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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카라구아, 코스타 리카 연안을 탐사하면서 인도양으로 통하는 해로를 발견하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1502년 10월 말에는 파나마의 베라구아 부근까지 탐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금을 수집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 원주민들로부터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암바와 씨구아레지방에 금과 향료 등이 풍부하게 있다는 정보도 듣게 되었는데, 콜럼버스는 이 씨구아레를 갠지즈 강 근처에 있는 까띠가라와 동일시 하였다. 콜럼버스는 이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파나마동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11월 2일 푸에르토 벨로를 거쳐 11월 26일에는 레트레베테까지 이르렀으나 역조와 악천후, 장기간의 항해로 인한 선원들의 사기 저하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난 콜럼버스는 결국 회항을 결심하여 1503년 1월6일 악천후 속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베라구아 부근의 벨렌 강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콜럼버스는 신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콜럼버스는 이곳에 마을을 세워 바르톨로뮤에게 맡겨 금광을 찾아보게 하고, 자신은 스페인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세워진 마을이 산타 마리아 데 벨렌이었다. 이 마을은 남미 본토에 세워진 최초의 식민 도시였다. 콜럼버스는 이곳에서 4월 16일까지 머물러 있다가 20 여명의 인원을 남겨놓고, 스페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식량을 수급하고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산토 도밍고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겪은 악천후로 배는 파선 상태였고, 그나마 좀조개들이 선저를 파먹어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결국 두 척의 배로는 더 이상의 항해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콜럼버스는 6월 25일 자마이카로 들어가서 피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를 포함한 116 명의 탐험대는 이곳에서 거의 일년여 동안 고립되게 되었다. 당시 이들이 자마이카에서 겪은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그러나 디에고 멘데스의 죽음을 무릅쓴 행동으로 고립된지 일년여 만인 1504년 6월 29일 멘데스가 임대한 배에 승선하여 자마이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산토 도밍고에서 휴식을 취한 뒤 출항하여 1504년 11월 7일 산루카르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2년 반에 걸친 콜럼버스의 4차 탐험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국왕으로부터 어렵게 허가받은 4차 탐험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애당초 목표로 하고 있었던 인도양으로의 수로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베라구아에서 발견한 금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룩한 것이 있다면 파나마의 베라구아 근처에 벨렌이라는 남미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정도였다.
3]레포트를 쓰면서 느낀점
흔히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되는 점이 있다. 바로 콜럼버스의 항해가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인지 침략인지이다. 물론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지를 발견한 모험가이며 식민지를 건설하여 부를 축적해 재정 상태를 일으켰지만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입장으로 보면 그는 침략가임이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신대륙 미국의 건국과 번영에 헌신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공헌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반면, 일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이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모두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콜럼버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이지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자는 운동이 전개된다는 것 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 사람들의 콜럼버스에 대한 인식을 보면 미화된 부분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난 콜럼버스는 결국 회항을 결심하여 1503년 1월6일 악천후 속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베라구아 부근의 벨렌 강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콜럼버스는 신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콜럼버스는 이곳에 마을을 세워 바르톨로뮤에게 맡겨 금광을 찾아보게 하고, 자신은 스페인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세워진 마을이 산타 마리아 데 벨렌이었다. 이 마을은 남미 본토에 세워진 최초의 식민 도시였다. 콜럼버스는 이곳에서 4월 16일까지 머물러 있다가 20 여명의 인원을 남겨놓고, 스페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식량을 수급하고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산토 도밍고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겪은 악천후로 배는 파선 상태였고, 그나마 좀조개들이 선저를 파먹어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결국 두 척의 배로는 더 이상의 항해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콜럼버스는 6월 25일 자마이카로 들어가서 피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를 포함한 116 명의 탐험대는 이곳에서 거의 일년여 동안 고립되게 되었다. 당시 이들이 자마이카에서 겪은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그러나 디에고 멘데스의 죽음을 무릅쓴 행동으로 고립된지 일년여 만인 1504년 6월 29일 멘데스가 임대한 배에 승선하여 자마이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산토 도밍고에서 휴식을 취한 뒤 출항하여 1504년 11월 7일 산루카르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2년 반에 걸친 콜럼버스의 4차 탐험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국왕으로부터 어렵게 허가받은 4차 탐험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애당초 목표로 하고 있었던 인도양으로의 수로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베라구아에서 발견한 금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룩한 것이 있다면 파나마의 베라구아 근처에 벨렌이라는 남미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정도였다.
3]레포트를 쓰면서 느낀점
흔히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되는 점이 있다. 바로 콜럼버스의 항해가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인지 침략인지이다. 물론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지를 발견한 모험가이며 식민지를 건설하여 부를 축적해 재정 상태를 일으켰지만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입장으로 보면 그는 침략가임이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신대륙 미국의 건국과 번영에 헌신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공헌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반면, 일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이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모두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콜럼버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이지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자는 운동이 전개된다는 것 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 사람들의 콜럼버스에 대한 인식을 보면 미화된 부분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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