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로마와 지중해 세계
-들어가는 말-
-본론 <로마와 지중해 세계>-
1. 왕정시대의 정치와 사회
A. 로마의 건국
B. 정치와 사회
2. 공화정 로마
A. 공화정과 평민세력의 대두
B.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맺는말-
-들어가는 말-
-본론 <로마와 지중해 세계>-
1. 왕정시대의 정치와 사회
A. 로마의 건국
B. 정치와 사회
2. 공화정 로마
A. 공화정과 평민세력의 대두
B.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맺는말-
본문내용
게 의존하다 보니 어떠한 중요한 일들을 시행하기 전에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처럼 신들에게 먼저 의향을 물어보는 행위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희생동물의 내장을 조사하는 내장 점술사, 새의 비행 상태, 희생물인 닭의 시식 등을 통해 전조를 관찰하는 새 점술사 등과 같은 점술 전문가들이 출현했다. 이러한 미신적인 행위들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 도시국가에서 치러진 성대한 제사
제사는 도시국가의 주요 신들에 대해 시행되었다. 대부분의 신들은 에트루리아인들과 특히 그리스인들에게서 차용되었다. 우선 신들의 우두머리인 유피테르(Iupiter : Zeus), 미네르바와 함께 카피톨리누스의 세 명의 신들을 대표하는 모성의 여신인 유노(Iuno : Hera)가 있다. 또한 마르스(Mars : Ares)는 전쟁의 신이고, 케레스(Ceres : Demeter)는 수확을, 메르쿠리우스(Mercurius : Hermes)는 상업을 관장했으며, 베스타는 도시국가의 신성한 불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제사는 기도, 공물이나 희생물 헌정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야외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그리스에서는 공식적인 경기처럼 향연 및 행렬이 동시에 개최되었다. 예컨대, 카피톨리누스의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해 매년 거행된 로마의 경기처럼 말이다. 신관도 공직자가 될 수 있으며 사제들은, 일반 시민과 구별되지 않았다. 신관들의 장인 대사제는 사제들과 함께 모든 신들의 제사를 관장하여 신관인 프라멘들(Framen)의 보좌를 받았다.
모든 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로마인들은 그들의 적이 숭배한 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기원전 396년 베이이의 점령 이후 로마가 유노 여신을 로마로 옮겨오던 과정에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많은 재산들을 베이이로부터 약탈해오면서 로마인들은 신들의 보물과 더불어 신들 자체를 로마로 가져왔는데 이는 약탈이 아닌 신을 숭배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병사들 중에서 선발된 몇몇 청년들은 목욕을 정결하게 한 후 흰색 옷을 입고 여왕인 유노 여신을 로마로 옮기려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신전으로 들어가서 우선 유노에게 손을 얹고 양심의 의구심을 없앴다. 에투루리아인의 관례에 따르면 이 조각상은 지금까지 일정한 집안의 제사 이외에는 결코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농담조로 “당신은 로마로 이동하는 것을 원하는가? 유노여!”라고 말하니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여신인 유노는 그러한 소망에 찬성하는 표시를 나타냈다.”라고 소리쳤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여신이 ‘예’라고 답한 소리를 들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어쨌든 이 조각상의 이동은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는데, 이것에 대해 로마인들은 “유노 여신이 ‘스스로 나를 로마로 데려 가다오’ 라고 하면서 미소를 짓는 것 같아서 그것을 옮기는데 간단하고 쉬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B.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로마제국의 전환기는 AD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에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로마제국의 평화와 번영에는 종말이 왔다. 3세기는 거의 끊임없는 내란으로 얼룩졌다. 로마제국의 국내 질서는 심각하게 교란되고 외부의 공격으로 더욱더 혼란해졌다. 정치 위기와 함께 경제적 불안정이 더해갔으며 사회적 긴장은 고조되었다. 지적 혼란이 사회적 잠재력을 잠식했으며 로마사회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힘을 상실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제국의 쇠망을 하나의 커다란 원인으로 귀착시키려고 하지만 이것은 옳은 역사해석이 아니다. 예컨대 기번은 로마 문명이 쇠망한 주원인이 야만민족과 그리스도교의 파괴적 힘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의 쇠망이 게르만족, 프랑크족, 고트족의 침입에 있다고 본다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왜 이러한 민족이 수세기 동안 문명세계를 지배한 하나의 제국을 패퇴시킬 수 있었는가? 왜 제국의 동쪽부분은 서쪽부분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는가?
