전기 사대부 국문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던 경기체가는 점차 서정성 내지는 개인적 경향을 보이는 동시에 정형성이 무너지고 형식이 산만해 지면서 서서히 해체되어 가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경기체가는 고려 후기 이때의 고려 후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무신란 이후 고려 전반을 칭한다.
에 새롭게 형성되어, 조선 전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조선 중기 이전에 가사 문학에 자리를 내주고 해체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Ⅲ. <한림별곡> 작품 해설
1. <한림별곡>의 작자, 향유층, 연행양상
<한림별곡>의 작자는 ‘高宗時 翰林諸儒所作(고종때 한림제유가 지었다)’이라 기록되어있는데, 고려 무신 정권기인 고종 조에 제작된 것으로 창작과정 및 창작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 문인층의 모임의 성격을 통해 그 연행상황을 짐작 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고려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김학성 외,『신편, 고전시가론』새문사, 2002, 245쪽
기미년 5월에 진강공의 집에 천엽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공이 한림 이인로, 한림 김극기, 유원 이담지, 사직 함순, 선달 이규보 등을 초청하여 시를 요구하였다. (중략) 이한림이 부르기를 (중략) 이선달을 부르기를 (중략) 다음 사람은 (중략) 비단장막 연이 제일 잘 되었다 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생황에 올렸다.
조문정공이 대제 유충기, 사간 이백순 및 여러문인들과 더불어 독락원에서 놀면서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시를 주고 받고 하는데(중략) 이백순이 짓기를 (중략) 유충기가 짓기를 (중략) 조문정공이 짓기를(중략) 하니 온 좌중이 놀라 다시 계속해 화답할 사람이 없었더라. 김학성 외, 앞의 책
<최자 보한집>
최충헌(진강공)의 주관으로 또는 문인들만의 연회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형식의 시를 돌아가며 부르고 그것을 악곡에 올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한림별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한림별곡 각 장도 여러 명의 문인들이 한 장씩 불렀다가 조동일 교수는 위의 책 180쪽에서 <한림별곡>이 돌림노래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품이 뛰어나자 악장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학성 외, 앞의 책
<한림별곡>은 악장으로서 조선조에도 연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행상황에 대한 조선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술과 고기를 내리고 명하기를 “너희들은 <한림별곡>을 부르고 즐겨라” 했다.
- <태종실록 13년 7월> -
술과 앵무잔을 승정원과 홍문관에 하사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한림별곡>에 앵무잔이니 호박배니 하는 등의 말이 있으니 한림들에게 술잔을 돌려서 술을 많이 마시고 헤어지게 하라“ 했다.
- <성종실록 10년 11월> -
예문관 봉교 안진생 등이 아뢰기를... <한림별곡>을 본관의 모임에 노래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새로 된 검열 조위가 연회를 베풀어 신 등을 맞이했는데... ... 기생과 악공들이 장고, 피리. 필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종실록> 6년 8월 -
예문관이 더욱 심하다. (중략) 새벽이 되면 상관장이 술자리에서 일어선다. 여러 사람이 다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한림별곡을 부른다. 이에 맑은 노래 소리가 매미 울음처럼 쏟아지는 사이에 들끓는 음란한 음악이 섞인다. 날이 새야 비로소 흩어진다. - 성혼, <용제업화> 권 4 - 김학성 외, 앞의 책
이 기록을 통해서 볼 때 <한림별곡>은 임금과 고위직에 있는 관료들이 모이는 잔치에서 불렀으며 특히 에문관의 신참례에서는 공식적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림별곡>은 궁중가악의 중요 곡목일 뿐만 아니라 민간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남효온(1454~1492)이 개성에서 <한림별곡>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은 고려의 유산인 <한림별곡>이 전왕조의 수도에서 여전히 불리고 있음과 동시에 당시 훈구 사대부의 애창곡이었음을 뜻한다. 김명준, 앞의 책, 151쪽
이렇듯 이 작품이 조선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가며 사대부들에 의해 불렸던 이유는, 사대부들의 포부를 드러내고, 자부심을 내비침으로써 희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한림별곡>의 주제 - 개별적 열거와 포괄적 인식
경기체가는 화자의 정서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사물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전대절의 표현이 각 장에서 반복되며, 여음의 사용 이후, 화자의 정서를 표출시키는 후소절로 이어진다. <한림별곡> 1장을 예로 들면, 외부사물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주필, 유충기의 대책 등을 말한다.
의 열거에서 시작한 작품은 네 번째 행인 ‘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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