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초기 박해
1) 박해의 시작
2) 을사추조적발 사건과 진산사건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2.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1) 당파와 신유박해
2) 황서영백서와 초기 천주교인들의 대외인식
3. 조선교구 창설과 기해 ∙ 병오 박해
1) 조선교구 창설
2)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4. 병인박해와 조선 후기 사회 변화
1) 교회의 재건과 발전
2)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 선박들의 출현
3)병인박해와 봉건세력의 몰락
1) 박해의 시작
2) 을사추조적발 사건과 진산사건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2.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1) 당파와 신유박해
2) 황서영백서와 초기 천주교인들의 대외인식
3. 조선교구 창설과 기해 ∙ 병오 박해
1) 조선교구 창설
2)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4. 병인박해와 조선 후기 사회 변화
1) 교회의 재건과 발전
2)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 선박들의 출현
3)병인박해와 봉건세력의 몰락
본문내용
귀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된 은언군 내외와 며느리 신씨의 혐의가 풀렸고 역시 신유박해 때 천주교 관계로 처형당한 이승훈의 죄도 그의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청원을 받아들여 죄명을 씨서 주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같은 완화정책은 순원왕후가 정계에서 물러난 1851년 이후 철종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잡은 김문근(金汶根)에 의해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유례없는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병오박해 때 체포를 면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박해 와중에도 1846년 11월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聖母誠心會)란 수도 단체를 창설하였다. 김대건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둥번째로 1849년 4월에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도 그 해 12월에 의주를 통해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1852년에 메스트르 신부가 전라도 해안을 통해 입국하였고 1854년에는 장수(F. S. Jansou, 楊) 신부가 입국했다. 3대 주교로 활약했던 페레올 주교가 1853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대신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신부가 4대 주교로 임명받아 1856년 쁘띠니꼴라(M. A. Petitnicolas, 朴) 뿌르띠에(C. A. Pourthie, 申) 신부를 대동하고 황해도 장연을 통해 입국하였다. 계속해서 1857년 페롱(S. Feron, 權) 신부가 입국했고 1861년에는 랑드르(J. M. Landre, 洪) 조안노(P. M. Joanno, 吳) 리델(F. C. Ridel, 李福明) 깔래(A. N. Calais, 姜) 신부가, 1863년에 오매트르(P. Aumaitre, 吳) 신부가, 1865년에 도리(P. H. Dorie, 金) 브르뜨니에르(S. M. A. J. Ranfer de Bretenieres, 白) 위앵(M. L. Huin, 閔) 볼뤼(B. L. Beaulieu, 徐) 신부 등이 각각 입국하였다. 이로써 1836년 모방 신부가 한국에 나온 이래 30년 동안 파리외 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가 20명이 나왔다. 그 중 3명(앵베르 모방 샤스땅)이 기해교난 때 희생되었고 5명(장수 페레올 메스트르 조안노 랑드르)은 조선에서 활약하다가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 12명 중 3명(리델 페롱 깔래)을 제외한 9명이 1866년 일어난 병인박해 때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희생적인 선교활동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184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기해 병호박해 직후 1만명을 넘지 못했던 교인수가 1865년에 이르러 2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자생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함을 알고 그것을 위해 몇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미 김대건 최양업 등 조선인 성직자들이 배출되었지만 종래의 방법대로 성직자 후보생들을 해외로 유학시켜 사제로 양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유학간 학생들이 기후 적응이 안되어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10여 명이 넘는 신부들이 입국해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외국에까지 보내지 않고 국내에서 신학교육을 실시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게다가 철종 즉위(1849년) 이후 천주교에 대한 정부 태도가 완화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베르뇌 주교는 용기를 내어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당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장낙소(張樂韶)의 집에서 시작된 이 신학당에서는 다블뤼 신부가 원장, 뿌르띠에 신부가 교수가 되어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주민들로부터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신부나 학생들이 체포되는 상황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다. 이 배론신학당은 병인박해 때 폐교되기는 했으나 한국 천주교회 신학교육의 효시로 오늘의 가톨릭대학 모체가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말로 된 교리서를 비롯하여 천주교 관계 문헌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 있어 다블뤼 신부가 가장 큰 활약을 보였다. 그는 1853년 이후 한국에 올 선교사들을 위해 《한 한 불 자전》(韓漢佛字典) 편찬에 착수하였고, 조선인 순교자 자료를 모으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가 정리한 순교자 및 조선 천주교회 역사 자료는 1857년 로마 교황에 의해 기해 병오 박해 때 순교자 82명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채택되었을 뿐 아니라 달레(Ch. Dallet)의 《조선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en Coree)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외에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서인 《신명초행》《회죄직지》《령셰대의》《셩찰긔략》들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조선 천주교회의 교리서는 17세기 초에 들어오기 시작한 한 역서학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일부 선구적 양반게층이 서학을 신봉하는 차원에서 신앙실천운동을 벌일 때 근거로 삼았던 것도 중국에서 발간된 한문 교리서들이었다. 따라서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던 교리서들 중에는 한문에서 번역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840년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성교절요》나 《성교요리문답》 등도 모두 한문에서 번역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한문에서 번역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초기 조선인 지도급 교인들은 나름대로 천주교 교리를 소화시켜 창조적인 글을 남겼다. 이 벽이 지었다는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초기 교인들의 신앙의 요체를 보여 주고 있으며,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도 주문모 신부에 의해 인준을 받을 정도로 천주교 교리에 정통한 순수 조선인 작품이었다. 