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지용의 생애
Ⅲ. 유선애상
Ⅳ. 유리창
Ⅴ. 바다 9
Ⅵ.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
Ⅶ. 참고 문헌
Ⅱ. 지용의 생애
Ⅲ. 유선애상
Ⅳ. 유리창
Ⅴ. 바다 9
Ⅵ.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
Ⅶ. 참고 문헌
본문내용
때문이다. 말기로 나누는 기준이 된 44세는 해방이 되던 해이다.
휘문고보학적부에 부친의 직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의업과 농업을 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구관 씨의 증언에 의하면 농토는 조금밖에 없었다고 하니 빈농을 면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유년시절 회상기를 보아도 가세가 극빈했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나는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가난하던 소년”이라고 회상했다.
4대 독자로 가까운 친척도 없고, 청소년기에 혼자 15년 동안이나 객지생활을 했다. 부친 정태국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둘째부인을 얻었다는 점만 보아도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실패한 인물이었다. 개천가에 있는 집에서 그가 태어났다는 점, 어린 시절에 개천에서 많이 놀았다는 점, 그 체험이 출세작 ‘향수’에 잘 나타나있다. 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는 그에게 재학시절에도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그는 귀국 후에도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해였다. 그는 지방출신이 서울에 진학하여 88명 중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어학이나 그림과목에서 뛰어났다. 그가 풍부한 색채감각어로 화사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미술에 타고난 재능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감각적 회화성을 살려 대상을 간결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지용 시미학은 미술에 재질이 있는 그의 적성에 근거한 성과였다.
휘문학교 교사시절 그는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전시 체제하에서 국민복을 입고 각반을 차야 했던 일제 말기에 그가 꼭 한복을 입었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며 시를 썼다”고 뒷날 털어놓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의 민족의식은 친일시 ‘이토’를 국민문학에 발표하여 다소 빛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된 시대에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하였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이토‘ 이외에는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사실상 절필한 셈이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두 편과 시조 5수 외에는 작품이 없다. 이 기간에 그가 시를 한 편밖에 발표하지 못한 것은 문학외적 요인 때문으로 생각된다. 사회적 혼란에다 직업 전환의 여파로 여러 가지 혼란이 겹친 탓으로 생각된다. 사회가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다. 그래서 자신이 순수시를 써왔던 것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다.
해방공간으로 명명되는 정치의 계절에 그는 자신의 순수시론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러한 그의 방황과 남북전쟁중의 행방불명으로 월북작가로 취급받기도 했다.
월북설의 근거는 그가 임화, 이태준, 설정식, 오장환 같은 월북 문인들과 평소 가까웠다는 점, 좌익 문학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올라 있었다는 점, 해방공간에서 그가 좌경적인 발언을 했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가 자진해서 월북했느냐, 강제로 끌려갔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당국은 월북작가로 분류하여 지용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이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강제 납북설을 제기하며 문인들과 함께 해금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가 김학동 교수였다. 그는 백범 노선을 따르는 민족주의자였으며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신탁통치 반대와 미소 양군 철수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점으로 보아 그는 이상주의적 순수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 사상에 일치하는 백범 노선에 그가 뜻을 같이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그는 백범을 존경했다. 지용은 상허의 월북을 철저하게 비난하였다. 월북은 분단을 고착시키는 일이요, 민족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더욱이 월북후 상허의 소설이 읽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그가 월북해도 상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집도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월북은 자신의 시를 버리는 길이요, 민족시인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지용이 전생애를 통하여 가장 사랑했던 시와 가정을 버리고 월북을 택할 리가 없다. 더욱이 그는 영문학 전공의 학사 출신 영어교사라는 친미적 성향을 띄었다. 그가 추구했던 문학노선이나 자유분방한 기질이나 신분 등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지용의 자진 월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가 좌우익의 정치, 문학 파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관된 하나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평화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이요, 그러한 국가에서 자신이 영원한 민족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비극적 종말은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은 채, 625 동란중에 폭사했다는 설이 있다.
Ⅲ. 유선애상
유선애상
정지용
생김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연미복(燕尾服)맵시냐.
산뜻한 이 신사(紳士)를 아스팔트우로 꼰돌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래 하로 청해왔다.
손에 맞는 품이 길이 아조 들었다.
열고보니 허술히도 반음(半音)키-가 남었더라.
줄창 연습(練習)을 시켜도 이건 철로판에서 밴 소리로구나.
무대(舞臺)로 내보낼 생각을 아예 아니했다.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 때문에 궂인날 막잡어부렸다.
함초롬 젖여 새초롬하기는새레 회회 떨어 다듬고 나선다.
대체 슬퍼하는 때는 언제길래
아장아장 팩팩거리기가 위주냐.
허리가 모조리 가느래지도록 슬픈 행렬(行列)에 끼어
아조 천연그레 굴든게 옆으로 솔쳐나자-
춘천삼백리(春川三百里) 벼루ㅅ길을 냅다 뽑는데
그런 상장(喪章)을 두른 표정(表情)은 그만하겠다고 꽥-꽥-
몇킬로 휘달리고나서 거북처럼 흥분(興奮)한다.
