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선사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본문내용
같은 모양으로 장식되어 이를 연미형수저라 부른다. 젓가락은 대부분 그 단면이 원형이며 앞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고 손잡이 부분에 대나무 모양으로 마디를 만들거나 그 끝단을 연꽃봉오리로 장식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청동그릇은 청자의 초기 기형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높은 굽이 달린 대접과 운두가 깊은 합, 납작한 전접시 등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금속이라는 제작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인지 형태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다만 은으로 만든 소형 잔에는 꽃 모양이나 정교한 용머리 손잡이가 달리고 돋을새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예도 간혹 남아 있다. 주전자는 길게 솟은 주구와 반원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기본적인데, 뚜껑의 중앙에는 사자와 봉황 등 동물 형태나 연꽃봉오리의 꼬지를 만들어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이 가운데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은제도금주전자는 승반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주전자 몸체의 외면을 대나무 마디처럼 나누어 연화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위에 올려진 뚜껑은 중첩을 이루며 위로 솟아오른 연꽃을 2단으로 만들어 상부에는 정교하기 그지없는 봉황을 조각하였다. 은제도금탁잔이나 은제합, 팔찌 등에는 높게 돌출된 타출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장식 문양을 전면에 빠짐없이 시문하였다. 내면에서 타출시킨 뒤 다시 외부에서 그 여백을 두드려 누르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누금처럼 따로 떼어 붙인 듯 입체감이 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장도집은 상하단이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하며 칼집 입구 부분의 한쪽을 길게 튼 모습이 전형적인데, 상부에는 장도를 끼울 수 있도록 만든 짧은 장도 손잡이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금은제장신구들은 뒷면이 편평하고 한 쌍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실제 직물 등에 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주된 소재는 나비, 오리, 원앙, 학, 거북이 등의 수금류와 잉어, 게 등의 어류를 비롯한 연꽃, 여지, 모란등의 꽃과 열매, 그리고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 등 주로 길상을 상징하는 무늬들이다. 고려 자물쇠의 예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형태는 장방형의 자물통위에 비녀처럼 긴 빗장이 가로지른 모습으로 빗장에 고리를 끼워 문에 부착하였다. 간혹 빗장의 양끝을 연꽃봉오리나 용머리로 조각하거나 도금하여 장식성과 화려함을 더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 금속공예품의 제작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으나 왕실의 후원이나 부녀자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범종과 사리기와 같은 불교공예품이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갔다.
한국 종의 기본 형태와 세부 의장은 고려후기인 14세기 중엽부터 점차 사라지면서 서서히 중국 종의 형태와 의장을 받아들인 새로운 형식으로 정착되어갔다. 이러한 고려 말의 범종 양식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상대 아래에는 범자무늬가 첨가되어 독립된 문양 띠로 자리잡게 된다.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멀어져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지거나, 있다 해도 그 수나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치는 자리로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장식 문양으로 전락해버린다.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횡대라 불리우는 두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종신의 여백에는 비천상이나 불 보살좌상 대신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며, 이 밖에 용무늬 범자무늬 파도무늬 등을 필요 이상으로 시문하여 매우 번잡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그 여백 면에는 대부분 주조에 관계된 긴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주로 제작과 관계된 인명, 시주자 명단, 발원문 등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은 당시의 주금장 사회의 분업 상황, 소속 사찰의 종교적 경제적 현황 등 사회 제반 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의 발원을 통한 국가적인 주조 사업으로 이루어진 대형 범종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흥천사종(1462년)과 보신각종(1468년)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인 17~18세기에는 불교 미술의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어 사찰마다 전쟁으로 소실된 범종을 새로이 만드는 불사가 널리 행해졌는데, 현존하는 사찰 범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범종은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을 모방한 복고적 경향의 작품과 고려 말~조선 초기에 보였던 중국 종 양식의 작품, 그리고 중국 종과 한국 전통 종 양식이 혼합된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양식의 혼란과 함께 주조 기술이 더욱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꾸준히 맥이 이어져 왔던 한국 범종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엄구는 석탑과 부도에서 발견되지만 사리장엄 방식이 단순해지면서 매납되는 사리기의 종류와 양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사리를 담는 사리병은 유리 대신 수정 옥 호박으로 만들어지며 간혹 뚜껑이 달린 원통형의 유제후령통을 쓰기도 한다. 사리기의 형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매우 다양해지지만 뚜껑이 있는 원형 또는 원통형 합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사리외함으로 백자를 사용했다. 또한 불상 안에서 발견되는 복장 유물로는 불경이나 전적, 의복을 넣고 후령통 안에는 오곡이나 오색실 같은 다양한 시납물을 함께 넣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금고 역시 고려시대 못지 않게 많은 수량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이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의 작품들로 뒷면이 넓게 뚫린 징의 형태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금고는 고려시대와 달리 당좌구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고면의 융기동심원이 한두 줄로 지극히 간략화된다. 화려한 연화무늬나 당초무늬, 구름무늬가 사라지는 대신 바깥쪽에 범자무늬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도 조선시대 금고의 주요한 양식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더욱 문양이 간략화되어 전혀 시문을 하지 않은 금고가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불교 공예품 가운데 사
