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다산 정약용 생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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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다산 정약용 생가를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답사 후기
1) 답사 경로 및 활동
2) 다산 정약용 생가 답사 후 느낀점


Ⅱ.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1) 정약용-인물 소개
2) 그의 정치, 경제적 개혁 사상과 그 의의
3) 주요 저서와 저서 내용
4) 정약용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Ⅲ. 참고문헌

본문내용

니 수종사 표지판이 보였다. 산 아래 차를 세우고 걸어서 산을 올라갔다. 산 정상까지는 대략 30분 가량 소요되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니 생각보다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 초팔일이 얼마 안남아서 인지 수종사에 인파가 많았다. 불공드리러 온 사람들과 등산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선 약숫물로 목을 채우고 전망대에 올라 팔당호를 내려 보며 잠시 감상에 빠졌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이마에 땀도 씻겨 나가고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스님에게 남한강, 북한강 ,경인천이 어느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잘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안개가 껴서 시야가 밝지는 않았지만 멀리 양수리도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시원한 경치를 한참동안 감상했다. 옆에 보니 525년 되었다는 둘레 7M 짜리 은행나무도 보였다. 그곳에서 시간이 한참 흘러 스님께서 타종하는 소리도 들렸다. 날이 저물어 갈 때쯤 산에서 내려왔다. 영화촬영소에도 들러보고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커피도 한잔 먹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2) 다산 정약용 생가 답사 후 느낀점
-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간다고 생각했을 때 답사라는 것은 처음 가보는 것이 였기 때문에 가서 어떻게 많은 것을 보고 올까하고 가는 도중에도 고민에 빠졌습니다. 상세한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시간에 그려둔 약도만 보고 찾아갔지만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기 전부터 궁금 했던것은 과연 이 유적지가 어떤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까 하는 점과 그 곳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처음 막연한 생각으로는 외진 산속에 초라한 집과 묘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 마재 마을이라고 써있는 돌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농가와 오래돼 보이는 집들과 논밭도 눈에 보였습니다. 참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더 따라 들어가니 다산선생의 유적지가 보였습니다.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유적지를 찾아온 사람들도 많고 마치 잘 꾸민 공원 같다는 느낌 이였습니다. 유적지에는 생가와 묘만 초라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처럼 관리가 잘 돼어있고, 문화관, 기념관도 있어서 남양주시 쪽에서 보존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겠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담 안쪽에는 단산 선생의 생가와 사당, 다산선생의 묘 그리고 그 외에도 문화관과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생가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의 검소했던 생활을 엿 볼 수 있는거 같았습니다. 생가 뒷편에 작지만 꽤 높은 언덕 위의 다산선생의 묘가 있었습니다. 작은 반원 모양의 담으로 둘러싸인 묘와 큰 묘비 2개하고 돌로 만든 제사상 같은 게 눈에 띄었습니다. 언덕을 내려와서 생가로 가보니 생가는 조금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는데 4면 중 2 면은 문이 나있고 한 면은 방과 바로 연결되는 창호지문이 여러 개이어서 나있고 나머지 한 면은 막혀 있었습니다. 방과 바로 연결되는 문들과 좁은 마루가 있는 면에 여(與)유(猶)당(堂) 이라고 써있는 것 같은데 워낙 약간 흐르는 듯한 글씨체라서 그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둘러보니 전에는 조선시대 양반 계층의 가옥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게 처음이어서 그런지 좀 생소했습니다. 그동안 본 것은 민가거나 궁이라서 다른 점이 눈에 많이 뜨였습니다. 하지만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기둥과 마루 등을 보면서 상당한 실재감을 받았습니다. 집의 구조는 ㄴ 하고 ㄱ 을 겹친 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붙여서 지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붙여서 지으며 햇빛이 별로 안 들어올 것 같지만 창문이 사방팔방 나있어서 일조량은 걱정 안해도 되겠더군요. 그리고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좀 좁고 칸칸이 나누어져 있더군요. 문하고 창문은 또 엄청 많이 나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겨울엔 추울텐데라고 생각도 해봤고, 또 겹문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에도 겹문이 있었나 이 좁은 방에 웬 겹문이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생활하기에 상당히 비좁아 보였습니다. 마루라고 해야 할까 나무 바닥으로 된 널찍한 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집안 일을 했나 봅니다. 귀퉁이마다 온돌용 화덕이 있어서 땔감이 충분했다면 따뜻했을 것 같았습니다. 밖에서 슬쩍 보면 상당히 사람이 산 듯한 집 한 채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이 살지 않아 좀 썰렁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장독대는 안보였습니다. 다음은 생가 옆에 있는 사당에 갔는데 사당도 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요, 정약용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었습니다. 최근에 한 듯한 좀 인공적인 분위기 나는 단청 색칠을 해놓아서 그런지 세월의 맛이 안 나는 사당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생가와 묘 그리고 사당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기념관과 문화관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생가와 좀 떨어져 앞쪽에 있는 두 건물이었는데 흰 벽과 어두운 기와의 대조가 깨끗해 보이는 한국식 기와집처럼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언덕에 있는 나무와 곳곳에 나있는 대나무들이 상당히 정취가 있어 보였습니다. 밋밋한 평지에 덩그라니 생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참 풍경이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언덕이 작지만 상당히 높아서 집의 배경으로 참 보기 좋았습니다. 일단 기념관안으로 들어가니 정약용이 살았던 곳의 지도와 그림들 그리고 그가 수원성 건축시 설계해서 썼던 거중기 모형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있었던 강진의 다산초당 사진과 강진의 약도 마현 마을 능내리의 약도가 있었고, 정약용 선생의 그림이 한폭 걸려 있었습니다. 설명을 보니 마현 마을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서 수상 무역의 요지였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구석진 마을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사람이 많이 다니는 붐비는 곳이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또 유배지인 강진의 약도와 가족이 그리울 때면 올라가서 바다를 보았다는 최근에 재건축한 천일각과 다산초당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다산 초당에서 가르치면서 상당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상당히 좋아했다는 걸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그래서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원성 건축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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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29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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