징징거리는 신경(神經)방석우에 소스듬 이대로 견
휘문고보학적부에 부친의 직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의업과 농업을 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구관 씨의 증언에 의하면 농토는 조금밖에 없었다고 하니 빈농을 면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유년시절 회상기를 보아도 가세가 극빈했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나는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가난하던 소년”이라고 회상했다.
4대 독자로 가까운 친척도 없고, 청소년기에 혼자 15년 동안이나 객지생활을 했다. 부친 정태국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둘째부인을 얻었다는 점만 보아도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실패한 인물이었다. 개천가에 있는 집에서 그가 태어났다는 점, 어린 시절에 개천에서 많이 놀았다는 점, 그 체험이 출세작 ‘향수’에 잘 나타나있다. 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는 그에게 재학시절에도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그는 귀국 후에도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해였다. 그는 지방출신이 서울에 진학하여 88명 중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어학이나 그림과목에서 뛰어났다. 그가 풍부한 색채감각어로 화사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미술에 타고난 재능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감각적 회화성을 살려 대상을 간결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지용 시미학은 미술에 재질이 있는 그의 적성에 근거한 성과였다.
휘문학교 교사시절 그는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전시 체제하에서 국민복을 입고 각반을 차야 했던 일제 말기에 그가 꼭 한복을 입었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며 시를 썼다”고 뒷날 털어놓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의 민족의식은 친일시 ‘이토’를 국민문학에 발표하여 다소 빛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된 시대에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하였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이토‘ 이외에는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사실상 절필한 셈이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두 편과 시조 5수 외에는 작품이 없다. 이 기간에 그가 시를 한 편밖에 발표하지 못한 것은 문학외적 요인 때문으로 생각된다. 사회적 혼란에다 직업 전환의 여파로 여러 가지 혼란이 겹친 탓으로 생각된다. 사회가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다. 그래서 자신이 순수시를 써왔던 것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다.
해방공간으로 명명되는 정치의 계절에 그는 자신의 순수시론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러한 그의 방황과 남북전쟁중의 행방불명으로 월북작가로 취급받기도 했다.
월북설의 근거는 그가 임화, 이태준, 설정식, 오장환 같은 월북 문인들과 평소 가까웠다는 점, 좌익 문학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올라 있었다는 점, 해방공간에서 그가 좌경적인 발언을 했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가 자진해서 월북했느냐, 강제로 끌려갔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당국은 월북작가로 분류하여 지용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이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강제 납북설을 제기하며 문인들과 함께 해금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가 김학동 교수였다. 그는 백범 노선을 따르는 민족주의자였으며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신탁통치 반대와 미소 양군 철수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점으로 보아 그는 이상주의적 순수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 사상에 일치하는 백범 노선에 그가 뜻을 같이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그는 백범을 존경했다. 지용은 상허의 월북을 철저하게 비난하였다. 월북은 분단을 고착시키는 일이요, 민족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더욱이 월북후 상허의 소설이 읽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그가 월북해도 상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집도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월북은 자신의 시를 버리는 길이요, 민족시인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지용이 전생애를 통하여 가장 사랑했던 시와 가정을 버리고 월북을 택할 리가 없다. 더욱이 그는 영문학 전공의 학사 출신 영어교사라는 친미적 성향을 띄었다. 그가 추구했던 문학노선이나 자유분방한 기질이나 신분 등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지용의 자진 월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가 좌우익의 정치, 문학 파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관된 하나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평화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이요, 그러한 국가에서 자신이 영원한 민족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비극적 종말은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은 채, 625 동란중에 폭사했다는 설이 있다.
Ⅲ. 유선애상
유선애상
정지용
생김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연미복(燕尾服)맵시냐.
산뜻한 이 신사(紳士)를 아스팔트우로 꼰돌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래 하로 청해왔다.
손에 맞는 품이 길이 아조 들었다.
열고보니 허술히도 반음(半音)키-가 남었더라.
줄창 연습(練習)을 시켜도 이건 철로판에서 밴 소리로구나.
무대(舞臺)로 내보낼 생각을 아예 아니했다.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 때문에 궂인날 막잡어부렸다.
함초롬 젖여 새초롬하기는새레 회회 떨어 다듬고 나선다.
대체 슬퍼하는 때는 언제길래
아장아장 팩팩거리기가 위주냐.
허리가 모조리 가느래지도록 슬픈 행렬(行列)에 끼어
아조 천연그레 굴든게 옆으로 솔쳐나자-
춘천삼백리(春川三百里) 벼루ㅅ길을 냅다 뽑는데
그런 상장(喪章)을 두른 표정(表情)은 그만하겠다고 꽥-꽥-
몇킬로 휘달리고나서 거북처럼 흥분(興奮)한다.
징징거리는 신경(神經)방석우에 소스듬 이대로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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