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광해군의 소개
2. 즉위 직후의 전란 복구 활동
3. 왕권 강화의 열망과 ‘폐모살제(廢母殺弟)의 굴레
4. 절묘한 외교정책
5. 광해군의 평가문제
2. 즉위 직후의 전란 복구 활동
3. 왕권 강화의 열망과 ‘폐모살제(廢母殺弟)의 굴레
4. 절묘한 외교정책
5. 광해군의 평가문제
본문내용
절 시켰던 것, 막강한 후금의 실체를 인정하여 그들을 다독이면서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적 실력을 쌓았던 것 등은 분명 뛰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한창 전쟁 중이라도 사자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유연한 의식을 지녔던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주변 국가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주변국의 동향에 늘 민감하게 주목하고, 평화의 시간 동안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것, 그것은 광해군이 지녔던 외교 역량의 핵심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료한 명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내정에서는 실패했다고 꼬집어야겠다. 서자이자 둘째 아들로서 즉위한 그는 늘 정통성의 한계 때문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즉위 직후 연립정권을 이끄는 정치적 역량을 발위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왕권강화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과 집착에 대북파가 편승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이첨 등이 왕권강화를 빌미로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가 불거지고, 정국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폐모살제’라는 굴레는 광해군 정권의 정당성을 갉아먹었고, 사대부들로 하여금 정권에 등을 돌리고 그의 모든 통치행위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요컨대 광해군은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17세기 조선에서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패는 내정의 기반이 없는 외교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17세기 초반의 한반도와 오늘의 한반도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17세기 초반, 임진왜란이 남긴 민생의 파탄을 재건하는 문제가 심각했다면 오늘은 IMF가 남긴 상처가 만만치 않다. 명청교체가 기존의 제국 명과 떠오르는 제국 청의 대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결국 미국 중심의 새로운 제국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강요되는 담론들일 것이다. 오늘 한반도 주변엔 중국이 그대로 있고, 일본이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최강 미국의 입김은 그야 말로 무시무시하다. 게다가 한반도는 갈라져있다.
그런 측면에서 광해군의 외교적 행적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이 적지 않다. 우선 명과 수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간파했던 광해군의 냉철함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은인’이자 ‘우방’으로 인식되어왔다. 임진왜란이나 식민지 지배처럼 일본에 의해 불행한 역사를 강요당했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에서 ‘우리에 대한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들도 그들 자신의 국익과 세계전략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자세다. 우리 역사엔 친중파,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가 무수히 많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민감하게 대응했던 사람은 드물었다. 주변 국가의 동향을 민감하게 살피고 연구하여 그를 바탕으로 적절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유연한 외교를 통해 얻어진 ‘평화의 시간’동안 자강책을 마련하려 했던 광해군의 자세이다. 오늘의 우리 역시 주변 열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그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시간 동안 능력을 길러야 한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인간의 존엄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경제적 실력, 문화적 역량, 군사적 잠재력 등에서 주변열강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럴듯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400여 년 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에게서 가장 확실히 배워야 할 점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정에서는 실패했다고 꼬집어야겠다. 서자이자 둘째 아들로서 즉위한 그는 늘 정통성의 한계 때문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즉위 직후 연립정권을 이끄는 정치적 역량을 발위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왕권강화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과 집착에 대북파가 편승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이첨 등이 왕권강화를 빌미로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가 불거지고, 정국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폐모살제’라는 굴레는 광해군 정권의 정당성을 갉아먹었고, 사대부들로 하여금 정권에 등을 돌리고 그의 모든 통치행위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요컨대 광해군은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17세기 조선에서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패는 내정의 기반이 없는 외교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17세기 초반의 한반도와 오늘의 한반도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17세기 초반, 임진왜란이 남긴 민생의 파탄을 재건하는 문제가 심각했다면 오늘은 IMF가 남긴 상처가 만만치 않다. 명청교체가 기존의 제국 명과 떠오르는 제국 청의 대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결국 미국 중심의 새로운 제국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강요되는 담론들일 것이다. 오늘 한반도 주변엔 중국이 그대로 있고, 일본이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최강 미국의 입김은 그야 말로 무시무시하다. 게다가 한반도는 갈라져있다.
그런 측면에서 광해군의 외교적 행적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이 적지 않다. 우선 명과 수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간파했던 광해군의 냉철함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은인’이자 ‘우방’으로 인식되어왔다. 임진왜란이나 식민지 지배처럼 일본에 의해 불행한 역사를 강요당했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에서 ‘우리에 대한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들도 그들 자신의 국익과 세계전략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자세다. 우리 역사엔 친중파,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가 무수히 많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민감하게 대응했던 사람은 드물었다. 주변 국가의 동향을 민감하게 살피고 연구하여 그를 바탕으로 적절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유연한 외교를 통해 얻어진 ‘평화의 시간’동안 자강책을 마련하려 했던 광해군의 자세이다. 오늘의 우리 역시 주변 열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그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시간 동안 능력을 길러야 한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인간의 존엄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경제적 실력, 문화적 역량, 군사적 잠재력 등에서 주변열강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럴듯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400여 년 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에게서 가장 확실히 배워야 할 점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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