로마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으나 사실의 뒷받침이 충분치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제국 내의 상층계급의 정치적 지도력이 약화됨으로써 쇠망했다고 한다. 또다른 일부 역사가들은 가내경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로마의 경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가내경제에 머물러 있던 사회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했던 경우가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 농업의 쇠퇴의 원인으로 토양의 피폐를 지적하는 토양피폐설이나 강수량의 감
* 도시국가에서 치러진 성대한 제사
제사는 도시국가의 주요 신들에 대해 시행되었다. 대부분의 신들은 에트루리아인들과 특히 그리스인들에게서 차용되었다. 우선 신들의 우두머리인 유피테르(Iupiter : Zeus), 미네르바와 함께 카피톨리누스의 세 명의 신들을 대표하는 모성의 여신인 유노(Iuno : Hera)가 있다. 또한 마르스(Mars : Ares)는 전쟁의 신이고, 케레스(Ceres : Demeter)는 수확을, 메르쿠리우스(Mercurius : Hermes)는 상업을 관장했으며, 베스타는 도시국가의 신성한 불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제사는 기도, 공물이나 희생물 헌정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야외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그리스에서는 공식적인 경기처럼 향연 및 행렬이 동시에 개최되었다. 예컨대, 카피톨리누스의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해 매년 거행된 로마의 경기처럼 말이다. 신관도 공직자가 될 수 있으며 사제들은, 일반 시민과 구별되지 않았다. 신관들의 장인 대사제는 사제들과 함께 모든 신들의 제사를 관장하여 신관인 프라멘들(Framen)의 보좌를 받았다.
모든 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로마인들은 그들의 적이 숭배한 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기원전 396년 베이이의 점령 이후 로마가 유노 여신을 로마로 옮겨오던 과정에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많은 재산들을 베이이로부터 약탈해오면서 로마인들은 신들의 보물과 더불어 신들 자체를 로마로 가져왔는데 이는 약탈이 아닌 신을 숭배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병사들 중에서 선발된 몇몇 청년들은 목욕을 정결하게 한 후 흰색 옷을 입고 여왕인 유노 여신을 로마로 옮기려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신전으로 들어가서 우선 유노에게 손을 얹고 양심의 의구심을 없앴다. 에투루리아인의 관례에 따르면 이 조각상은 지금까지 일정한 집안의 제사 이외에는 결코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농담조로 “당신은 로마로 이동하는 것을 원하는가? 유노여!”라고 말하니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여신인 유노는 그러한 소망에 찬성하는 표시를 나타냈다.”라고 소리쳤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여신이 ‘예’라고 답한 소리를 들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어쨌든 이 조각상의 이동은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는데, 이것에 대해 로마인들은 “유노 여신이 ‘스스로 나를 로마로 데려 가다오’ 라고 하면서 미소를 짓는 것 같아서 그것을 옮기는데 간단하고 쉬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B.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로마제국의 전환기는 AD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에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로마제국의 평화와 번영에는 종말이 왔다. 3세기는 거의 끊임없는 내란으로 얼룩졌다. 로마제국의 국내 질서는 심각하게 교란되고 외부의 공격으로 더욱더 혼란해졌다. 정치 위기와 함께 경제적 불안정이 더해갔으며 사회적 긴장은 고조되었다. 지적 혼란이 사회적 잠재력을 잠식했으며 로마사회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힘을 상실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제국의 쇠망을 하나의 커다란 원인으로 귀착시키려고 하지만 이것은 옳은 역사해석이 아니다. 예컨대 기번은 로마 문명이 쇠망한 주원인이 야만민족과 그리스도교의 파괴적 힘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의 쇠망이 게르만족, 프랑크족, 고트족의 침입에 있다고 본다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왜 이러한 민족이 수세기 동안 문명세계를 지배한 하나의 제국을 패퇴시킬 수 있었는가? 왜 제국의 동쪽부분은 서쪽부분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는가?
로마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으나 사실의 뒷받침이 충분치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제국 내의 상층계급의 정치적 지도력이 약화됨으로써 쇠망했다고 한다. 또다른 일부 역사가들은 가내경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로마의 경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가내경제에 머물러 있던 사회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했던 경우가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로마 농업의 쇠퇴의 원인으로 토양의 피폐를 지적하는 토양피폐설이나 강수량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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