교리서는 아니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이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도 초기 천주교회 번증서로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처음엔 이런 교리서들이 필사본 형태로 유포되었으나, 1864년에 이르러 서울 두 곳에 목판 인쇄소를 설치한 후 대량 인쇄 반포가 가능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다블뤼의 《신명초행》《회죄직지》《령세대의》《셩찰긔략》 외에 《셩교요리문답》《텬쥬셩교공과》《텬쥬셩교례규》《쥬교요지》《텬당직로》《쥬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된 은언군 내외와 며느리 신씨의 혐의가 풀렸고 역시 신유박해 때 천주교 관계로 처형당한 이승훈의 죄도 그의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청원을 받아들여 죄명을 씨서 주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같은 완화정책은 순원왕후가 정계에서 물러난 1851년 이후 철종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잡은 김문근(金汶根)에 의해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유례없는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병오박해 때 체포를 면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박해 와중에도 1846년 11월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聖母誠心會)란 수도 단체를 창설하였다. 김대건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둥번째로 1849년 4월에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도 그 해 12월에 의주를 통해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1852년에 메스트르 신부가 전라도 해안을 통해 입국하였고 1854년에는 장수(F. S. Jansou, 楊) 신부가 입국했다. 3대 주교로 활약했던 페레올 주교가 1853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대신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신부가 4대 주교로 임명받아 1856년 쁘띠니꼴라(M. A. Petitnicolas, 朴) 뿌르띠에(C. A. Pourthie, 申) 신부를 대동하고 황해도 장연을 통해 입국하였다. 계속해서 1857년 페롱(S. Feron, 權) 신부가 입국했고 1861년에는 랑드르(J. M. Landre, 洪) 조안노(P. M. Joanno, 吳) 리델(F. C. Ridel, 李福明) 깔래(A. N. Calais, 姜) 신부가, 1863년에 오매트르(P. Aumaitre, 吳) 신부가, 1865년에 도리(P. H. Dorie, 金) 브르뜨니에르(S. M. A. J. Ranfer de Bretenieres, 白) 위앵(M. L. Huin, 閔) 볼뤼(B. L. Beaulieu, 徐) 신부 등이 각각 입국하였다. 이로써 1836년 모방 신부가 한국에 나온 이래 30년 동안 파리외 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가 20명이 나왔다. 그 중 3명(앵베르 모방 샤스땅)이 기해교난 때 희생되었고 5명(장수 페레올 메스트르 조안노 랑드르)은 조선에서 활약하다가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 12명 중 3명(리델 페롱 깔래)을 제외한 9명이 1866년 일어난 병인박해 때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희생적인 선교활동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184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기해 병호박해 직후 1만명을 넘지 못했던 교인수가 1865년에 이르러 2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자생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함을 알고 그것을 위해 몇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미 김대건 최양업 등 조선인 성직자들이 배출되었지만 종래의 방법대로 성직자 후보생들을 해외로 유학시켜 사제로 양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유학간 학생들이 기후 적응이 안되어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10여 명이 넘는 신부들이 입국해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외국에까지 보내지 않고 국내에서 신학교육을 실시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게다가 철종 즉위(1849년) 이후 천주교에 대한 정부 태도가 완화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베르뇌 주교는 용기를 내어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당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장낙소(張樂韶)의 집에서 시작된 이 신학당에서는 다블뤼 신부가 원장, 뿌르띠에 신부가 교수가 되어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주민들로부터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신부나 학생들이 체포되는 상황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다. 이 배론신학당은 병인박해 때 폐교되기는 했으나 한국 천주교회 신학교육의 효시로 오늘의 가톨릭대학 모체가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말로 된 교리서를 비롯하여 천주교 관계 문헌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 있어 다블뤼 신부가 가장 큰 활약을 보였다. 그는 1853년 이후 한국에 올 선교사들을 위해 《한 한 불 자전》(韓漢佛字典) 편찬에 착수하였고, 조선인 순교자 자료를 모으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가 정리한 순교자 및 조선 천주교회 역사 자료는 1857년 로마 교황에 의해 기해 병오 박해 때 순교자 82명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채택되었을 뿐 아니라 달레(Ch. Dallet)의 《조선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en Coree)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외에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서인 《신명초행》《회죄직지》《령셰대의》《셩찰긔략》들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조선 천주교회의 교리서는 17세기 초에 들어오기 시작한 한 역서학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8세기 중엽 일부 선구적 양반게층이 서학을 신봉하는 차원에서 신앙실천운동을 벌일 때 근거로 삼았던 것도 중국에서 발간된 한문 교리서들이었다. 따라서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던 교리서들 중에는 한문에서 번역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840년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성교절요》나 《성교요리문답》 등도 모두 한문에서 번역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한문에서 번역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초기 조선인 지도급 교인들은 나름대로 천주교 교리를 소화시켜 창조적인 글을 남겼다. 이 벽이 지었다는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초기 교인들의 신앙의 요체를 보여 주고 있으며,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도 주문모 신부에 의해 인준을 받을 정도로 천주교 교리에 정통한 순수 조선인 작품이었다. 교리서는 아니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이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도 초기 천주교회 번증서로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처음엔 이런 교리서들이 필사본 형태로 유포되었으나, 1864년에 이르러 서울 두 곳에 목판 인쇄소를 설치한 후 대량 인쇄 반포가 가능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다블뤼의 《신명초행》《회죄직지》《령세대의》《셩찰긔략》 외에 《셩교요리문답》《텬쥬셩교공과》《텬쥬셩교례규》《쥬교요지》《텬당직로》《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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