고려시대의 청동그릇은 청자의 초기 기형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높은 굽이 달린 대접과 운두가 깊은 합, 납작한 전접시 등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금속이라는 제작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인지 형태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다만 은으로 만든 소형 잔에는 꽃 모양이나 정교한 용머리 손잡이가 달리고 돋을새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예도 간혹 남아 있다. 주전자는 길게 솟은 주구와 반원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기본적인데, 뚜껑의 중앙에는 사자와 봉황 등 동물 형태나 연꽃봉오리의 꼬지를 만들어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이 가운데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은제도금주전자는 승반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주전자 몸체의 외면을 대나무 마디처럼 나누어 연화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위에 올려진 뚜껑은 중첩을 이루며 위로 솟아오른 연꽃을 2단으로 만들어 상부에는 정교하기 그지없는 봉황을 조각하였다. 은제도금탁잔이나 은제합, 팔찌 등에는 높게 돌출된 타출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장식 문양을 전면에 빠짐없이 시문하였다. 내면에서 타출시킨 뒤 다시 외부에서 그 여백을 두드려 누르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누금처럼 따로 떼어 붙인 듯 입체감이 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장도집은 상하단이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하며 칼집 입구 부분의 한쪽을 길게 튼 모습이 전형적인데, 상부에는 장도를 끼울 수 있도록 만든 짧은 장도 손잡이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금은제장신구들은 뒷면이 편평하고 한 쌍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실제 직물 등에 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주된 소재는 나비, 오리, 원앙, 학, 거북이 등의 수금류와 잉어, 게 등의 어류를 비롯한 연꽃, 여지, 모란등의 꽃과 열매, 그리고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 등 주로 길상을 상징하는 무늬들이다. 고려 자물쇠의 예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형태는 장방형의 자물통위에 비녀처럼 긴 빗장이 가로지른 모습으로 빗장에 고리를 끼워 문에 부착하였다. 간혹 빗장의 양끝을 연꽃봉오리나 용머리로 조각하거나 도금하여 장식성과 화려함을 더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 금속공예품의 제작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으나 왕실의 후원이나 부녀자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범종과 사리기와 같은 불교공예품이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갔다.
한국 종의 기본 형태와 세부 의장은 고려후기인 14세기 중엽부터 점차 사라지면서 서서히 중국 종의 형태와 의장을 받아들인 새로운 형식으로 정착되어갔다. 이러한 고려 말의 범종 양식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상대 아래에는 범자무늬가 첨가되어 독립된 문양 띠로 자리잡게 된다.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멀어져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지거나, 있다 해도 그 수나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치는 자리로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장식 문양으로 전락해버린다.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횡대라 불리우는 두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종신의 여백에는 비천상이나 불 보살좌상 대신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며, 이 밖에 용무늬 범자무늬 파도무늬 등을 필요 이상으로 시문하여 매우 번잡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그 여백 면에는 대부분 주조에 관계된 긴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주로 제작과 관계된 인명, 시주자 명단, 발원문 등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명문은 당시의 주금장 사회의 분업 상황, 소속 사찰의 종교적 경제적 현황 등 사회 제반 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의 발원을 통한 국가적인 주조 사업으로 이루어진 대형 범종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흥천사종(1462년)과 보신각종(1468년)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인 17~18세기에는 불교 미술의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어 사찰마다 전쟁으로 소실된 범종을 새로이 만드는 불사가 널리 행해졌는데, 현존하는 사찰 범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범종은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을 모방한 복고적 경향의 작품과 고려 말~조선 초기에 보였던 중국 종 양식의 작품, 그리고 중국 종과 한국 전통 종 양식이 혼합된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양식의 혼란과 함께 주조 기술이 더욱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꾸준히 맥이 이어져 왔던 한국 범종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엄구는 석탑과 부도에서 발견되지만 사리장엄 방식이 단순해지면서 매납되는 사리기의 종류와 양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사리를 담는 사리병은 유리 대신 수정 옥 호박으로 만들어지며 간혹 뚜껑이 달린 원통형의 유제후령통을 쓰기도 한다. 사리기의 형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매우 다양해지지만 뚜껑이 있는 원형 또는 원통형 합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사리외함으로 백자를 사용했다. 또한 불상 안에서 발견되는 복장 유물로는 불경이나 전적, 의복을 넣고 후령통 안에는 오곡이나 오색실 같은 다양한 시납물을 함께 넣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금고 역시 고려시대 못지 않게 많은 수량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이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의 작품들로 뒷면이 넓게 뚫린 징의 형태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금고는 고려시대와 달리 당좌구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고면의 융기동심원이 한두 줄로 지극히 간략화된다. 화려한 연화무늬나 당초무늬, 구름무늬가 사라지는 대신 바깥쪽에 범자무늬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도 조선시대 금고의 주요한 양식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더욱 문양이 간략화되어 전혀 시문을 하지 않은 금고가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불교 공예품 가운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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